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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재영 Oct 31. 2016

꾸미는 일

살기 위해 꾸미다

   하루가 저물었다. 집에 돌아오는 길은 어둡다. 주황빛 가로등에 옷은 제 색을 잃었다. 문을 열고 문을 닫는다. 신발을 벗는 일로부터, 나는 다른 사람으로 거듭난다. 바깥 땟물에 절인 겉옷을 벗는다. 겉부터 속으로 가면과 껍데기를 도려낸다. 어떤 이는 화장을 지워내고 진득한 살갗을 드러내겠지. 벌거벗은 몸이 되어 거울 앞에 선다. 나는 무엇 때문에 꾸민 것일까?

   눈두덩이를 간질이는 햇살에 기분 좋게 일어나고 싶건만, 오늘도 귓전을 때리는 소리가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몸 밖에 떠돌던 넋이 채 돌아오기도 전에 무엇을 입어야 하는지 고민했다. 모든 하루는 꾸미는 일에서 시작한다. 의식이 시작되는 순간부터 어떤 사람으로 보여야 하는지부터 고민해야 한다. 어제 꾸민 일은 오늘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 매일 고민하며 꾸미고, 매일 고민하기 위해 벗는다.

   꾸미는 일은 예뻐서 기쁘다. 꾸미고 나면 우선, 내가 나를 보며 예쁘다고 생각하며 기쁘다. 그러나 아직 마음 한 구석이 기쁘지 않다. 그래서 너를 만나면 스스로 삼가며 섣불리 기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예쁘고 싶지만 섣불리 예쁘고 싶지 않은 내 노력을 네가 똑똑히 보았음에도, 네가 나를 보고 예쁘다고 할 때 비로소 온 마음을 다해 기쁨에 젖는다. 꾸미는 일은, 너의 인정에서, 그러니까 ‘예쁘다’는 말에서 완성된다. 꾸미는 일에서 나는 너를 느낀다. 꾸미는 일은 나를 외로움에서 구출한다.

   그러나 꾸미는 일은 보이는 일일 뿐이다. 보이는 일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그만두게 된다. 그래서 보이는 일은 무의미하다. 집을 감싸는 벽 안에서 나는 꾸민 채 잠에 들지 않는다. 가장 수치스러워해야만 하는 나신으로 잠에 든다. 집 안 침대 위에 벌거벗은 채 뒹굴고 있는 몸, 그 몸이 진짜 내 몸이다. 집에 돌아와 옷을 벗고 머리를 헝클으며 편안함을 느끼는 건 진짜 내 몸을 되찾았기 때문이다.

   거울을 보며 나는 네가 되어 나를 본다. 느껴지지 않아 있는 줄 몰랐던 눈곱이 보인다. 입가에 하얗게 마른 침이 보인다. 기름져 눌린 머리가 보이고, 얼굴을 가로지르는 베갯자국이 보인다. 거울을 보기 전에는, 안락한 진짜 내 몸이었다. 그러나 진짜 내 몸은 예쁘지 않다. 네가 볼까 두렵다. 그래서 나는 매일 무의미를 반복한다. 매일 밤 가면과 껍데기를 떼어내며 절망하지만, 매일 아침 가면과 껍데기가 없어 두렵다.

   우습다. 한때는 예쁘다고 생각했던 몸도 유행이 지나면, 꾸미지 않은 것만 못하게, 예쁘지 않다. 예쁘지 않은 건 벌거벗은 몸이나 유행이 지난 몸이나 매한가지다. 오히려 그 시절 예쁘게 생각했다는 스스로가 부끄럽기도 하다. 그런데 너도 예쁘다고 했기 때문에 나는 외롭지 않고 두렵지 않다. 꾸미는 일로 부끄러움은 막지 못하지만 외로움은 막을 수 있다. 죽지 않기 위해 내가 사는 것처럼, 외롭지 않기 위해 나는 꾸민다. 나는 꾸미기 위해 살지 않는다. 살기 위해 꾸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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