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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재영 May 20. 2022

축구장에서 혁명을 보다

모든 시작은 규칙을 어길 때 나타난다

나는 영국 축구리그 소식을 가끔 듣는다. 영국에는 세계적인 축구리그로 인정받는 프리미어리그가 매년 열린다. 프리미어리그는 연간 성적이 나쁜 팀을 추려 하위리그로 강등시킨다. 오늘 들은 소식은 에버튼이라는 팀이 프리미어리그 잔류에 성공했다는 소식이었다. 리그 잔류가 확정되는 순간, 관객들이 일시에 달려나왔다. 경기장에 뒤섞여 기뻐하는 선수와 관객들.


나는 그들의 기쁨을 보며 혁명을 떠올렸다. 모두가 한순간에 법을 어기는 광경은 말 그대로 ‘혁명적인 순간’이기 때문이다.


선수와 관객 사이에는 선이 있다. 경기가 한창 진행되는 중에는 아무도 그 선을 넘지 않는다. 가끔 그 선을 넘어 경기장에 난입하는 관객이 있는데, 그런 관객은 ‘훌리건’이라 불리며 주변 관객에게 지탄받는다. 모든 관객이 그 선을 존중할 때, 선수는 뛸 수 있고 관객은 즐길 수 있다. 선수와 관객 사이에 선을 그은 최초의 목적은 그런 즐거움 때문이었겠으나, 나중에는 그냥 이유없이 선 넘기를 꺼리게 된다. 선을 지키는 게 관객의 미덕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 선은 경기가 끝난 이후에도 유지된다. 아주 가끔, 그런 꺼리는 마음을 상실한 사람들만 홀로 선을 넘는다.


그런데 그보다 더 아주 가끔, 오히려 선을 넘지 않는 편이 더욱 꺼려지는 경우가 있다. 너무나 바라왔던 결과, 영화 같은 승리는 관객을 경기장으로 빨아들인다. 경기장에 뛰어들어 함께 뒹굴지 않고서는 도저히 배길 수 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 소리를 지르고, 연막을 터뜨리고, 깃발을 휘두르며 내가 살아있음을 느끼는 것이다. 오늘 봤던 에버튼의 관객들이 그랬다. 그들의 표정과 몸짓에서 ‘내가 선수고, 내가 에버튼이야’ 하는 마음이 읽혔다. 모두가 일시에 선을 넘는다는 점에서 그 순간은 혁명과 비슷했다.


당연히 혁명은 법을 어기기만 하는 게 아니다. 사람들이 법을 어겨서, 아예 새로운 법체계를 만들고, 그 체계를 지켜나갈 때 집단적인 불복종은 혁명이 된다. 에버튼의 관중들이 뛰쳐나온 순간은 ‘혁명적인 순간’일 뿐이지 ‘혁명의 순간’이 될 수 없다. 만약 뛰쳐나온 에버튼의 관중들이 새로운 장르의 놀이를 만들고, 그 놀이를 다른 많은 사람들도 즐긴다면, 에버튼의 잔류는 그 게임을 즐기는 사람들에게 혁명이라 불릴 만할 것이다.


새로운 무언가가 시작되려면 두 가지가 필요하다. 하나는 규칙을 깨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걸 계속 이어가는 것이다. 다시 말해 과거에 시작된 걸 멈추고 현재 시작한 걸 미래에 이어가는 것이다. 모든 시작은 과거를 부정하는 일에서 비롯된다. 그래서 혁명가들은 과거에 대한 분노 내지는 적어도 ‘이게 아니야’라는 마음을 갖는다. 에버튼의 팬들이 혁명가가 될 수 없었던 이유는 그들이 축구를 너무나 사랑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들은 새로운 게임을 새로 시작하고 싶어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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