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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재영 Mar 21. 2022

무능이 자랑이 되는 시대

공감능력을 잃었음을 자랑스레 여기는 사람들이 있다. 마치 그들은 ‘내가 이렇게 똑똑해서 너희와는 시각이 달라라고 말하는 듯하다. 예컨대 수많은 사람들이 죽은 비극적인 사건을 보고도 우스개랍시고 보험료를 계산한다든지, 삶의 막다른 길에서 곡기를 끊을 수밖에 없는 사람들 앞에서 게걸스럽게 배달음식을 처먹는 부류의 사람들이다. 그들은 타인의 비극을 한낱 농담거리로 삼는다. 그들의 유머에는 금기가 없다. 그들은 자기 입으로 내뱉는 헛소리를 되새겨본 적이 없다. 주고받는 말의 의미를 파고든  없는 사람은 천박하다. 그래서 그들의 자랑은 천박함의 발로이다.


'공감할 수 없음'도 무능의 하나이다. 공감능력의 부재는 합리성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무리 똑똑해도 목석같은 사람은 인간답지 않아 보인다. 응당 분노해야 할 것에 분노하는 것을 우리는 정의라 부른다. 정의는 논리가 아니라 감정으로 전파된다. 그래서 사안에 따라 공감을 호소하는 사람이 더 현명할 때가 있다. 분노해야 마땅한데 거리를 둔다거나 침착함으로 포장하는 건 비열함의 다른 모습일 뿐이다. 사람은 상황에 맞게 감정을 표현할 때 인간이 된다. 인간은 다른 인간과 더불어 사는 동물이다. 인간다운 인간만이 다른 인간과 함께 살 수 있다. 인간이 홀로 살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인간만이 현명하다. 인간답지 않은 것들 틈바구니에서 정치를 희망할 수 있다면, 그건 정의로운 자들, 알맞게 분노하는 자들 덕분이다. 동료 인간 없이도 혼자 모든 걸 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은 자기자신을 신으로 알고 있는 사람이다. 스스로 신이라 여기는 인간은 오만하다. 오만한 인간은 신으로부터든 인간으로부터든 복수의 대상이 된다. 공감할 줄 모르는 사람은 함께 살 줄 모르는 사람이다.


한편, 공감만이 답은 아니다. 분노하기 전에 말로 충분히 해결해야 한다. 말하다 말하다 도저히 안 될 때 최후의 방법이 분노고 감정이다. 인간은 언어를 사용하는 동물이기 때문이다. 감정이 언어를 밀어내는 순간 인간은 동물이 된다. 나만이 정의롭다는 과도한 확신도 복수를 부른다. 감정의 절제가 합리성으로 성급하게 일반화된 건 이 때문이다. 모든 사안에 정의를 부르짖는 사람은 모든 사안에 합리성을 부르짖는 사람만큼이나 어리석다. 공감하기에 앞서 말로 풀어야 하고, 말하기에 앞서 따져보아야 한다. 말할 줄 모르는 사람도 역시 함께 살 줄 모르는 사람이다.


다른 이의 슬픔에 돌 던지지 마라. 말로 해결할 생각 없이 눈물부터 보이지 마라. 내 눈엔 모두가 모자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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