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훈 법무부장관 후보자의 청문회를 즈음하여
연좌제는 부당하다. 아비의 잘못은 아비에게만 묻고 딸에게는 묻지 말아야 한다. 만일 딸에게도 아비의 잘못을 묻는다면, 딸은 자신의 능력을 나쁘게 사용한 때문이 아니라, 순전히 불운한 때문에 벌을 받게 된다. 자기 능력을 자유롭게 사용하도록 권리를 보장하되 그 능력으로 죄를 지으면 처벌한다. 이것이 근대국가의 원리이다. 법적으로는 그렇다.
사회적으로는 어떠한가? 죄 지은 아비가 감옥에 가면, 키워줄 사람이 없어 보육원에 가는 아이들이 있다. 어린 아이에게 부모는 세계의 전부다. 부모가 사라진다는 건 아이의 세계가 요동치는 사건이다. 법적 처벌을 받는 것만큼 큰 고통을 아이가 받는다. 그뿐이랴. 부모가 기소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아이는 고통을 받는다. 수사관들이 불러내 따져묻고, 집을 뒤진다. 그 고통은 아이가 능력을 잘못 쓴 탓인가? 아니다. 순전히 불운이다. 법적으로 연좌제는 금지됐다. 그러나, 사회적으로 연좌된 사람들이 있다.
죄 지은 아비와 연좌된 딸이, 우리 사회에는 아직도 있다. 심지어는 범죄 같지 않은 불법을 저지른 아비와, 그로 인해 살아온 과거를 통째로 상실한 딸이 있다. 비행기 기다리는 줄 새치기 좀 했다고 유승준처럼 입국금지를 시킨 꼴이다. 몇몇 언론은, 콜로세움에서 검투사가 사자에게 뜯기는 장면을 해설하듯이, UFC에서 피흘리며 얻어맞는 장면을 중계하듯이, 아주 흥미진진한 사건마냥 지껄였다. 사람들은 일가족의 몰락을 공정과 정의의 상징이라며 숭배했다. 광기의 시대였다. 그 아비와 딸을 짓밟은 금송아지가 최고 권력을 쥐었다.
그 금송아지의 발굽 정도 되는 자가 청문회를 앞두고 있다. 그는 역겨운 사람이다. 스스로를 신으로, 정의의 화신으로 여기는 오만한 자다. 나는 그가 해온 말과 행동들에 결코 동의할 수 없다. 소의 발굽에는 제가 싼 똥이 껴있다. 금송아지의 발굽에는 연좌된 사람들의 피눈물이 묻어있다. 자신의 과오로 딸의 과거를 지워버린 아비의 절규가 흐른다. 그 아비를 그렇게 만든 자는, 스스로를 신으로 여긴 나머지, 자신이 같은 처지에 놓이리라 여기지 않은 듯하다. 실제로 그가 쓴 논문을 읽어보면, 놀라우리만치 오만하다. 전문가가 해야 할 일에 일반인은 방해해서는 안 된다는 의식이 논문을 가득채웠다.
그러나 그 역시 인간이다. 인간은 때로 불가피한 상황으로 타인에게 피해를 주기도 한다. 인간은 상황의 피해자이면서 동시에 타인에 대한 가해자이다. 그가 자신의 삶을 아무리 정치하게 꾸몄다고 해도, 탈법과 편법 없이 살았을 수 없다. 시민의 눈과 귀가 필요하다. 전문가도 결국 자기 분야 밖에서는 별볼일없는 사람임을, 시민의 판단력으로 드러내야 한다. 그의 전문분야는 다른 사람을 터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별건의 별건의 별건으로 털리는 일을 한번도 겪어본 적 없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번까지만이다. 누군가를 털어 걸레짝으로 만드는 일이 다시는 우리나라에서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마지막으로 보여주어야 한다. 전문가는 신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진리를 확인시켜야 한다. 전문가의 기술이 아니라, 시민의 권력으로 그의 삶을 들여다보고 저잣거리에 걸어두어야 한다. 전문가에게도 같은 기준이 적용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역사에 남겨두어야 한다. 그러나 이건 복수가 되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복수의 고리를 끊는 일이어야만 한다. 금송아지는 태우고 부수고 모든 사람에게 죄가 있음을 알리고 기록해야 사라질 수 있다.
이번 청문회는 묘하게 정반대다. 압수수색이 없다. 관음 수준의 언론이 없다. 제출된 자료가 거의 없다. 후보자의 인정과 사과가 없다. 오히려 변명과 맞고소만 있다. 그런데도 의심스러운 정황이 인터넷에 차고 넘친다. 딸의 입장도 정반대인데, 과거가 아니라 미래가 걸려 있다. 미국 입시는 작년 말에 시작해 올 봄에 끝났을 텐데. 딸아이는 어디로 가게 될까? 한 아이의 입시 결과에 수많은 시민들이 주목할 것이다. 아이의 세계는 투명한 어항처럼 벌거벗겨졌다. 불운한 아이. 안타깝다. 하지만 그게 네 아비의 전문이다. 이번 청문회를 계기로 겸손을 배우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네 아비도 스스로 신이 아니라 인간임을 배웠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