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히는 건 행운이지만 글 쓰는 건 행복이다
지난 이틀 꿈속에서 지냈다. 우연히 신문에 내 글이 실렸다. 내가 모르는 사람이 내 글을 읽고 내 글이 담고 있는 생각, 내 글이 가진 색깔에 대해 이야기했다. 어떤 사람들은 내 글을 가지고 세상을 봤다. 어떤 사람들은 내 글이 세상을 잘못 보고 있다고 말했다. 사람들이 읽은 건 신문에 실린 짧은 글 한 편이었겠지만, 내가 느끼기에 그들이 읽고 있는 것은 단지 글이 아니라 나 그 자체였다.
내공이 부족해서 그런지 나는 아직도 '글아일체'다. 다른 사람에게 글을 보여줄 때에는 벌거벗은 느낌으로 눈치를 살핀다. 혹시라도 내 글이 외면받을까 두렵기도 하다. 신문에 실리고 나니 어떤 사람이 어떻게 읽을지 몰라 기대도 되고 걱정도 됐다. 최대한 많은 사람이 읽었으면 좋겠다고도 생각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읽었는지, 댓글은 몇 개나 달렸을지 한 백 번은 본 것 같다. 아직도 글 한 편을 새로 써서 사람들에게 공개할 때에는 여자친구를 처음 만날 때처럼 설렌다.
이런 느낌은 '유아론적 인생관' 때문에 시작했다고 생각한다. 모든 사람은 '나'라는 섬에 갇혀있다. 다른 사람과 연락하려면 '감각'이라는 연락선만 이용해야 한다. 내가 내 섬 안에서 무슨 짓을 하든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걸 '자유'라고 부른다. 연락선을 이용할 때에는 그 배가 향하는 섬과 섬 주인도 고려해야 한다. 거기에서 '의무'가 나온다.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연락선이 뜸해진다. '노화'가 찾아오는 거다. 그러다 연락선이 '뚝'하고 아예 끊어져버릴 때 나는 영원히 혼자가 된다. 그걸 '죽음'이라고 부른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 글쎄, 남기고 싶어서 남기는 게 아니라 남은 사람들이 자꾸 찾기 때문에 남은 거겠지. 호랑이가 죽어도 찾는 사람이 없으면 가죽을 남길 수 없다. 내가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에게는 찾을 만한 내 이름이 없다. 나를 찾지 않는다는 건 내 섬으로 찾아오는 연락선이 끊어지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그래서 나는 이름을 남기고 싶다. 사람들이 나를 찾았으면 좋겠다. 사람들이 나를 찾을수록 나는 더욱 강하게 내 존재를 느낀다. 그래서 나는 글을 쓴다.
많은 사람들이 내 글을 읽는 건 행운이다. 그런데 글을 쓰면서 나를 표현하는 건 행복이다. 이제는 글을 쓰고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일이 클로버 밭에 뛰어드는 일 같다는 생각도 든다. 네잎클로버를 언뜻 발견하고 행운이다 생각해 뛰어들고 보니 주변에 세잎클로버가 가득하다. 세잎클로버 꽃말은 행복이다.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는 행운에 매몰되어 나를 표현하는 행복을 잊지 않고 싶다. 쓰고 싶은 글을 꾸준히 쓰면서 나를 드러내다 보면 언젠가는 나의 섬에 찾아올 사람이 많으리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