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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재영 Mar 27. 2022

공감도 지능순

이준석은 현명한 인간이 아니다

이준석의 글을 보고 놀랐다.


그는 요 며칠 단 한 번도 혐오의 단어를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가 쓴 글은 하나같이 혐오로 얼룩져 있었기 때문이다. 인간은 맥락을 읽는 동물이다. 그는 자기를 공격하는 사람들이 자기가 어떤 점에서 여성혐오를 했는지, 장애인혐오를 했는지 대답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동시에 그 역시도 그 자신이 어떤 점에서 혐오를 부추기지 않았는지도 말할 수 없다. 혐오의 단어를 사용하지 않았지만 혐오의 맥락을 내포했기 때문이다.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의 출퇴근길 지하철 점거 시위가 시민들에게 불편을 준다는 점을 부각함으로써, 그들의 메시지를 혼탁하게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전장연의 메시지는 간단하다. 그들의 장애는 협상의 대상이 아님에도, 기획재정부는 장애인 예산을 두고 협상을 시도했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이 국고를 관리하는 공무원의 소명이 아니냐는 물음에는 또 따져봐야겠지만, 적어도 지하철에 나선 장애인들의 울분을 이해해줄 수 있지 않느냐는 게 내 생각이다.


비장애인은 선택권이 있다. 장애인은 선택하기가 매우 어렵다. 선택지가 너무 적기 때문이다. 나는 저상버스를 많이 타봤지만 장애인이 이용한 걸 본 적 없다. 상식을 갖춘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다. 배차에 쫓겨 승객이 앉기도 전에 출발할 수밖에 없는 버스 산업의 구조는, 모든 시민을 위협하고 있다. 여기서 장애인은 대중교통 산업구조의 어려움을 넘어 신체의 어려움이라는 이중고를 겪는다. 그래서 나는 출퇴근길에 장애인을 본 적 없다. 어쩌면 그런 출퇴근길이 그가 말하는 ‘쾌적한’ 길일 지도 모르겠다. 이런 구조적 문제들이, 장애인이 처한 차별적 조건과 만나 구조적 차별이 되는 현상은 무수히 많다. 안 그래도 취업하기 어려운데 보조금까지 적다면 죽으라는 소리다. 인간 대접 하기 어렵다는 말이다. 그래서 그들은 지하철에 뛰어들었다고, 나는 믿는다. 시민에게 욕 먹어 죽나, 복지 사각지대에 놓여 죽나 똑같다는 마음이었을 것이다.


언더도그마에 빠진 건 이준석이다. 전장연 시위에 공감하는 사람들 중에, 소수자나 약자가 ‘언제나 옳다’고 주장한 사람은, 적어도 내가 보기에 없다. 전장연 시위가 주는 불편을 감수하면서도 그들의 뜻에 공감할 줄 아는 사람들은 단지 충분한 상상력을 가진 사람들일 뿐이다. 장애인이 겪는 뿌리 깊은 불편을 그들은 살면서 한 번도 경험한 적 없다. 그러나 그들은 상상력을 통해 공감하는 데 성공했다. 그들은 유능한 사람이다. 장애인의 불편에 공감할 수 없다고 고백하는 사람들이 무능한 사람이다. 약자나 소수자가 언제나 옳다고 한 적 없다. 오히려 이준석 같은 부류의 사람들은 ‘사회를 장악한 위선적 분위기에 맞서 소신껏 틀림없는 말을 하는 소수의 깨어있는 사람들’의 말이 언제나 옳다고 말하는 오류를 저지른다. 그러나 그런 부류의 사람들은 선지자도 아니고 순교자도 아니다. 교양 없고 몰상식한 사람이다. 인류라는 단어를 입에 올릴 자격이 없는 사람들이다. 문화나 문명의 의미가 기본적으로 (그들이 위선이라고 비난하는) 공감에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이준석의 논리는 간단하고 강력하다. 전장연의 요구조건과 시위의 장소가 맞지 않다는 것, 전장연의 시위가 너무나 많은 사람의 불편을 초래한다는 것이다. 틀린 말 없다. 전장연의 시위가 예기치 않은 피해자를 만들어내기도 했을 것이다. 할머니의 임종을 지켜야 한다고 울부짖은 사람이 대표적이다. 나는 장애인의 울분만큼이나 그의 절규에도 공감한다. “버스 타고 가세요”라고 했던 사람의 말은 분명 적절치 않았다. 마찬가지로 나는 우리 사회 누구에게도 이준석과 같은 말을 하도록 권장해서는 안 된다고 본다. 공당의 대표가 이 따위 말을 부끄럼 없이 말할 수 있는 사회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고 본다. ‘누군가의 아픔이나 불편을 다수의 이익을 위해 묵살해도 좋다’는 주장은, 공동체의 존망이 경각에 달린 아주 특별한 위기의 순간에만 허용해야 하기 때문이다. 출퇴근길의 불편이 그런 상황인지는 여러 시민들과 따져볼 일이다.


‘같은 선에서 출발하자’, ‘공정하게 경쟁하자’ … 우연히 좋은 위치를 선점한 무뢰배들이 흔히 하는 말이다. 인간은 이미 능력 밖의 조건에 놓인 존재다. 인간은 부모를 고를 수 없다. 인간은 타인과의 상호작용을 통제할 수 없다. 인간은 자기가 알지 못하는 곳에서도 어김없이 작동하는 자연법칙을 자기 지배 아래 둘 수 없다. 하물며 하루를 살아가는 데에도 컨디션의 영향은 막강하다. 조건 지워진 존재일 뿐인 인간이, 기껏 다른 인간보다 좋은 조건에 놓였다고 ‘능력만 보자’며 공정한 척하는 위선은 그래서 역겹다. 인류의 문명은 그런 조건적 차이를 사회적 차별로 전락시키지 않는 길을 걸어가고 있다. 문화는 위선이 아니라 진보의 결과다. 그런 진보는 인간의 위대한 상상력으로 가능하다. 배불러도 배고픈 사람을 헤아릴 줄 아는 공감능력이 우리를 인간답게 만든다.


무능이 자랑이 되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인간이라면 마땅히 갈고닦아야 할 공감능력이 없음을, 자랑으로 여기는 치들이 설치고 있다. 그 꼴을 우리는 보고 있다. 그 선봉에 이준석이 있다. 아는 게 많아도 현명하지 못한 사람이 바로 그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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