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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재영 Aug 10. 2017

자유를 포기할 자유는 없다

2017년 8월 9일, 아흔 번째

문제는 <사랑의 기술>이었다. 철학적 사랑에 심취한 나머지 실수를 하고 말았다. 어떻게 하면 내가 품은 무한한 사랑을 표현할 수 있을까, 하다가 이렇게 말한 것이다.


"네가 어떤 행동을 해도 나는 너를 사랑할 거야."


너를 너무나 사랑해서 네가 언제나 행복했으면 좋겠다는, 네가 행복을 느낀다면 나를 떠나도 기꺼이 받아들이겠다는, 나를 사랑하지 않아도 너를 끝까지 사랑하겠다는 생각이었다. 만약 너를 사랑하는 내 마음이 너를 불행하게 만든다면 나는 사랑을 그만두어야 한다. 사랑해서 사랑을 멈추는 일이 가능하리라 믿었다.


논리학에서는 이걸 모순이라 부른다. 세상 어디에도 '그러하면서, 또 동시에 그러하지 않은 것'은 없다. P = ~P. 이건 마치 따뜻한 아이스 아메리카노와 같은 말이다. 좀 더 그럴 듯하게 사랑을 표현하는 데는 성공했으나 없는 말을 지어낸 셈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나는 그런 사랑을 그만 두게 되었다. 에리히 프롬은 소유의 굴레에서 벗어나 존재를 사랑하라고 말했으나, 사랑에는 소유가 필수적이다. 적어도 우리가 감각의 옷을 입고 있는 한 사랑은 시각이고, 촉각이고, 후각이며 열거할 수 없는 무수히 많은 감각을 통해서만 전달된다. 사랑이란, 사랑하지 않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민주주의는 사랑과 닮았다. 민주주의의 기본은 인민의 자유다. 자유로이 말하고, 모이고, 권리를 행사할 때 비로소 진정한 민주주의를 누릴 수 있다(그래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닉값을 못한다). 진정한 민주주의를 위해 우리는 어디까지 자유를 허용해야 할까? 존 스튜어트 밀에 따르면 타인의 자유를 훼손하지 않는 한 자유를 허용해야 한다. 그럼 이 말은 어떨까.


"이제 민주주의는 그만두죠."


만약 이 생각이 공감대를 얻어 합법적인 절차로 정책에 채택되었다고 상상해보자. 이 정책은 사회적으로 용납 가능한 정도의 자유만 침해한다(실제 채택되는 정책 중 어떤 정책도 모든 이의 자유를 무한보장할 수는 없다). 그 나라는 민주주의 국가인가, 아닌가?


민주주의가 보장하는 자유는 민주주의를 파괴하자는 생각까지 보장하지는 않는다. 이를 일컬어 '방어적 민주주의'라 부른다. 사랑해서 사랑하지 않으리라는 말이 이치에 맞지 않듯이, 자유롭기 때문에 자유를 포기한다는 말도 옳지 않다. 사랑은 너와의 관계 안에서만 유효한 말이다. 자유도 민주주의 안에서만 가능한 말일 게다. 내가 사랑하는 일이 더 이상 네게 행복이 아니라면 사랑은 없는 것과 같다. 목숨을 끊을 자유까지 원하는 사람은 이미 이 세상에 죽고 없을 것이다.


언젠가, 계엄령을 선포하라며 시위하는 군중을 보았다. 나는 그저 허허, 웃을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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