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톤은 정치적 영역에서 성차별을 비판했다. 예를 들자면 『국가』의 이런 언급이다.
"나라를 경영하는 사람들의 일로서 여자가 여자이기 때문에 여자의 것인 것은 없고, 남자가 남자이기 때문에 남자의 것인 것도 없다네. 오히려 여러 가지 성향이 양쪽 성의 생물들에 비슷하게 흩어져 있어서, 모든 일에 여자도 '성향에 따라' 관여하게 되고, 남자도 모든 일에 마찬가지로 관여하게 되는 걸세." (455d-e)
플라톤은 페미니스트였는가? 많은 학자들이 갑론을박했다. 그러나 대세는 플라톤은 페미니스트가 아니었다는 데 기운 듯하다. 플라톤이 이런 말을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모든 경우에 여자가 남자보다 힘이 약하기는 하이." (455e)
뿐만 아니라 플라톤은 슬픈 노래가 여자들에게나 어울린다는 식의 말을 하기도 했다.
"그러니까 우리가 이름난 남자들의 애가들을 가려내어서, 이를 여인들에게 돌린다면, 그것도 진지한 여자분들에겐 그러지 않는다면, 그리고 남자들 중에서는 모든 못난 자에게 돌린다면, 이는 옳을 걸세." (387e-388a)
이런 이유로 플라톤이 페미니스트였다고 하면, 많은 사람들은 의아해할 것이다. 특히 자칭 페미니스트라는 몇몇 사람들에게는 다소 비판을 받을 수도 있겠다.
그런데 간과한 지점이 있지 않을까? 이렇게 생각해보면 좋겠다. 한 사람과 여러 사람은 다르다는 점이다. 개별자와 종은 다르다. 어떻게 다르냐고? 물리학에서 말하는 거시세계과 미시세계의 구분을 참고하면 좋겠다.
슈뢰딩거는 『생명이란 무엇인가』에서 브라운 운동을 설명하면서 이렇게 썼다.
"밀집된 지역에 있든지 빈터에 있든지 모든 분자는 물분자의 충격에 의해 계속 떠돌아다니고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이동할 뿐이다. 어떤 때는 농도가 높은 쪽으로, 때로는 농도가 낮은 곳을 향해, 또 어떤 때는 비스듬히 움직이고 있다. 이러한 종류의 운동은 '걷겠다는' 욕망으로 가득한 사람이 눈을 가린 채 넓은 곳에서 아무런 방향의 지표 없이 계속 길을 바꾸면서 걷는 운동과 흔히 비교되곤 한다." (45)
여러 사람의 행동은 한 사람의 행위보다 예측하기 쉽다. 모든 사람은, 먼지나 물 분자, 박테리아처럼 작은 입자에게 영향을 받는 아주 작은 입자와 같이, 또는 광자에마저 영향을 받는 전자와 마찬가지로, 세계에 영향을 받으며 살아가기 때문이다. 다소 비약이겠으나, 모든 개별자는 브라운 운동을 한다. 미래를 확실하게 아는 사람은 있을 수 없기 때문에 '눈을 가린' 것처럼 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브라운 운동을 통해 확산 현상이 일어나는 것처럼 개별자의 행위는 사회적 행동을 만든다. 경제학이나 사회학, 심리학에서는 모델을 만들어볼 수 있지만 철학에서는 그런 공식을 만들기 어려운 이유다.
자, 어설픈 물리 지식이 플라톤과 페미니즘에 어떤 연관이란 말인가? 성은 개별자가 아니라 사회적 다수에 주어진다. 그러니까, 성별은, 여성에게든 남성에게든 어떤 한 사람에 붙이는 꼬리표가 아니라 여러 사람들이 모여 있을 때 구획을 나누는 방법이라는 것이다.
인간이 개별자를 만날 때에는 그의 역량을 본다. 성이고 학벌이고 재산이고 계급이고 없이, 그가 잘하면 좋고 못하면 싫다. 진정한 의미의 능력주의다. (물론 한국의 능력주의 정신은 능력을 입증할 증거로 공정한 절차를 숭배한다. 베버가 발견한 자본주의 정신과 마찬가지로 능력주의 정신은 능력주의와 다르다.) 그러나 사회적 다수를 만날 때에는 역량 외의 것이 아주 중요해진다. 능력과 운의 대비는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핵심은 모든 개별자가 대하는 타인은 사회적인 다수라는 데 있다. 우리는 모든 맥락에서 자유로운 완벽한 이방인(total stranger)을 만나기가 너무나 어렵다. 누구를 만나더라도 그를 향한 의견, 편견, 선입견이 함께한다. 그게 나의 것이든, 남의 것이든. 모든 인간이 맥락 속에 놓여 있는 것이다. 그 맥락은 '인간은 결코 홀로 살 수 없다'는 맥락이다.
그래서 인간의 역량은 언제나 성별 따위의 것들에 가려진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역량을 폄하하지 말라'는 주장은, 그의 역량을 둘러싼 모든 것을 배제하고 역량만 봐달라는 것이다. 그건 인간으로서는 아주 어려운 일이다. 역량이 아주 탁월하다면 모를까. 이건 남성에게도 똑같다. 그 맥락이 배제받아 마땅한 맥락이었는지보다 배제할 수 있는 것인지부터 논의해야 한다.
나는 우리나라에서 페미니스트로 유명세를 떨친 몇몇이 이런 페미니즘을 주장한다고 본다. 텍스트에서 맥락을 오려내자는 페미니즘, 사회적 다수 속에서 개별자를 도려내자는 페미니즘 말이다. 페미니즘도 너무나 다채로운 스펙트럼 안에 놓여서 그들이 어떤 페미니즘을 주장하는지는 알기 어렵다. 그러나 개별자의 역량을 중시한다는 점에서는 플라톤의 입장도 이와 유사하다. 그래서 그가 책에서 열심히 그리는 국가는 '이상적인 국가'에 지나지 않는다.
다시 플라톤으로 돌아가 보자. 정치적인 것에 여성과 남성이 따로 있지 않다는 플라톤의 주장은 옳은가? 옳다. 그 주장이 페미니즘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나?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여성에 선입견을 가진 플라톤과 그의 주장은 양립 가능한가? 충분히 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