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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재영 Mar 20. 2017

지겨운가요, 힘든가요

2017년 3월 20일, 예순두 번째

숨이 턱까지 찼다. 머릿속에는 오로지 두 생각만 공존한다. 얼마 안 남았다, 더럽게 힘드네. 위장이 쪼그라드는 느낌이 들더니, 당장이라도 구역질이 나올 것만 같은데, 목에서는 진득한 침이 숨구멍에 달라붙고, 온몸의 피가 근육과 허파에 쏠려 손가락이 차갑게 오그라든다. 중력이 강해진 것만 같다. 팔다리가 자꾸만 땅으로 내려앉아 의식적으로 힘을 주어야 한다. 결승선이 보인다.


나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몸을 움직인다. 무아지경. 머리는 하얘진지 오래. 나와 사물의 경계가 흐려지고, 아찔한 느낌이 들더니, 숨이 찬다, 마지막. 걷고 싶어, 숨 좀. 아냐, 열 걸음만 더. 마지막 스퍼트, 진짜. 팔, 직각, 위아래로, 힘 줘. 쉬고 싶다. 보폭, 멀리, 최대한. 다리, 쭉쭉. 걸을까? 아, 죽고 싶다. 그리고 끝-.

결승선에 들어왔다. 땅에 쓰러져 눕는다. 숨을 아무리 쉬어도 숨이 막힌다. 하늘은 하얗고, 몸은 나른한데, 피맛이 나는 걸쭉한 침은 계속해서 목에 울컥인다. 멀미가 나서 눈을 잠시 감는다. 땀이 이마에 흥건하다. 몇 초가 지나면 좀 진정되겠지.

달리기 기록이 나온다. 12분 38초. 3km를 12분 30초에 뛰었어야 했다. 8초. 시작할 때 뭐가 좋다고 여유를 부렸을까. 발을 내딛을 때마다 0.1초씩만라도 빨리 움직였으면 어땠을까. 되지도 않는 후회에 헛웃음이 씁쓸하다.

시험도 그렇다. 12시간을 남겨놓고 벼락치기를 할 때면 항상 이런 후회를 했다. 왜 좀더 안 해놓았을까. 공부가 참 쉬웠다던 사람처럼 교과서 중심으로 예습 복습만 했어도 이렇게 되지는 않았을 텐데. 뭣이 그렇게 귀찮고 피곤했을까. 그러나 당장 발등에 불부터 꺼야했기 때문에 언제나 무아지경이었다. 그런데 이런 삶이 나쁘지 않다.


인생은 수많은 스퍼트의 연속이다. 멀리 내다보고 철저히 계획을 나누어 매일 꾸준히 계획을 달성하며 사는 사람이, 나는 되지 못했다.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나는 미래를 잘 몰랐고 꾸준하지도 않았다. 당장 지금도 알기 어려운데 미래는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꾸준히 사는 삶은 자유로운 인간보다는 바람직한 기계에 더 가깝다. 미래와 사람은 예측이 불가능할 때 맛이 난다. 나는 기계가 갖지 못한, 몸과 충동을 갖고 있다. 나는 자유다.

오래 전 프랑스에 라플라스라는 사람이 있었다. 뉴튼 물리학이 절정에 치달았을 무렵, 라플라스는 이런 존재를 떠올렸다. 세계의 모든 사물에 대한 위치와 운동량을 파악하고 미래를 정확히 예측하는 도깨비. 간단히 하면 이렇다. 현재를 알면 미래가 보인다. 그러나 우주에 발을 딛을 정도로 물리학이 발전한 지금에도 라플라스의 도깨비는 나타날 생각을 않는다. 현재는 알면 알수록 더 복잡해지기 때문이다. 현재를 알아냈다고 해도 미래를 예측하려고 보면 그 미래가 현재로 변할 것이다. 라플라스의 도깨비가 나타나는 날은 모든 인간이 자유를 잃은 날이리라 생각한다.

미래를 보고 그에 현재를 맞추라니. 헛소리다. 미래를 엮은 말은 명령이 될 수 없다. 언제나 해석만이 될 뿐이다. 이미 현재가 되어버린 미래를 두고, 이제 과거가 되어버린 현재를 아쉬워하는 후회밖에 될 수 없다. 항상 달리기가 끝나면 후회를 했듯이.


Carpe diem(지금을 잡아라). 현재는 현금이고, 미래는 선물이다. 같은 값이면 현금이 낫다. 영화 아저씨에서 원빈이 가장 강했던 이유가 여기 있다. 오늘만 사는 놈은 내일을 사는 놈에게 언제나 이긴다.

그렇다고 미래 없이 살라는 건 아니다. 내 삶에서 과거가 중요한 만큼 미래는 중요하다. 과거 없이 내 정체성을 주장할 수 없듯이, 미래 없이 내 가치관을 주장할 수 없다. 온전히 내가 되려면 과거와 미래 모두 돌보아야 한다.

다만 당부하고 싶은 건, 지금을 잃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다. 일탈 없는 근면은 나를 죽이고 껍데기만 남길 뿐이다. 스퍼트는 지금의 해방감을 누린 자에게만 허락되는 긴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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