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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재영 Dec 01. 2016

어느 날 어떤 법대생이 말했다

이제 그만 내려오라고

   어느 날 어떤 미대생이 말했다. 제발 그림 그려달라는 소리 좀 그만 하라고. 그 말을 듣고 심리학과 학생이 말한다. 애인이랑 싸우고 나한테 물어보지 좀 말라고. 대학에서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으레 이렇게 견뎌내야 한다. 전공이라는 딱지가 붙기 때문이다.


   대학을 입학하면서부터, 나도 같은 경험을 하게 됐다. 어떤 친구는 자기 친구가 폭행시비에 휘말렸는데 어쩌냐고 물어본다. 어떤 친구는 중고 거래를 하다가 사기를 당했는데 어쩌냐고 물어본다. 어떤 친구는 방 주인이 부당하게 방을 빼라는데 어쩌냐고 물어본다. 그러게, 어쩌냐. 이럴 때마다 어떻게 해야 하는지 나도 궁금하다. 이제 막 총칙도 제대로 배우기 전인데 사례문제라니.

   사실 나는 어쭙잖다. 모든 미대생이 사진기가 아니듯이, 모든 심리학도가 점쟁이가 아니듯이, 나는 법전도 아니고, 판사도 아니다. 고백하자면, 나는 법학이 무섭다. 역사 속 걸출한 천재들이 한 마디씩 거들어 만든, 거대한 이성의 구조물이기 때문이다. 법학은 무한한 권위로 내 앞에 우뚝 서 있다. 그 앞에서 나는 한없이 작아진다.

   그러나 명색이 법대생이라 뭐라도 말해야 한다. 수업에서 주워들은 말 몇 마디를 기억해내려고 애를 쓴다. 형법이 어떻고, 민법이 어떻고 하다보면, 혹시라도 교수님이 보실까 무섭다. 뒤늦게 이성이 돌아오면, 전문적인 곳 어딘가에 전화해서 꼭 물어보라고 당부한다. 상담하는 내 모습을 생각하면 우습기도 하다. 그런데 친구는 사뭇 진지하게 경청한다. 변호사라도 만난 듯하다. 법대생이라는 이유로, 주위 사람들에게, 법과 관련된 모든 문제에서, 나는 ‘권위자’가 된다.


   권위는 나의 주장이 아니라 너의 인정에서 출발한다. 권위를 주장하려면 너의 인정에 부응해야 한다. 내게 질문하는 주위 사람들에게 만족스러운 대답을 내놓지 못할 때, 나는 누구에게도 법학을 전공한다고 말할 수 없다. 그래서 나는 모든 질문에 성심성의껏 답변하기 위해 노력한다. “내가 주장하고 싶은 권위에 대한 인정에 부응한다.” 그것은 권위자의 첫째 의무다.

   물론 사람들이 잘못된 권위를 인정해주는 경우도 있다. 모든 미술가가 초상화를 그리는 건 아니다. 모든 심리학자가 심리상담을 하는 것도 아니다. 모든 법대생이 변호사인 것은 아닌데, 어떤 친척은 내게 변호사를 해야 한다고 말씀해 주신다. 그럴 때에는 정중하게 사양한다.“내가 주장하고 싶지 않은 권위에 대한 인정은 사양한다.” 권위자의 둘째 의무다.


   그러나 아무도 인정하지 않은 권위를 주장해서는 안 된다. 특히, 권위자의 의무를 저버린 사람은 권위를 내려놓아야 한다. 아무리 주장해도 진정한 권위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의무를 저버린 권위자에게 사람들은 분노한다. 그래서 권위를 앞세우는 사람은 권위 뒤에 숨고 싶어 한다. 권위 뒤에서 사람들의 분노를 피하려는 것이다. 참 나쁜 사람이다.

   권위를 인정하는 사람들도 조심해야 한다. 권위를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부족한 사람을 함부로 인정해 주어서는 안 된다. 초상화를 전공하지 않는 미대생에게 그림을 그려달라는 건 무리다. 심리상담도 마찬가지다. 권위를 가질 자격이 없는 사람을 인정한다면, 그 사람은 몰래 다른 이에게 부탁해 그림을 그려 오거나, 상담을 받아올 수밖에 없다. 각자에게 각자의 것을 주어야 한다. 잊지 말자.


이 글은 숭실대학교 법과대학 신문 lawgic 12월호에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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