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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재영 Mar 19. 2017

행복, 나, 우리

2017년 3월 19일, 예순한 번째

철학을 공부하는 아들을 둔 탓일까. 요즈음 어머니께서 생각거리를 자주 던져주신다. 어제는 뜬금없이 행복에 대해 물으셨다. 너는 행복을 무어라 설명할래?

강의실 밖에서 듣기에는 너무도 생소한 질문이었다. 플라톤 국가, 아리스토텔레스 니코마코스 윤리학 따위가 떠올랐다. 어설피 아는 것을 꺼내면 설명할 때 애를 먹을까봐 입을 다물었다. 행복이 무엇일까.


예전에도 이런 고민을 한 적이 있다. 철학에 맛을 들인 직후였다. 더듬더듬 데카르트 방법서설을 읽었는데, 꽤나 충격을 받고 유아론에 빠져버렸다. 데카르트는 이 모든 감각이, 우리를 속이려는 신의 속임수가 아닐까, 하고 의문을 제기했다. 타인은 감각으로만 그 존재를 내게 보여주기 때문에, 감각의 불확실성을 조명하니 타인이 존재하는지조차 불확실해졌다. 세상에 확실한 것은 오직(유) 나(아)뿐이었다. 데카르트는, 신이 우리를 속일 정도로 나쁜 존재가 아니다, 라는 말로 엉거주춤 빠져나갔으나 내게는 그런 신념도, 지식도 없었다. 말 그대로 유아론의 늪에 빠져버렸다.

혼자 기억을 되새기고 있는데, 어머니께서 입을 여셨다. 엄마는 사랑받는 일이 행복이라고 생각해. 누가 강연하면서 그러더라고, 아이가 스스로 불행하다 여기는 건 부모가 사랑을 주지 않기 때문이라고. 아이가 엇나가는 것도 부모에게서 사랑을 받고 싶은 마음에 그런 거라고. 누군가 내게 힘이 되어주면 그게 행복인 거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부모님께는 죄송한 소리지만, 데카르트에 따르면 부모님이라는 존재도 신이 나를 속이기 위한 도구일지도 몰라요, 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꾹 참고 입을 열었다. 에이, 그러면 행복은 너무 타인의존적인 걸요. 행복은 스스로 찾아야 하는 것 아니에요?


한창 유아론에 심취해 있었을 때, 나는 이런 기준을 만들었다. 행복한 삶은 후회하지 않는 삶이다. 행복의 기준은 타인이 아니라 과거의 나다. 내 삶에 모든 타인이 사라져도 나만 후회하지 않는다면 행복이다. 유아론자에게 허락된 유일한 행복이다.

그대로 살아왔다. 먼훗날 후회를 하게 될까봐 철학을 공부하기로 마음 먹었다. 지금 만나는 여자친구도 그렇다. 당장 사귀자고 말하지 않는다면 나중에 후회하게 될까봐 저지른 고백이었다. 행복하냐고 물으신다면 행복하다.

그런데 아직 잘 모르겠다. 미래의 나는 지금과 다른 사람이어서 변덕을 부릴지도 모른다. 후회하지 않는 삶은 불가능에 가깝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불행을 매일 안고 사는 셈이다(물론 철학이나 여자친구를 나중에 기필코 후회하리라는 말은 전혀 아니다).

나는 언제나 같은 사람이 아니다. 유아론적 행복을 추구하는 사람이 간과한 사실이다. 나는 매순간 변한다. 언제든 후회할 수 있다. 어쩌면 후회해야 마땅하다. 내가 변화하고 있다는, 성장한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이런 사실을 눈여겨 본 사람이 흄이었다. 흄의 회의론은 칸트를 학문적으로 자극했고, 칸트는 그 영감으로 이것저것 썼다.

칸트를 배우고 나서야 유아론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칸트 이전까지 유아론을 해결하는 길은 신을 끌어들이는 방법뿐이었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나는 신을 개입시키지 않고도 타인의 존재를 증명하고 싶었다. 그 때 칸트가 나타났다. 그거 절대 못해. 타인은 네가 알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 믿어야 하는 존재란다. 타인이 있다는 사실을 믿어야 타인이 내게 주는 감각이 정당성을 얻는다고.

굳은 믿음 없이는 타인도 없다. 타인의존적 생각은 유아론보다 한 발짝 앞서 있다. 이성의 한계를 이해하고 수용하는 태도이기 때문이다. 내가 모른다는 사실을 아는 것, 소크라테스가 말한 지혜다. 유아론자는 가로등 조명에 자꾸만 뛰어드는 나방이다. 태양이 아닌 줄을 모르고 자꾸만 뛰어들기 때문이다. 어머니께서 말씀하신 행복이 내가 고민했던 행복보다 더 고차원적인 행복이었다.


그렇다면 둘 중에 어느 것을 택해야 하나? 나는 두 행복 모두 틀리지 않았다고 본다. 행복에는 '나의 행복'과 '우리의 행복'이 있고, 이 둘은 상호보완적이다. 먼저, 나의 행복은 너 없이도 누릴 수 있는 행복이다. 후회하지 않을 삶을 추구하는, 유아론적 행복이 여기 속한다. 우리의 행복은 네가 있어야만 느껴지는 행복이다. 네가 내 존재에 공감하고 나를 너처럼 여길 때 나타난다.

행복을 위해서는 후회 없는 삶을 사는 게 급선무다. 그런데 후회한다고 곧바로 불행인 것은 아니다. 후회하고 있을 때에도 보듬어주는 사람이 있다면 행복이다. 나조차도 내 존재를 의심하게 될 때, 내 존재를 굳게 믿고 있음을 주장해주는 사람이 있다면 행복이다.

우리의 사랑은, 나의 후회가 휩쓸고 간 마음을 보듬는, 최후의 행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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