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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재영 Jul 23. 2016

금수저론에서 금수(禽獸)론으로

지금, 눈물나게 사랑이 필요한 시대

  요즘 금수저론은 한물갔다. 이제는 금수(禽獸)론이 대세다. 자본소득과 노동소득으로 사람을 나누더니 이제는 권력으로 사람을 나눈다. 금수저를 물어도 권력이 없으면 그저 개, 돼지로 보이나 보다. 내 밥은 내 손으로 수저 없이 먹겠다고 금수저론을 물리치던 나도 금수론은 어떻게 못 하겠다. 화는 났지만 이유를 몰랐으니까.




  오랜만에 동갑내기 친척이 놀러 왔다. 새벽까지 술잔을 기울이고 사우나에 갔다. 뜨신 물에 몸을 담그면서 서로 살아온 이야기를 나눴다. 2년 전만 해도 그 애는 취미 반 꿈 반으로 복싱을 했었다. 짧은 수련에도 국가대표 선발대회까지 출전할 정도로 열심이었다. 예선에서 벽을 느끼고 그만두긴 했지만, 구역질까지 해가며 죽기 살기로 했다고 한다. 그때 그 예선전에서는 하도 두드려 맞아 턱이 나갔었다.


  내가 싸움을 싫어하는 이유는 '맞으면 아파서'였다. 맞다가 턱이 나가다니.. 끔찍해서 엄두도 안 난다. 부러운 놀라움으로 이렇게 말했다.


  "그래도 싸움 잘 해 좋겠다, 어디 가서 누가 건드려도 자신 있잖아."


  "야, 아냐. 운동 배우니까 무서워서 못 싸워."


  그래? 하며 얻어맞는 게 무서웠나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란다. 오랜 동네 친구가 복싱을 배우고 싶다 해서 한번 스파링을 같이 뛰었다. 뻔히 보이는 주먹을 슬슬 피해 가며 턱에 한 방, 갈비에 한 방 먹였다. '퍽퍽'은 아니고 '툭툭' 친 정도. 나름 맷집 좋은 놈이라고 생각했는데 친구는 일주일 내내 갈비를 부여잡고 다녔단다. 당황하고 미안해서 어쩔 줄을 몰랐다. 그때부터 싸움이 무서운 줄 알았다.




  그 이야기를 듣고 나니 '대중은 개, 돼지'라던 사람이 생각났다. 하루가 멀다 하고 신문이니 뉴스니 등장하는 '권력형 비리'도 생각났다. 권력자는 자기가 갖고 있는 힘을 신중하게 행사해야 한다. 신중함은 자기 힘을 무서워하는 데에서 시작한다. 무서움은 그 힘이 얼마나 세냐 약하냐로 결정되지 않는다. 누군가의 힘에 당해 본 사람이 무서움을 아는 것도 아니다. 사랑할 줄 아는 사람만 무서워할 수 있다. 자기가 아끼고 좋아하는 대상이 자기 힘에 다치게 될까 하는 마음에서 무서움이 잉태되기 때문이다.


  이제 이유를 알았다. 문제는 사랑이다. 사랑이 없는 사람은 자기 힘을 무서워하지 않는다. 금수론을 주창한 그 공무원은 우리들을 사랑하지 않았다. 친구 회삿돈으로 여행까지 다녀온 검사는 한 발 더 나아가, 사랑이 없음을 은밀하게 숨기고, 온몸으로 ‘너희는 개, 돼지야’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보니 사랑이 없다고 기자들에게 고백해버린 그 공무원이 차라리 순수하다.




  우리는 지금 사랑이 필요한 시대를 살고 있다, 그 어떤 때보다 절실하게. 사랑은 경쟁에서 싹트지 않는다.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내 친척의 턱을 날려버린 그 선수는 싸움이 무섭다고 생각했을까? 흠씬 맞고 예선에서 낙오해버린 상대를 보며 우월감을 느꼈을 게다. 네가 쓰러지지 않으면 내가 낙오하는 상황에서는 사랑이 나올래야 나올 수가 없다.


  학교를 보아도, 사회를 보아도 온통 경쟁뿐이다. 수능등급제와 비정규직 제도는 복싱경기와 다를 바 없다. 내 친척이 사랑하는 오랜 동네 친구는 경쟁으로 얻은 게 아니다. 같이 웃고 울던 시간이 동네 친구를 선물했을 뿐이다. 동네 친구를 아끼는 마음은 무서움을 알려준다. 금수가 되지 않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건, 경쟁이 아니라 사랑을 위한 웃음과 눈물이다.



이 글은 2016년 7월 30일자 중앙일보 대학생 칼럼에 게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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