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와 감각으로 페미니즘을 풀다
페미니즘이 대세다. 논문 사이트에 들어가면 월간 열람수 상위 20개 논문 중에서 절반 가까운 논문이 여성과 페미니즘에 대한 논문이다. 1998년 2월 28일 여성특별위원회가 신설되고 1999년 2월 8일 「남녀차별금지및구제에관한법률」이 제정된 이래로 대한민국은 여성인권신장을 위해 명목적으로 힘써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페미니즘이 다시 주목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수년전부터 일베는 유교 전통을 지닌 우리 사회에 뿌리 깊게 자리 잡은 남존여비사상을 추종하는 행보를 보였다. 비교적 최근에 등장한 메갈리아는 미러링이라는 행동양식으로 일베와 남존여비사상을 비난해왔다. 양성평등이라는 관점 안에서만 본다면 일베와 메갈리아는 양극단에서 대립하는 집단이다. 여성만 '골라 죽인' 강남역 살인사건을 계기로 여성은 본격적으로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페미니즘은 양성평등을 목적으로 하는 여성인권신장 운동이다. 여태까지 여성은 남성에게 사회적으로 억압되어 있었다는 전제를 기초로 두고 출발하는 논의다.
“평등한 것을 평등하게 대하고, 불평등한 것을 불평등하게 대하는" 사회가 정말 평등한 사회라는 말이 있다. 사람끼리는 언어로 의사소통할 수 있으니 언어로 보면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 그러나 나의 느낌과 너의 느낌은 엄연히 다르니 감각으로 보면 모든 사람이 불평등하다. 많은 나라가 채택한 '민주주의와 시장주의' 조합은 ‘언어와 감각'의 조합과 일맥상통한다. 민주주의는 의사를 표현할 수 있는 모든 사람을 동등하게 보고, 시장주의는 각자의 배고픔을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고 본다. 민주주의는 평등을 위한 생각이고, 시장주의는 불평등을 위한 생각이다.
페미니즘이 주목하는 문제는 사회가 '평등한 것을 불평등하게 대한다'는 사실이다. 민주주의로 대해야 할 것을 시장주의로 대하는 경우다. 여성의 능력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여성의 참정권을 제한한 역사는 평등한 사람을 불평등한 계급으로 대한 첫 번째 사례다. 삼일한 등의 용어로 여성을 모욕하는 일베도 평등한 사람을 불평등한 계급으로 대한다고 볼 수 있다. 이외에도 신체적 특징에만 주목해 성을 상품으로 만드는 행위 역시 평등한 사람을 불평등한 상품으로 대하는 행위라고 해석할 수 있다.
반면 페미니즘은 종종 '불평등한 것을 평등하게 대하자’는 주장을 덧붙여 설득력을 잃는다. 시장주의로 대해야 할 것을 민주주의로 대하는 경우다. 여성고용과 출산 문제를 예로 들 수 있다. 기업은 이익을 내지 못하면 생존하지 못하는 집단이다. 그래서 기업은 한 사회에서 불평등의 극단에 서있다. 기업의 시장만능주의가 옳다고 주장하는 것은 옳지 않지만, 기업에게 민주주의를 강요하는 것도 평등하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기업에게 고용 성비를 맞추라고 강요하는 것은 옳다고 할 수 없다.
여성고용 문제와 더불어 대두되는 문제는 출산 문제다. 자신의 감각과 다른 사람의 감각은 결코 비교할 수 없다. 그러나 어떤 페미니즘은 종종 국방의 의무를 이행하는 고통과 아이를 출산하는 고통을 비교하는 잘못을 저지르기도 한다. 감각이 지닌 표현할 수 없는 특성을 감각질이라 부른다. 감각질에 대한 논의는 본질적인 공감을 불러일으키지 못하고 갈등만 불러일으킨다. 토론 실습 논제로 끊임없이 군 가산점 문제가 채택되는 이유다. 불평등한 것을 평등하게 대하자는 논의는 대체로 감각질과 결부된다.
언어에는 표현적 기능과 지시적 기능이 있다. ‘남성적’이라거나 ‘여성적’이라는 성별적 표현이 단순히 표현에만 그친다면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본다. “그것이 여성적이다”라는 표현은 ‘나는 평소에 이러이러한 것이 여성적이라고 생각해왔는데 때마침 그게 이러이러하니 여성적이라고 하고 싶어’라는 의미를 지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치구호나 학교교육과 같이 지시적인 성격이 강한 언어를 사용하는 환경에서는 성별적 표현을 피해야 한다. ‘너는 이러이러해야 한다’라고 주장하면서 평등한 사람을 불평등한 성별로 대하기 때문이다.
“사람을 수단으로 대하지 말고 목적으로 대하라”는 말에 전적으로 동의하지는 않는다. 사람을 수단으로 대해도 될 때가 있고, 결코 수단으로 대해서는 안 될 때가 있기 때문이다. 감각과 관련된 문제, 예를 들면 배고픔과 같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나는 나 아닌 모든 사람을 수단으로 대한다. 그러나 언어와 관련된 문제, 예를 들면 사랑이나 정의 같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나는 어떤 사람도 수단으로 대하지 않고 오로지 목적으로만 대한다.
'맞느냐'고 묻는 일과 '옳으냐'고 묻는 일은 전혀 다르다. 전자는 '사실'에 대해 묻는 일이고 후자는 '가치'에 대해 묻는 일이다. 모든 사람이 서로 다르다는 생각은 사실이지만, 그 사실을 근거로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을 억압해도 된다는 생각은 옳지 않다. 남의 중풍보다 내 고뿔이 아픈 게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남의 중풍을 무시하는 행동은 옳지 않다. 인간을 유한한 존재로 만드는 감각질을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은 언어다.
언어가 사라진 사회는 감각에 매몰될 수밖에 없다. 소녀들이 자신을 상품으로 대해달라는 노래를 부르고 그 소녀들을 보고 즐기는 사회를 보면서 걱정한 적이 있다. 페미니즘에 대한 논의가 사람들에게 새로운 생각과 새로운 언어를 선물해주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