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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재영 Sep 15. 2022

일꾼과 말꾼

왜 일한 건 티 내야 할까 1

어딜 가나 묵묵히 일하는 사람이 있다. 그런 사람을 일꾼이라 불러보자. 일꾼은 말하기보다 일하기를 좋아해서, 잘 드러나지 않는다. 사람들은 일꾼의 존재는 알고 있지만 일꾼이 정확히 무슨 일을 하는지는 잘 알지 못한다. 사실 대부분의 일은 일꾼이 한 일들이다. 남들이 알아주지 않는 일, 예컨대 프린터에 인쇄용지를 채워 넣는다든지, 회의가 끝난 뒤 의자를 정리한다든지, 하다못해 바닥에 떨어진 자그마한 쓰레기를 휴지통에 넣는 그런 일들은 일꾼이 해결한다.


일꾼은 그런 일을 당연한 것으로 아는지, 사람들에게 자랑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랑하는 걸 더 쑥스럽게 여긴다. 마치 우렁각시처럼 일꾼은 음지에서 일하고 양지에서 조용하다. 사람들은 프린터에 용지 부족 에러코드가 뜬 걸 본 지 오래다. 회의실은 언제나 이용하기 전 모습대로 남아있는 줄 알고, 사무실의 모든 집기는 항상 있어야 할 그곳에 있는 줄 안다. 일꾼이 일을 잘할수록 일꾼은 점점 더 알려지지 않는다.


그런 사람만큼 떠벌리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을 말꾼이라 불러보자. 말꾼은 사람들이 자신을 보아주기를 원한다. 사람들이 그가 무슨 일을 하는지 보기를 원하고, 그의 이름을 불러주길 원한다. 말꾼은 적은 노력으로 많이 알려지기를 원해서 가능한 한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하려고 애쓴다. 필요해 보여도 사람들이 별로 주목하지 않겠다 싶은 일은 결코 손대지 않는다. 때로는 자기가 하지 않은 일도 자신의 성과라 말하기를 마다하지 않는다.


문제는 일꾼보다 말꾼이 더 알려진다는 점이다. 말꾼에게는 실제로 일을 하는 시간보다 그 일을 했음을 알리는 시간이 더 길어서, 사람들은 말꾼이 열심히 일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실상을 들여다보면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은데도, 생각이 짧은 몇몇 사람들은 일꾼에게 말꾼처럼 일을 열심히 해보라고 타박하기도 한다. 물론 사람들이 아주 모르는 건 아니다. 말꾼이 일하기보다 떠벌리기를 좋아한다는 건 누구라도 알 수 있는 일이다. 그래서 말꾼은 종종 사람들의 미움을 사기도 한다. 하지만 ‘떠벌리는 것도 능력’이라 말하는 사람 앞에서 말꾼은 능력자가 된다. ‘일은 그렇게 열심히 하면서 알리지도 못하는 무능력자’, 일꾼에게는 박한 평가가 주어진다.


아무리 일꾼이 비밀리에 일한다고 해도, 일꾼의 기여를 본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일꾼이 알려지기를 원한다. 우리가 이렇게 편하게 지낼 수 있는 이유는 일꾼이 일을 잘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어 한다. 어쩌다 말꾼이 일꾼의 성과를 가로채기라도 한다면, 일꾼이 어떻게 일해왔는지 아는 사람들은 분노하기 시작한다. 내가 본 것이 부정당했다는 느낌, 내가 본 광경을 다른 이에게 전해야 한다는 강렬한 의무감, 그걸 사람들에게 알리지 못한다면 나도 그런 대우를 받겠다는 불안감이 그들을 분노하게 한다.


정작 일꾼은 천하태평이다. 일하는 것만큼 알려지는 게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긴 아는데, 굳이 그렇게까지 해야 하냐는 입장이다. 그럴 시간에 차라리 일을 하나 더 해내는 게 모두에게 낫지 않느냐고 일꾼은 말한다. “만약 모두가 말하는 데 진을 뺀다면, 우리는 지금처럼 살 수 없을 거야. 난 언제나 이렇게 해왔고, 금세 말꾼으로 변해버릴 요량이었다면 시작도 하지 않았을 거야. 내가 한 일이 사람들에게 알려지는 게 그렇게 중요한 일인가? 알려지지 않아도 내 할 일을 하는 게 더 좋은 일 아닌가? 그게 더 좋은 세상이지 않아?” 틀린 말은 아니다.


어느 날 말꾼이 대표에게 말한다. 나는 일꾼이 업무시간에 무슨 일을 하는지 모르겠다고. 오히려 일꾼은 우리 일에 방해가 될 뿐이다, 우리는 좀 더 적극적인 사람들이 필요하다, 일꾼이 없었다면 아마 더 큰 성과가 났을 것이다, 자신을 더 좋은 곳으로 보내주든지, 일꾼을 자르든지 알아서 하시라, 내가 지금까지 이곳에 얼마나 기여해왔는지 알고 있지 않느냐… 운운하며 말꾼은 호소한다. 양자택일의 순간이다. 대표는 고민한다. 유능한 말꾼과 조용한 일꾼 사이에서 누굴 택할 것이냐!


얼마 안 가 소문이 돌기 시작한다. 말꾼은 승진이 보장된 부서로 가고 아마도 일꾼은 진급이 누락될 것이라는 소문. 사람들은 하나같이 말한다. 떠벌리는 것도 능력이었네! 일꾼도 그 소문을 듣는다. 일꾼도 대표처럼 양자택일의 순간에 놓인다. 나를 알아주는 다른 곳으로 떠날 것이냐, 유능해 보이는 말꾼으로 변할 것이냐!


직장인의 철학 ─ 왜 일한 건 티 내야 할까

1화 일꾼과 말꾼 (방금 읽은 글)

2화 직장을 다니는 철학자들에게

3화 드러난 것이 있는 것이다

4화 우리가 사는 세계

5화 사내정치를 위한 변명

6화 모든 인간은 어느 정도 정치인이다

7화 보이지 않아 사라지는 것들

8화 가장 어두운 범죄

9화 있어 보이는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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