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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재영 Mar 14. 2017

도깨비 나라는 아름답다

2017년 3월 14일, 쉰아홉 번째

그럴 때가 있다. 이유 없이 머릿속에 한 노래가 맴도는. 오늘은 어릴 때 자주 부르던 동요였다. 점심을 먹으면서, 길을 걸으면서 속으로 내내 불렀다.

"이상하고 아름다운 도깨비 나라/ 방망이로 두드리면 무엇이 될까/ 금 나와라와라 뚜-욱딱/ 은 나와라와라 뚜-욱딱."


저녁을 먹으면서 흥얼거리던 때였다. ?, 이상했다. 이상하고 아름답다니. 이상하다면 아름답지 않고, 아름답다면 이상하지 않은 게 세상의 이치 아니던가? 도깨비 나라라서 가능한 세계이겠거니, 했다.

아름다움. 우리는 모두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존재다. 발견한 아름다움을 다른 사람과 공유하는 일은 행복하다. 아름다움에 대한 생각은 시대마다 달랐다.

중세시대에는 신이 곧 아름다움이었다. 추한 인간의 모습을 가리기 위해 신의 언어로 아름다움을 표현하고자 노력했다. 신의 언어는 수학. 완벽한 대칭과 엄격한 비례는 아름다움의 기준이었다. 중세 이후에도 아름다움은 정확함과 다르지 않았다. 손으로 그려 찌그러진 원은 결코 아름다울 수 없다. 콤파스로 정확히 그린 원만이 아름답다는 말에 어울린다.

이상(abnormal)은 정상(normal)의 반대다. 정상은 정확의 동의어다. 정확하지 않은 모든 것은 신과 대척점에 서있다. 그래서 이상하다는 말은 악하다는 의미가 되었다.

멀쩡한 놈이 왜 그래, 라고 외치시던 중학교 선생님의 말씀은 중세 사고방식을 그대로 답습하신 결과다. 너는 정상인이니 내 말에 정확히 따라야 선하고 그 결과로써만 아름다워야 한다. 이런 말씀이다. 정리해볼까. 아름다우려면 정상'이어야 하고' 이상'해서는 안 된다'. 중세의 아름다움은 의무를 진다. 나는 중세 암흑세기만큼 어두웠던 중학교 시절을 보낸 셈이다.

근대 독일철학에 이르러서야 아름다움은 의무로부터 독립했다. 칸트는 인간이성의 한계를 밝히기 위해 세 책을 썼다. <순수이성비판>, <실천이성비판>, <판단력비판>은 각각 진, 선, 미에 대해 쓴 책이다. 진위에 관한 생각은 순수이성이, 선악에 연관된 생각은 실천이성이, 미추에 관한 생각은 판단력이 관여한다는 것이다. 각각의 이성이 어느 토픽까지 다룰 수 있는가. 각 책의 초점이다.

인간의 이성들은 서로 쉬이 간섭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거짓이어도 아름다울 수 있고, 악행도 아름다울 수 있다는 말이다. 정상적인 것들만 아름답다면, 이 세상은 얼마나 추한가. 당장 들과 숲으로만 나가도 멀쩡한 나뭇잎 하나 찾기 어렵다. 대개 벌레가 뚫어놓은 구멍이 있거나, 한 쪽이 덜/더 자라 대칭이 안 맞다. 애초에 '완벽한' 나뭇잎을 찾는 게 의미있는 일인지부터 궁금할 따름이다. 속세는 악으로 뒤덮인 공간이다.

게다가 사람은 단 하나의 의식만을 갖는다. 그러니 제 눈에 보이는 게 전부일 수밖에. 그나마도 스스로 잘못 보고 있는 것을, 보이는 대상이 잘못되었다고 우기는 게 인간이다. 진위를 가리는 사실판단은 모래 위에 쌓은 성이다. 영원한 진리, 영원한 거짓은 어느 누구도 밝힐 수 없다. 분명하지 않은, '누군가의 진리'는 결코 아름다움을 전제하지 않는다.

가치판단도 마찬가지. 칸트가 말한, 뜬구름 잡는 정언명령, "네 의지의 준칙이 언제나 동시에 보편적 입법의 원리가 될 수 있도록 행위하라."가 아니고서는 어느 누구에게도 선악을 가려낼 수 없다. 그러므로, 저건 악해서 추해, 라는 명제는 애초에 성립하지 못한다. 아름다움은 진위와 선악에 독립적이다. 칸트의 주장이다.


이상함은 아름다움을 배척하지 않는다. 이상하고 아름다운 나라가 도깨비 나라뿐이라면, 참으로 암울한 세상에서 살고 있다는 증거다. 19세기, 그러니까, 200년 전 사람이 밝힌 생각이다.

이상하고 아름다운 것은 절대 이상하지 않다. 이상해도 아름답다고 인정받는 세상이 곧 금이고 은이다. 우리 세상도 그랬으면. 금 나와라, 뚝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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