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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재영 Sep 19. 2022

직장을 다니는 철학자들에게

왜 일한 건 티 내야 할까 2

일꾼과 말꾼 이야기의 핵심은 일하기와 말하기 사이의 긴장이었다. 오해는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 이야기를 읽고 몇몇 사람은 이렇게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맞아. 너무 헌신하면 나만 호구라니까. 누가 알아 주지도 않는데 일만 더 하고 있진 않은지 신경 써야겠어. 받은 만큼만 일하면 되는 거야.’ 어쩌면 혹자는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와… 말꾼 저거는 진짜 낯설지가 않네, 꼭 누구처럼. 저런 사람 어딜 가나 있구나.’ 단지 직장생활에 유용한 정보를 알려준다거나 뒷담화 따위의 단순한 위로에 그칠 것이었다면, 나는 이 글을 시작하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직장을 다니는 철학자를 원한다.                              

폴 세잔, <사과와 오렌지(Pommes et oranges)>, 1889. 캔버스에 유화, 740㎜ x 930㎜. 오르세 박물관.
앙리 마티스, <테이블 위의 사과 그릇>, 1916. 캔버스에 유화, 1149㎜ x 895㎜. 크라이슬러 미술관.


직장을 다니는 철학자는 바로 우리들이다. 먹고사는 데 바쁘지만 생각하기를 그치지 않는 사람들, 직장인이지만 철학자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이 바로 우리들이다. 어쩌면 우리는 우리가 철학자인지 알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삶이 너무 바빠서, 혹은 철학자가 어떤 사람인지 몰라서.


철학자의 첫 번째 작업은 경계를 긋는 일이다. 빛과 어둠 사이에, 안과 바깥 사이에, 이것과 저것 사이에 경계를 그어야 세상은 명확해진다. 하다못해 세상을 바라볼 때에도 우리는 끊임없이 경계를 구분한다. 사과 그림을 보자. 사과를 상징하는 색과 접시를 상징하는 색 사이에는 선이 그어져 있다. 그 선이 강렬한 검은색이든, 알게 모르게 그어진 희미한 선이든 어쨌든 선이 그어져 있다. 실제 사과에는 아무 선도 없다는 사실을 우리 모두 다 안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모종의 선이 있는 듯이 여긴다. 오히려 두꺼운 검은 선이 그어져 있어도 아무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다. 물체와 배경 사이가 명료하게 나뉠수록 우리는 안도한다. 그것과 그것 아닌 것을 나누는 경계. 그 경계가 흐려졌을 때 우리는 눈이 나빠졌다거나 정신이 흐려졌다고 느낀다. 경계가 또렷할수록 우리는 제정신이다. 그러한 것과 그러하지 않은 것 사이에 경계를 그어야 마침내 우리는 그러한 것을 명료하게 알게 되는 것이다.


경계를 그은 뒤 두 번째 작업은 따져보는 것이다. 왜 이 경계가 이곳에 있어야만 하는지 ‘내가 나에게’ 스스로 캐물으면 ‘내가 나에게’ 스스로 답하며 나름대로 이유를 찾게 된다. 세상의 의미는 바로 이 따져 묻기에서 드러난다. 따져 묻기 위해서는 경계를 그어야 한다. 따져 묻기는 경계를 명확하게 한다. 따져 묻기와 경계 짓기는 끝없이 순환한다. 아무리 경계를 잘 그은 것 같아 보여도 따져 물으면 언젠가 결국 그 경계가 모호했음을 알게 된다. 우리는 인간이기에 실수할 수밖에 없고, 세상은 계속해서 바뀌기 때문이다. 만약 경계를 잘못 그었다면 다시 어디에 그어야 할지 고민해본다. 그 과정에서 경계는 무한히 요동친다.


마지막 작업은 경계를 넘어서는 것이다. 내가 지금 그은 경계 A는 이미 커다란 경계 B 안에 놓여 있다. 그 경계 B 안에는 내게 보이는 것들, 내가 설명할 수 있는 것들, 이해할 수 있는 것들만 모여있다. 나는 경계 B 바깥에 있는 것들을 알 수 없었으므로, 그곳이 있는 줄도 몰랐거나 알더라도 외면해왔다. 이 작은 경계 A를 긋다 보니 사실 더 큰 경계 B가 더욱 중요했음을 알 때가 있다. 그리고 그 경계 B를 아주 조금, 바깥으로 옮겨보는 것이다. 경계 B를 전체든 지평이든 세계든 무엇으로든 일컬어도 좋을 것이다. 철학자의 마지막 작업은 세계를 확장하는 것이다. 세계를 확장하기 위해서는 경계를 넘어야 한다. 무엇보다 경계를 명료히 그어야만 경계를 넘을 수 있다. 불명확한 경계는 누구도 넘을 수 없기 때문이다.


