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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재영 Apr 27. 2022

「평등 및 차별금지에 관한 법률안」 제정을 두고

평등법은 후려치기가 아니다

「평등 및 차별금지에 관한 법률안」 제정을 두고

"내 자식에게 동성애를 교육시키고 싶지 않다"

"남자 며느리, 여자 사위 들이게 된다"

"남성이랑 탈의실을 같이 쓰라는 거냐"

운운하는 분들께,


요새 전화로 싸우는 일이 잦다. 끼어들 틈도 없이 자기 말만 쏟아내는 분들이면 그냥 듣고 끊을 텐데, 몇몇 분들은 내 대답을 요구하신다. 그러면 나는 "선생님 말씀에는 동의할 수 없다"고 답한다.


"

당연히, 사람은 다르다. 모든 인간은 법 앞에 평등할 뿐이다. 벌거벗은 사람은 다른 사람과 다르다. 신체도 다르고 능력도 다르다. 여러 물건의 생김새와 기능이 각각 다른 것과 마찬가지다. 이걸 다름(otherness)이라 부른다.


한편으로 인간은 다른 이와 구별되는 목적을 갖고 행위할 수 있다. 인간과 인간을 구분짓게 하는 중요한 무언가가 여기서 비롯된다. 인간의 행위를 보고 다른 인간은 그의 의도를 추측하고 그를 행위자로 알아본다. 이런 일련의 과정이 사람을 단지 고깃덩어리에서 동료 인간으로 만들어준다. 이걸 차이(distinction)라 부른다.


이렇게나 다른 인간을 같다고 말하는 게 오히려 어불성설일 때가 있다. 토끼와 거북이를 같은 경주선상에 두는 것, 신체를 성욕의 도구로 일반화하는 것, 나아가 모든 사람이 생존을 위한 경쟁만 한다고 보는 것... 이런 방식이 인간을 사람이나 물건으로 후려친다. 때로는 인간을 다르게 대하는 편이 더욱 합리적이다.


그런데 인간이 동료 인간을 두고 서로 같은 인격이라고 인정하지 않으면, 함께 살 수 없다. 노예와 주인을 함께 산다고 할 수 있을까? 양과 양치기가 공동체를 이루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복종과 순응은 함께 사는 인간의 모습이 아니다. 인간이 공동체를 이루고 서로 의견을 개진하며 살기 위해서는 어떤 조건 아래 서로가 같다고 말해야만 한다. 인간은 법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모든 인간을 같게 대하자고 약속함으로써 국가를 이룰 수 있다. 이걸 평등(equality)이라 부른다.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서로를 단지 법 안에서 평등하게 대하는 일 뿐이다. 법 밖의 영역은 말 그대로 무법지대여서 평등한 것을 다르게 대하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인격의 차이를 신체의 동일함으로 치부하는 일도 잦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고 억울한데, 법으로 보호받지 못하는 일들... 괜히 무법지대라 일컬어서 무시무시하게 들릴 뿐이지, 그 영역은 도처에 널려있다. 학교에서, 면접자리에서, 직장에서, 심지어는 정부기관과 시민사회에서도 그런 무법상태가 나타난다. 나는 그걸 차별(discrimination)이라 부른다.


법의 영역을 확대해 무법지대를 줄이자는 게 평등법의 취지다. 모든 인간을 하나로 후려쳐서 똑같이 대하자는 게 아니다. 다른 것은 다르게, 차이나는 것은 차이나게, 평등한 것은 평등하게 대해야 하는데, 그 맥락에는 언제나 "합리적인 이유"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래야 '함께 살기 위한 울타리'라는 법체계 전체의 의미가 분명해진다.


말씀하신 것처럼, 이 법으로 인해서 동성애 교육이나 남자 며느리·여자 사위, 탈의실 사용을 강요받는 결과가 나타난다면, 그 역시 우리가 함께 살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인간을 대하는 모든 일에 서로가 납득할 수 있는 합리적인 이유를 대자는 게 이 법의 취지다. 이 법이 통과되고 난 이후에도 계속해서 시민들의 관심이 필요한 이유다. 다만, 그 관심이 분노나 혐오, 시기로 이어져서는 안 된다. 나와 다르다는 이유로 동료 시민을 두려워 말고, 무법지대에 놓인 몇몇 사람들의 처지를 이해해 달라.

"

라고 말하고 싶은데 말할 기회를 안 주신다.


"나는 당신 말 듣고 싶은 게 아니니까, 내 말에 반대하지 말고 들어"라고 역정을 내시기에 "알겠습니다" 하고 받아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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