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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재영 Mar 23. 2017

보지 말고 읽자: 글에서 핵심 뽑아내기

2017년 3월 23일, 예순다섯 번째

눈이 심심한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항상 무언가를 읽는다. 식탁 앞, 버스 안, 변기 위도 예외는 아니다. 한창 힘을 주다 읽을 만한 글이 없으면 샴푸에 적힌 사용설명서를 읽기도 했다. 활자중독까지는 아니지만, 활자의존 정도랄까.

시험을 하나 보았다. 글에서 핵심을 뽑아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되는 시험이었다. 꼼꼼히 읽고, 곰곰이 생각했다. 어렵사리 한 문장을 뽑아내고 만족했다. 다시 읽어봐도 나쁘지 않았다. 많이 읽고 써본 덕분일까.

대학교육을 받으면서 알아낸 사실인데, 시험을 치고 나면 꼭 공부 안 한 애들이 잘 봤다고 느낀다. 내가 딱 그 짝이었다. 결과는 처참했다. 내 문장에는 있어야 할 단어가 없고, 없어야 할 단어가 있었다. 한 마디로, 요약에 실패했다. 핵심을 빗겨나갔다. 자존감이 무너졌다.

원인이 무엇일까. 나는 꼼꼼히 읽었다. 그런데 핵심을 놓쳤다. 생각 없이 읽었던 게 아닐까. 읽기는 생각하기를 전제한다. 생각 없는 읽기는 단순히 글자를 보는 일일 뿐이다. 나는 글이 주는 이미지만 보았을 뿐, 글쓴이가 담은 생각에 동참하지 못한 것이다.

왜? 라고 질문하지 않는다. 나는 글을 읽으면서 최대한 빨리, 많이 정보를 받아들이려고 한다. 의식하지 않아도 본능처럼 발현된다. 왜 글쓴이가 굳이 이 말을 하는지 관심이 없다. 철학 공부를 하면서도 느꼈다. 현자나 천재라는 수식어에 짓눌려 반항하지 않았다. 물고 늘어지지 않고 고개를 숙였다. 비판보다 이해를 앞세웠다.

글에서 핵심을 찾는 일은 지우는 일이다. 없던 글을 새로 쓰는 게 아니라, 있던 글을 잘 지워서 농도 짙게 녹여내는 일이다. 비판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모든 글이 중요하다. 지울 수 없으니 없어야 할 글이 생긴다. 쓸 말은 많은데 한 문장에 녹여내야 하니 있어야 할 것도 없다. 총체적 난국이다.

잘 쓰려면 잘 읽어야 한다. 글 깨나 쓴다고 우쭐댔던 게 부끄럽다. 읽을 줄을 몰라 쓸 줄도 몰랐다. 생각하며 읽으면 행간이 보일까. 앞으로는 글을 보기만 하지 말고 좀 제대로 읽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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