직장인이면서 동시에 철학자인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러므로 경계를 긋는 것이다. 철학 전문가가 아니어서 멋들어진 말로 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괜찮다. 내키는 대로 이것과 저것을 나눠보는 거다. 그리고 나름의 이유를 대보자. 이것은 왜 저것이 아니고, 저것은 왜 이것이 될 수 없는지를 짚어보자. 내가 할 수 있는 한 가장 명료하게 경계를 그어본다. 물론 시간이 지나면 내가 그은 경계가 여전히 모호했음을 알게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계속해서 경계를 긋는 그 작업 자체가 우리를 철학자로 만든다. 오히려 과거의 내가 그은 경계가 어설프게 보일수록 좋다. 그만큼 나의 세계가 확장되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직장을 다니는 철학자는 끊임없이 경계 짓는다. 언젠가 나의 경계 짓기가 아주 우스워 보이기를 기대하면서, 나의 세계가 한 걸음 더 나아가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전문적인 철학자는 인류 지식의 최선봉에서 이렇게 경계를 그어가는 사람이다. 그래서 직장인은 철학자의 작업을 쉽게 이해하지 못한다. 철학자의 언어는 직장인에게 일종의 외국어다. 철학자의 경계 짓기는 직장인의 밥벌이와 아무런 상관이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철학은 직장인에게 쓸모없다. 그러나 어떤 직장인은 갈증을 느낀다. 그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일들, 주로 직장에서 벌어진 일들을 해석하고 싶은데 직장인에게는 그러한 사건을 풀어낼 만한 언어가 없다. 그래서 그런지 대부분의 직장인은 이해하기를 포기하고 이익만을 추구한다. 쓸모가 없으면 시간을 투자하지 않는다. 쓸모없는 것들에 시간을 낭비하는 행위 자체를 경멸하는 사람들도 더러 보인다. 그들에게 철학이란 앞에 개똥이란 말이 붙어야 그나마 이해해줄 수 있는 일이 된다.


그럼에도 직장을 다니는 철학자는 있다. 기껏해야 직장의 언어로 비유를 하는 게 전부지만 꽤나 그럴듯하게 들리기도 한다. 예를 들면 복식부기의 원리를 인용하면서 "부채도 자산의 하나이므로 인생은 위험을 무릅써야 성장하는 법"이라고 말하는 회계담당자라거나, "영업에는 내부 영업도 있으니 일에 매진하는 만큼 가족에게 잘해야 한다"라고 말하는 영업맨이 있다. 이런 우리들은 직장을 다니는 철학자가 되기에 충분하다. 자기 나름대로 어떻게든 경계를 짓고 있다는 것, 철학자의 세 가지 작업 중에 적어도 첫 번째 작업은 이미 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우리는 철학자의 싹을 품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러면 자연히 쓸모보다 의미를 추구하게 된다. 의미를 추구하는 직장인, 즉 직장을 다니는 철학자는 바로 그때 직장인의 경계를 넘어선다. 당장의 쓸모를 위해 더 이상 의미를 추구하지 않는 사람들과 달라지기 때문이다.


의미를 추구하는  언제나 쓸모없는 일인 것만은 아니다. 의미를 추구한 결과 쓸모를 발견할 때가 종종 있기 때문이다. 특히 일상적인 문제에서 출발할  의미와 쓸모는 함께 드러난다. 철학의 발원지 고대 그리스에서 사람들이 논했던 대부분의 문제는 일상생활에서 발견됐다. 아버지의 잘못을 눈감아주어야만 예의 바른 아들일까? 사람들이 듣기 싫어한다고 바른말을 해서는  되는 걸까? 억울하게 투옥됐다면 탈옥해서는  되는 걸까? 사람들은  죽음을 두려워하는 걸까? 받은 대로 갚아주는  올바른 일일까? 법은 누가 만드는 걸까? 일상의 삶에서 발견한 문제에서 출발해 경계를 짓고, 따져 묻고, 경계를 넘어서 다시 일상생활로 돌아오면 우리의 이전과는 달라져 있을 것이다. 이전의 관점으로는 설명되지 않던 것을 설명해보려 시도하다 보면 언젠가는 설명할  있게 된다.  문제는 언제나 나와 관련되어 있다.


왜 일한 건 티 내야 할까? 묵묵히 일하는 사람이 인정받는 세상은 영영 오지 않는 것일까? 일하기보다 말하기에 열중하는 건 나쁜 일인가? 일하기와 말하기는 동시에 추구할 수는 없는가? 지금부터 일하기와 말하기 사이의 긴장이 왜 일어나는지, 그리고 그게 우리와 무슨 상관인지 차근차근 짚어보자.


직장인의 철학 ─ 왜 일한 건 티 내야 할까

1화 일꾼과 말꾼

2화 직장을 다니는 철학자들에게 (방금 읽은 글)

3화 드러난 것이 있는 것이다

4화 우리가 사는 세계

5화 사내정치를 위한 변명

6화 모든 인간은 어느 정도 정치인이다

7화 보이지 않아 사라지는 것들

8화 가장 어두운 범죄

9화 있어 보이는 비밀

이전 01화 일꾼과 말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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