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아버님의 빈소를 다녀오며
반가운 연락이 왔다. 힘든 시간을 함께 보냈던 친구였다. 마지막 연락은 지난 여름이었다. 김치찌개에 소주를 마시며 삶을 이야기했었다. 삶은 고민과 고통으로 가득했지만 우리는 즐거웠다. 우리는 즐겁게 고민했다. 우리는 웃으며 고통에 올라탔다. 나와 너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의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즐거운 삶이다. 옅은 미소로 문자를 확인했다.
‘소천(召天)’. 부고였다. 세상의 소음이 일시에 멎었다. 마음 안에 검게 깊은 구멍이 뚫렸다. 부고는 네 문장으로 간결하게 쓰였다. 네 문장을 한참이나 읽었다. 아버님의 이름 앞에 ‘고(故)’가 붙었다. 부고는 차분히 장례 일정을 알렸다. 빈소, 입관, 발인 따위의 단어는 형식적이었다. 짤막한 부고에는 무한한 거리가 담겼다. 그 거리를 가늠할 수 없었다. 전화기 화면이 너무 좁았다. 한 글자씩 추락하는 동안 뒷덜미가 곤두섰다.
‘아들 올림’으로 끝내는 그 글에서, 떨리는 손을 읽었다. 젖은 종이와 번진 잉크를 읽었다. 형식적인 단어는 마음을 가리지 못했다. 그는 전화기에 가족사진을 띄워 두고 있었다. 네 가족은 웃고 있었다. 웃는 만큼 울고 있을 게다. 차가운 활자 안에서 그는 흐느끼고 있었다. 무어라 답장을 해야 할는지 알 수 없었다. 감정을 가리고 사실을 보일 언어가 그에게는 있었다. 그러나 내게는 아무것도 없었다. 흐느낄 수 없었고 감정을 가릴 수도 없었다. “미안하다.” 이 말뿐이었다.
빈소로 가는 길은 추웠다. 떨어진 은행잎이 노랗게 길을 덮었다. 낙엽은 바스러지지 않았다. 젖은 잎을 밟으며 마른 입술을 씹었다. 걷는 내내 죽음을 생각했다. 문득 피 맛이 났다. 언젠가 다가올 내 아버지의 죽음을 떠올렸다. 그렇게 나는 이기적인 사람이다. 다른 이의 죽음을 생각하면서 나의 생명을 느낀다. 아버님의 죽음은 어디까지나 그의 슬픔이었다. 나는 온전히 그에게 공감할 수 없었다. 네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이 가슴에 날아와 박혔다. 무한한 거리는 활자 밖에 있었다.
어린 상주는 서툴렀다. 검은 옷은 그에게 어울리지 않았다. 상주(喪主)라는 글자가 박힌 검은 리본은 그와 어울리지 않았다. 죽음은 우리에게 어울리지 않는다. 죽는 이에게도 죽음을 보는 이에게도 죽음은 누구에게나 낯선 일이지만, 죽음이 어울리는 나이가 언제인지는 알 수 없었다. 서투른 상주는 내게 인사하고 문상을 지도했다. 나는 어설프게 헌화하고 어색하게 묵념했다. 묵념이 끝나고 우리는 끌어안았다. 국화꽃 앞에서 우리에게 어울리는 유일한 행위였다.
“망극한 일을 당했으니 비통하겠구나.” 빈소에 가는 동안 외웠다. ‘미안하다’ 말고는 도저히 떠오르는 말이 없어 인터넷을 뒤졌다. 그러나 그와 눈을 맞추자 기억에서 모두 흩어졌다. “고생이 많다.” 전혀 다른 말이 울음 대신 튀어나왔다. 그는 말이 없었다.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날 하루동안 벌었던 돈을 부조에 넣는 일과 초상집 밥을 얻어먹는 일뿐이었다.
상주는 홀로 온 상객과 밥상을 마주했다. 상주는 세 끼니째 먹어보니 고깃국과 편육이 맛있다고 했다. 상주는 수시로 찾아오는 상객을 맞느라 한 그릇을 채 비우지 못했다. 어린 상주는 바쁘게 움직였다. 문상의 절차는 부고의 형식과 마찬가지로 상주의 슬픔을 가렸다. “바쁘니 아버지 생각이 안 나.” 어린 상주를 남겨두고, 홀로 온 상객은 삶으로 다시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