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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ehwa Lee Apr 11. 2018

[한 술] 어느 날의 한량

잘 먹고, 잘 마시고, 잘 쉬는 이야기.

눈을 뜨니 온몸이 천근만근.

조금만 더 지체하면 지각을 해 버릴거라는 걸 알았지만 좀체 일어날 마음이 들지 않아 병가를 냈다.

막상 계획치 않은 하루가 생기고 나니, 갑자기 하루에 대한 기대로 마음이 가득차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단지 평일 낮에 집에 있을 뿐인데, 여유가 주는 쾌감에 나는 흠뻑 도취되어 하루를 보냈다.


종일 비가 올 거라는 일기예보와는 달리 날은 근래 보기 드물 정도로 맑아서, 잠시 외출을 하는 버스 안에서는 탁트인 시야와 눈부신 거리에 종일 감탄했다. 습도없는 깨끗한 바람, 만개해버린 벚꽃, 대학 캠퍼스의 운동하는 신입생들, 반질한 도로 위에서 흩어지는 햇볕까지, 모든 게 봄이 왔음을 여실히 알리는 그런 하루였다. 온몸이 가벼운 근육통으로 욱신대는 통에 고작 나간 곳은 동네의 재래시장이었지만, 시장이라는 곳은 나름대로의 엄청난 활기가 있는 곳이어서 발을 내딛는 순간 몸이 고조되는 느낌이었다. 철을 맞은 멍게의 붉은빛, 큰 칼로 족발에 붙은 살점을 뚝뚝 내리치는 거침없는 상인의 손길(조금의 엇박이 나도 손가락이 성치 않을 것 같은 망설임 없는 내리침이었다), 진열되어있는 돼지머리와 턱에 붙은 혀의 모양, 반찬가게 아줌마의 시니컬한 말대답과 거기에 서운해 한마디를 던지는 할아버지의 입씨름까지. 굵직굵직한 에너지 안을 휘적이다 나는 그득한 비닐봉투를 들고 장에서 빠져나왔다.


저녁은 분짜와 족발.(의외로 맛있는 조합이다)

아침에 만들어놓은 느억맘 소스에 버미샐리면을 적셔 야채와 족발과 함께 먹는다 (정석은 숯불에 구운 돼지완자지만 족발역시 손색이 없다) 새콤달콤한 분짜와 쫄깃한 족발은 막국수와의 조합만큼이나 궁합이 좋다. (어찌보면 냉채 족발이 생각나는 맛이기도하다) 배를 두둑이 채우고는 방에 들어와 음악을 크게 틀고 방정리를 한다. 중간중간 나의 고양이의 잔등을 쓰다듬는 일도 잊지 않는데, 나는 이 순간을 진정으로 사랑한다.

자, 이제 오랜만에 책상에 앉았는데 무얼한담.

라텍스 방석에 커버까지 씌워놓고 비장하고 흡족한 마음으로 앉아 내가 한 일은 음주 독서.

친구에게 선물받은 사케(사케치고 맛이 드라이하고 톡 쏘는 느낌이라 아주 홀짝이며 마셧었다.)에 깔라만시를 찔끔 넣고, 딸기를 작게 잘라 얼음과 함께 넣는다. 상큼하고 달콤한 과일향이 밴 차가운 사케는 시중의 과일소주와 비할 바 없이 맛이 훌륭하다. (인위적인 단 맛 없이 향이 아주 좋다)


언제부터인지 나는 호흡이 긴 글 대신 에세이라든가 인문서적을 주로 챙겨보게 되었는데, 그중에서도 <음예예찬>이라는 책은 작년에 흥미롭게 펼쳐들었다가 미처 끝까지 보지 못한 책이기도 하다. (나는 여러권의 책을 동시에 돌려보는 버릇이 있다.)  조금의 취기가 오르니 책이 그리도 재미있을 수 없다. 이 책을 쓴 사람은 여러모로 괴짜 같은 느낌이었는데, 그가 말하는 동양-특히 일본-에서 어둠(음예)를 다루는 방식에 대한 통찰에는 정말이지 감탄할 만한 구석이 있다가도, 그가 다른 나라에 대해 툴툴대는 태도라든지, 옛 교토의 상류층 마나님들에 대해 묘사를 하는 방식에는 뭐랄까, 편견어린 구석이 아주 없지는 않아서 나는 능청스럽고 괴팍하지만 실눈 안에 빛나는 눈동자가 반짝한 할아버지의 모습으로 그를 상상하며 책을 읽어내려갔다.  아, 이렇게 휴일의 하루가 지난다. 아쉬운 마음을 안고 잠이들 채비를 하려는데 카톡 알림소리가 들린다.


- 동노 고? (동생과 나는 코인노래방을 동노라고 부른다.


두툼한 후드티를 뒤집어쓰고 생쥐처럼 부모님이 자는 집을 빠져나온다.

알고보니 공부를 하던 동생은 '거절당한 마음을 구실'삼아 공부를 하려했는데, 내가 덥썩 'ㄱ ㄱ '라는 답장을 보냈다고. 아무렴. 마음이 풀어진 한량 같은 하루를 보낸 내게 거절은 무슨.


종종걸음으로 밤길을 나서는데 거리가 싸늘하다.

내일부터는 비가오고 당분간 점점 추워진다고.

그렇지만 나는 오늘 하루를 만끽한 기운을 당분간의 동력삼아 괜찮을 것만 같은 예감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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