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4월 27일, 두 번째
"엄마, 이게 뭐야?"
"그건 꽃이라고 하는 예쁜 나뭇잎이야."
"... 왜?"
"...?"
아이를 품에 안은 여자가 옆에 앉았다. 아이는 엄마와 재잘재잘 잘도 떠든다. 자세히 들어보니 아이는 엄마와 수다를 떨고 있는 게 아니다. 끊임없이 묻고 있다. "이게 뭐야?" 세상 모든 지식을 빨아들이겠다는 심산인지, 질문이 질문의 꼬리를 문다. "왜?" 사실 피곤한 건 엄마뿐이다. 대답이 채 끝나기도 전에 짧고 빠르게 반격한다. "왜?" 이 한 마디에 엄마는 눈동자를 굴린다. 뜸을 들이고 고민 끝에 대답한다. 그리고 또다시, "왜?" 하늘이 노래진다. 옆에서 그걸 보는데, 그렇게 재밌을 수가 없다. 나도 저랬겠지?
"왜?"
"하나님이 그렇게 만든 거야."
"이게 뭐야"는 세상에서 가장 간단한 질문이다.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그것을 어떻게 부르는지 설명해 주는 것으로도 충분하다. 비를 가리켜 물어보면 "그건 비라고 하는 물방울들이야"라고 대답해 주거나, 꽃을 가리켜 물어보면 "꽃이라고 하는 예쁜 나뭇잎이야"라고 대답해 주는 식이다. 대답을 들은 아이는 생각에 빠진다. 그 대답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듯이 엄마를 바라본다. "이게 뭐야"는 거기까지다. "이건 이거야"라는 대답을 들으면 더는 "이게 뭐야"로 질문할 수가 없다. 그러니까, "이게 뭐야"로는 그것에 대해 더 이상 알아볼 수 없다.
"왜"는 "이게 뭐야" 다음으로 간단한 질문이다. 간단한 건 둘째 치고, 이 질문은 너무나 강력하다. 내가 본 아이 엄마는 "왜" 세 번에 포기를 선언했다. "집에 가면 아빠한테 물어보자~" 나였어도 그랬을 거다. '그게 무엇인지'는 설명하기 쉬워도, '그게 왜 있는지'는 설명하기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니까. "이게 뭐야"를 묻다 보면 "왜"가 나온다. "이건 이래서 이거야"라고 대답한다. "왜"라는 질문에는 그것과 다른 것 사이의 관계를 설명해야 대답할 수 있다. 덕분에 아이는 대답에서 새로운 질문거리를 찾는다. "꽃은 식물이 아기를 낳기 위해 만든 거야"라는 대답에 "식물이 뭐야"라고 묻는다. 식물이 뭔지 대강 알아본 아이는 "아기는 왜 낳는 거야"라고 묻는다. 이런 식으로 "왜"에 대한 대답은 계속해서 또 다른 질문을 낳는다.
"왜"에 대한 대답에도 끝이 있다. "이게 뭐야"는 이름을 묻는 질문이고, "왜"는 원인을 묻는 질문이다. 원인을 알아야 제대로 알 수 있다. "이게 뭐야"라고 묻는 건 이미 그걸 보고 있다는 거다. "왜"라고 묻는 건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싶다는 거다. 보이지 않는 것을 대답하려니 어려워질 수밖에 없다. 결국 엄마가 알 수 없는 데까지 질문이 흘러간다. 아빠는 알고 있겠지. 아빠도 모른다. 그런데 아이가 계속 묻는다. "아빠, 왜?" 큰일 났다. 모르는데 대답해야 한다. 결국 해답지를 보고 만다. "하나님이 그렇게 만든 거야."
탈레스, "세상은 물로 이루어져 있어."
헤라클레이토스, "아니지, 세상은 불로 이루어져 있지."
서양철학사에 이름을 남긴 사람들은 모두 끝까지 해답지를 보지 않은 사람들이다. 철학이 시작된 이후로 많은 사람들이 물어봤나 보다. "왜?" 사람들이 계속해서 묻다 보니 '세상이 왜 생기게 되었는지'까지 물었다. 후손들이 '자연철학자'라고 이름 붙인 학자들은 이 질문에 대답하려 했던 사람들이다. 그들이 살던 2500여 년 전은 모든 것은 물로 이루어졌다느니 불로 이루어졌다느니 하는 대답이 만발했던 시기다. 우스운 대답이지만, 결코 웃을 수만은 없다. 적어도 그들은 "하나님이 만든 거야"라는 대답은 안 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