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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개인적인 체험 Apr 18. 2018

[한 잠] 19세

고등래퍼2, 도깨비 그리고 벚꽃 완상

  내가 다니던 고등학교에서는 이맘 때 즈음 벚꽃 완상이라는 것을 했다. 점심 시간이 지나고 한 두 시간 쯤 아이들을 교문 밖에 풀어주고 벚꽃을 마음껏 감상하라는 것이었는데, 단체 생활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나도 이 시간만큼은 꽤나 좋아했다. 선생님들은 기지개를 피면서 뒤에서 느적느적 걸어나오고, 몇몇 아이들은 폴짝폴짝 뛰면서 벚꽃가지를 귀에다 꽂기도 했다. 지금과 다를 것 없이 느릿느릿한 나는, 참 성가시네, 라고 말은 하면서도 설렘을 숨기고 주변을 크게 두리번 거렸다. 아기의 두 뺨처럼 발그레한 분홍빛이, 햇빛을 받아 흰 빛에 가까운 그 몽글거림이 마음에 훅 하고 불어왔다, 바람이 불어 꽃비가 내리면.  바닥에 떨어져 짖이기는 그 꽃잎까지 슬프고 그랬다. 나는 그야말로 봄에 어울리는 나이를 하고 있었다. 열아홉.


  전국에서 아름다운 걸로 손꼽혔던 대학 캠퍼스 내에 위치했던 학교에서 내가 최고로 꼽는 산책 길은 인공 호수를 끼고 있는 초등학교에서 미대로 이어지는 완만한 오르막길이었다. 나와 친구들은 점심 시간에 우리를 교문 밖으로 못나가게 지키는 공익근무요원을 피하여 돗자리와 간식 보따리를 들고 종종 뛰쳐나갔다. 선생님들만 할 수 있는 점심 식사 후 산책에 대한 반발이었다. (나는 여전히 왜 우리를 밖에 못나가게 했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너무나 눈에 띄는 푸르딩딩한 교복을 입고 대학생들 틈에 섞여 금지된 공간들을 누비고 다녔다. 흐드러지게 핀 벚꽃 나무 아래 태연스럽게 앉아 있는 우리를 보고 산책을 나온 선생님들이 황당한 표정을 지으면, 어쩐지 이긴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했다.

  내가 할 수 있는 반항이란 건 그 정도였다. 그즈음 고3 수험생들이 대부분 그렇듯이 수험에 대한 고민을 하였고, 또 그 시절에는 절대로 이겨낼 수 없을 것 같던 문제들이 있었다. 성인이 되면 곧 가지게 될 권리에 대한 기대감과 의무들에 대한 부담감이 겪어본 적 없으니 내 머릿속에서 제멋대로 커져갔고, 동시에 지금 하지 못하게 되는 것들에 대한 호기심과 금지하고 규제하는 자들에 대한 강한 반발감이 덤처럼 따라왔다. 미성숙했고, 내가 바라보는 나 자신은 너무 작고 약했다. 나는 그때 이미 내가 다 자랐다고 생각했기에 주변 어른들과 많이 대적했지만, 그와 동시에, 어서 성인이 되어서 눈앞의 난관들을 '어른스럽게' 잘 넘길 수 있는 성숙한 인간이 되기를 간절히 빌기도 했다. 더 이상은 마음이 이렇게 힘들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도서관에 숨어서 훌쩍 거리던 그런 순간에, 벚꽃은 흩날리고 마음도 곧 와르르 무너질 것 같이 흔들릴 때.


  그 소망이 어느 정도는 이루어진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더 이상은 마음이 이렇게 힘들지 않았으면 좋겠다 싶을 때는 계속 찾아오지만, 내가 또 다시 웃게 될 것이라는 것을 알아서 조금은 덜 괴롭기 때문에. 어지간한 흠집에는 버틸만큼 조금 더 단단해진 나는 이 멀미나는 너울도 결국은 잠잠해질 것임을 잘 알기 때문에.

  견고해진 대신에 조금은 무거워졌고 그래서 예전만큼 가볍게 훌훌 떠나지는 못한다. 기브 앤 테이크는 물질이나 관계에서만 일어나는 게 아니었다. 나는 여전히 미성숙하고 미완성이지만, 어쩐지 이 미성숙하고 미완성한 것이 나의 완성인 것 같이 느껴질 때면 희망도 좌절도 많던 열아홉으로 돌아가고 싶다. 어디로든 휩쓸리고 떠나갈 수 있을 것 같은 그때가.

  그래서 였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이번 봄 Mnet의 <고등래퍼2>를 보고 내내 마음이 찌르르 했다. 열아홉 즈음의 아이들의 치열함이 자꾸 돌이킬 수 없는 시간을 머릿속에서나마 되감게 만든다. 극적으로 미워하고, 극적으로 좋아했던 많은 것들에 밍숭맹숭해지는 게 그렇게 아쉬울 수가 없다. 목련이 지고, 벚꽃이 피고, 또 벚꽃이 지고 꽃사과가 피는 것을 보고 봄이 가는 것만 보이게 되면 말이다. 아직 유유자적하는 낚시배에 타지는 못한 것 같은데, 그렇다면 지금의 나는 한강 유람선 정도를 타고 있는 걸까? 선착장이 있음을 안심하면서. 이것 정도면 괜찮지 않냐고 스스로를 설득하면서. 흔들리는 갑판 위에 서 있는 사람만이 볼 수 있는 망망대해를 보는, 그 열아홉들을 응원하고 또 질투하면서. 결국 부러워하면서.

  뒤늦게 <도깨비>를 보면서 지은탁도 열아홉이라는 데에 눈길이 간다. (지나치게 티없이 맑게 그려지기는 하지만,) 열아홉 지은탁은 도깨비 신부가 되고 싶다고 말해도 어색하지 않다.  '터무니없다'라는 말을 들이대는 것이 더 '터무니없게' 되는 그런 나이. 그가 겪을 좌절도 성취도 일방적으로 응원받는 나이.  아, 실은 그런 생각도 든다. 열아홉은 한참 지났지만, 내가 겪을 좌절도 성취도 절대적으로 응원받고 싶은 것은 아닐까. 스스로를 유람선에 옭아매는 게 싫어, 모험을 떠나고 싶어도 가자미눈을 뜨고 혼낼 사람들이 무서워서.

  나는 지금 이미 내가 어느 정도 중심을 찾았다고 생각하기에 더 이상의 고난이 그렇게 무섭지도 않고 또 고통을 굳이 반기지도 않지만, 그와 동시에, 다시 열아홉의 마음으로 돌아가 무엇이든 더 격렬하고 극적이게 느낄 수 있게 나 자신을 다시 구덩이에 빠뜨리고 싶은 마음도 든다. 슬픔도 기쁨도 그렇게 눈부실 수 없는. '날이 좋아서, 날이 좋지 않아서 모두 좋았다.'는 어느 도깨비의 말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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