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최재영 Nov 01. 2016

KTX 대신 갓길운전

일수벌금제 도입이 필요하다

   윤리학을 전공하신 철학과 교수님의 강연을 듣고 있었다.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며 말씀을 시작하셨다. “몇 년 전 추석 귀성길이었어요.” 명절에 고향을 가려면 어느 길이나 막힌다. 두 세 시간 쯤 귀성행렬에 끼어 도로를 기어가고 계셨다. 그 때 교수님 눈에 들어온 건 귀성행렬을 비웃듯이 갓길을 빠르게 지나가는 고급 승용차 대오였다. 그런데 교수님은 그 대오를 보며, 참으로 이상하게도, 분노할 수 없었다. “그들에게 벌금은, 형벌이 아니라 비용일 테니까요.”

   서울에서 부산까지 KTX 특실을 타고 가면 84,100 원이다. 도로교통법 시행령에는 고속도로에서 갓길을 통행한 승용차에 대해 90,000원을 부과한다. “아마 비행기나 KTX 예매를 못할만큼 급했나봐요.” 교수님의 말씀처럼, 여러번 적발돼 범칙금이 늘더라도, 그들에게는 시간을 대가로 지불하는 추가비용일 뿐이다. 그러니까 어떤 사람들에게 갓길은, 긴급한 상황을 위해 이용해서는 안 되는 길이 아니라, 돈을 지불하면, 긴급한 상황을 위해 이용해도 되는 길인 것이다.

   2013년 10월 16일 중앙일보에 “과속 운전 범칙금이 1억3700만원”이라는 제목으로 기사가 났다. 어떤 핀란드인 사업가가 시속 50km 제한 구간에서 시속 77km 로 달려 웬만한 집값에 버금가는 ‘딱지’를 떼었다는 것이다. 핀란드에서는 제한속도에서 시속 20km 를 넘기면 운전자의 14 일치 소득을 과속 범칙금으로 뗀다. 핀란드에서도 너무 가혹하다는 의견이 있지만, 과속 운전은 사망사고와 연계되므로 엄중히 다루어야 한다는 여론이 우세하다. 핀란드뿐만 아니라 스웨덴, 덴마크, 독일 등 여러 국가에서 특정한 범죄에 대해 급여에 따라 벌금을 부과한다.

   소득에 비례해 벌금을 부과하는 제도를 ‘일수벌금제’라고 부른다. 우리나라에서도 일수벌금제가 논의된 적이 있다. 2011 년, 이명박 전 대통령이 교통위반 범칙금에 일수벌금제를 도입해야 한다고 의견을 제시했었다. 그러나 소득신고가 성실하게 이루어지지 않아 자영업자는 이득을 보고 월급쟁이들만 손해를 본다는 의견에 막혀 무산됐다. 윤리적인 사람을 착한 바보로 보는 우리 사회 분위기를 생각했을 때, 일수벌금제를 즉시 도입하는 건 무리라는 의견에 반박하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일수벌금제는 가장 정의로운 벌금제도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의로운 사회는 각자에게 각자의 것을 주는 사회다”라고 주장했다. 따라서 같은 범죄자에게 같은 형벌을 부과하는 것이 타당하다. 그러나 벌금형의 관점에서는, 같은 형벌이 언제나 같은 액수의 벌금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같은 형벌이란 ‘같은 정도의 고통을 부과하는 것’으로 생각해야 옳다.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금액으로 부과되는 현행 벌금제도는, 고소득자에게 너무나도 가볍다.

   이런 논리라면 징역형도 죄질과 수명에 비례하도록 부과하는 것이 가장 정의롭다. 하지만 사람의 수명은 어림조차도 불가능하기 때문에 ‘수명징역제’라는 개념이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같은 범죄자에게 같은 기간의 감옥살이를 시키는 것은, 정의의 관점에서, 최선이 아니라 차선이다. 반면, 소득은 수명과는 차원이 다르게 인식가능한 조건이므로 일수벌금제가 가능하다. 그렇기 때문에 일수벌금제를 도입하면 징역형과 형평성이 맞지 않다는 반론은 합리적이지 않다.

   물론 전국민의 소득을 완벽히 파악하려면 개인의 양심에 의존해야 하거나, 개인의 자유를 다소 침해해야 한다는 난점이 있지만, 이를 근거로 일수벌금제가 정의롭지 못하다고는 할 수 없다. 성실한 소득 신고는 사회적 합의와 타협으로 얼마든지 해결할 수 있는 문제다. 일수벌금제에 대한 논의는 더 이상 미룰 수 없다. 형벌을 비용으로 생각하는 사람들과는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 수 없기 때문이다.


이 글은 2016년 11월 1일 Lawgic(숭실대학교 법과대학 신문)에 실렸습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꾸미는 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