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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재영 Mar 16. 2017

까치는 기계처럼 울지 않는다

2017년 3월 16일, 예순 번째

어쩌면 본능인 것 같다.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놓이면 우리는 어떻게든 파악하려 한다. 오늘 새벽이 그랬다.

온갖 새들이 우는 소리에 눈보다 귀가 더 먼저 뜨였다. 깍깍, 짹짹짹짹, 욱꾹. 밖에 나가 들어보았더니 까치 소리가 가장 컸고, 참새는 수가 많았던 것 같은데, 이름 모를 어떤 새는 은근하게 지저귀고 있었다. 갈색에 날렵한 몸이었는데, 아마 산비둘기였을까.

내 눈이 오래 머무른 새는 까치였다. 두 마리가 각각 다른 나무에 앉아 지저귀고 있었다. 의미 없이 소리를 내는 것 같은데, 참으로 신기하게도, 어떤 신호를 주고받았다. 여유롭게 깍깍, 하고 울면 다른 까치도 깍깍 울었다. 그렇게 몇 번을 울다 마지막에는, 깍! 하고 울더니 날아가버렸다. 거의 동시에 다른 까치도 깍! 하고 앞서간 새 옆을 따랐다. 깍! 보다는 가자! 로 들렸다. 신기했다.

언어는 사람의 전유물일까. 개미는 꼬리샘에서 나오는 페로몬, 그러니까 냄새로 길을 만든다. 뒤따라오는 개미들은 그 길을 따라간다. 벌이 '8'자 춤을 추어 의사소통한다는 건 익히 알려져있다. 고래는 가청주파수를 넘는 높은 소리로 멀리까지 자기 생각을 전달한다. 심지어는 나무도 독특한 향으로 의사소통한다는 학설이 있다.

우리는 흔히 언어가 이성의 증거라고 한다. 사람은 머리가 좋고 언어를 쓰니까 동물과는 다르다고들 한다. 데카르트는 동물이 기계와 다를 바 없다고도 했다. 지능이 낮아 자기 존재에 대한 생각조차 못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동물은 그들 나름대로 언어문화를 갖추고 살아간다. 그렇다면 개미도, 벌도, 고래도, 나무도 모두 이성적인 존재에 포함시켜야 한다. 야만인과 문명인을 가르는 기준만큼, 기계적인 동물과 이성적인 인간을 가르는 기준은 모호하다.

예쁜꼬리선충이라는 아주 작은 생물이 있다. 신경망이 아주 간단해서 어떤 연구진이 고스란히 컴퓨터 프로그램에 옮겨보았다. 그랬더니 아무런 자극이 없어도 실제 예쁜꼬리선충처럼 움직이고, 자극을 주었더니 그 생물과 똑 닮은 반응을 보이더라는 것이다. 사람의 신경망이야 하도 복잡하고 아직 그 복잡한 것을 옮겨둘 만한 기술이 없어서 그렇지, 예쁜꼬리선충처럼 그대로 옮겨놓으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궁금하고 두렵다. 수조 속의 뇌처럼 사유능력을 갖춘 프로그램이 될까? 이성적인 존재라고 보아야 하나?

까치는 아무 의미 없이 깍깍, 하고 울지 않는다. 물론 내가 이해할 수는 없지만, 그들은 대화를 했고, 언어문화를 향유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렇게 믿어야만 한다. 다른 사람이 이성적인 존재라는 말도 사실은 증명할 수 있는 명제가 아니라 상호적인 믿음이다. 그렇게 해야 도덕적이라 인정 받기 때문이고, 다른 인간과 사회를 구성하며 생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서로를 이성적인 존재라고 불러야만 해서 부르고 있는 것이다.

삶이란 무의미에서 의미를 찾아나가는 여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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