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최재영 Oct 18. 2021

미안해와 괜찮아

2021년 10월 18일, 백스물한 번째

용서는, 말하자면,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않는 것이다. 용서를 받는 사람은 그가 한 일이 아무리 큰 잘못이라 하더라도 그 잘못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용서를 하면 행위와 행위자가 분리되기 때문이다. 신이 용서할 때, 원죄를 저질렀던 인간은 벌거벗은 인간이 된다. 그러나 인간이 용서할 때 용서받는 인간은 인간이기보다 인격으로 서있다. 인격은 연약한 내면을 보호하는 마지막 옷이다, 껍데기다, 가면이다. 그러니 용서는 우리 사이가 사람과 사람 사이라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이다. 그래, 너는 완벽하지 않다, 너는 신이 아니다, 나도 그렇다, 나도 그렇다, 나도 그렇다.


사과는 용서를 구하는 일이다. 사과는 용서를 완결하지 않는다. 다만 용서가 발생할 계기를 마련할 뿐이다. 그런데 신기한 점은 사과가 용서의 조건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우리는 사과하지 않아도 용서하는 사람들을 발견할 수 있다. 그래서 사과는 부수적이다. 그런데 사과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좀처럼 용서할 맘이 나지 않는다. 그런 인간은 마치 제가 신이라도 되는 양 까부는 것이다. 나는 잘못이 없다, 나는 완벽하다, 내가 잘못이라는 네가 잘못이다. 제 눈 앞에 사람이 없다(眼下無人)는 말은, 다시 말해, 제 자신이 인간답지 못하다는 말이다. 사과만으로 용서가 끝났다고 여기는 이들은 눈 앞에 인간을 보지 못하는 자들이다.


용서할 수 없는 자들은 용서의 기회를 뺏는 자들이다. 사람을 죽인 이가 용서받았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는가? 살인자는 결코 용서받을 수 없다. 용서할 사람이 이미 세상에 없는데 대체 누구에게? 배 아파 낳은 자식이라도 어미는 자식이 될 수 없다. 초등학교 다닐 적에, 힘좀 깨나 쓴다는 놈에게 얻어맞은 적 있다. 학교 선생은 나와 그놈을 잡아두고 사과와 용서를 종용했다. 그는 이겼다는 표정으로 '미안해' 했고 나는 '괜찮아'라는 말로 패배를 인정했다. 선생은 내가 이겼다고 했지만, 나는 분이 풀리지 않을 때마다 패배자가 됐다. 이청준도 그랬고, 이창동도 그랬다. 용서해야 했던 자들은 그렇게 파멸에 이르게 된 것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자만과 자신 사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