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가설: 인간의 성장기에 역경, 좌절, 트라우마가 필요
어린 날을 떠올려 나는 보자면 숫기 없고, 말도 없고, 지나치게 조용한 아이였다. 친구를 많이 만들지도 않았으며, 어울려 노는 또래 친구들은 같은 골목에서 성장해 온 아이들이 전부였다. 낯가림이 심했기에 남들과 빨리 친해지지 못했고, 분위기를 주도하는 유쾌함도 없었다. 부끄러움도 많고 유약했다. 그런데 지금은 전혀 다른 내가 되었다. 에너지를 아끼기 위해 말을 줄여야 할 정도로 말도 많고, 좋아하는 것에는 적극적으로 임한다. 하고 싶은 말은 참지 않고 말하며, 다른 사람들과도 제법 빨리 친해지는 편이다. 초등학교 때 만났던 친구가 지금의 나를 만난다면 아마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어려울 것이다.
나는 이 변화를 잘 기억하지 못한다. 어느 순간 나는 이렇게 단단한 사람이 되었다. 다른 사람의 말에 쉽게 좌지우지되며 내 탓을 했던 내가 어떤 말을 들어도 기분이 상하지 않게 변한 데는 어떤 계기가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그 기점도 모르겠고, 변한 이유도 잘 몰랐다. 그런데 최근 조너선 하이트의 <바른 행복>이란 책을 읽었는데 그중 7장의 내용을 읽으면서 내 변화의 계기도 추측할 수 있었다.
7장의 소제목은 <우리는 스스로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강하다.>이다. 성장 과정에서 역경, 좌절, 트라우마가 적절하게 존재해야지 제대로 성장할 수 있다는 내용이다. 고통이 우리 성격의 세 가지 층위를 형성하는 데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 부분을 토대로 나는 나의 어린 시절의 고통을 떠올려 보았다. 지나치게 어릴 때라 인지하지 못했지만, 내 성격의 변화의 계기가 될 수밖에 없었던 사건이 있었다.
내게는 자라오면서 조금 특별한 관계의 친구가 하나 있었다. 그 친구는 나와 생일이 비슷했고, 부모님끼리 아는 사이였다. 그래서 태어날 때부터 보고 자랐다. 물론 부모님들끼리 자주 만나는 사이는 아니었으나, 같은 초등학교에 입학하여 같은 반에 배정되면서 그 친구와 나는 조금 더 가까워졌다. 우리는 같은 나이였으나 조숙함에서 차이가 있었다. 그 시절 나는 숫기 없고 말 없는 아이였지만, 그 친구는 대담하고 사람을 끌어모을 줄 아는 성숙한 친구였다. 거기서부터 우리는 차이가 존재했다. 그 친구는 수틀릴 때마다 나를 따돌리곤 했다. 그때마다 나는 내가 그 아이에게 무슨 잘못을 했지 하면서 나를 탓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그 친구의 마음이 풀리면 같이 다니기를 반복했다. 그 친구와 나는 학교, 학원 그리고 교회까지 대부분의 일상을 함께해야 했다. 그래서 내일상 곳곳에 스며든 따돌림으로 인해 나는 그 어느 곳에서도 마음 붙이기가 어려웠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친구는 나를 이용해 다른 아이들과 유대감을 형성했던 것 같다. 누구 하나를 적으로 만들면 본인들끼리는 더 가까워지는 인간의 본능적 특성을 잘 활용하는 친구였다. 나는 막말을 하지도 못했고, 서운함을 티 내지도 못하는 만만한 아이였기에 그 역할로는 최적의 선택이었다. 내 잘못이 없음을 인지하고도 나는 그 아이에게 복수를 할 방법이 없었다. 그 친구에게서 다른 친구들을 빼앗을 능력도 없었고, 내가 따돌림을 주도할 성격도 안 됐다.
그래서 선택한 복수 방법은 간단했다. 모든 면에서 내가 더 잘해보자. 그 친구보다 좋은 성적을 받고, 더 많은 인정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이 되자는 목적의식이 생겼다. 엄마 친구 딸이었기에 우리는 항상 비교 대상에 서로를 둘 수밖에 없었다. 그 친구와 나는 중학교까지 같이 올라갔고, 꾸준히 같은 학원과 같은 교회를 다녔다. 철이 들면서 나는 더 이상 그 친구 주도 하에 따돌림을 당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더 이상 친해지지도 않는, 같은 반에 있는 사이 정도로만 지냈다. 꾸준히 서로를 보긴 했지만 옛날처럼 친구로 지내지는 않았다. 그리고 나는 그 친구와 비교당하는 동안 내내 학교 성적으로 그 친구를 앞섰다. 학교 선생님, 학원 선생님과의 사이도 내가 더 좋았다. 그 친구가 또래 친구들과 사귀고 노는 재미에 빠진 동안, 나는 그저 내 앞에 놓인 방식으로 그 아이에게 복수를 해왔다. 시간이 흘러 학원에서 같은 수업을 들었을 때, 모든 선생님이 나한테 더 관심을 가지고 친근하게 굴었을 때 묘한 만족감이 들었다.
그 기점으로 나는 많은 것들을 얻었다. 누군가에게 이유 없는 괴롭힘을 당하지 않으려면 강해져야 한다. 나를 지킬 수 있을 정도로 나 자신을 끌어올려야 한다. 내가 선택한 방식은 우선 나를 뒷받침해 주는 능력치를 끌어올리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방법은 부가적인 효과를 발생시켰다. 바로 나에 대한 자신감을 만들어 주었다. 자신감은 나를 밝고 유쾌한 성격을 가지게 만들었고, 나아가 내 생각을 말할 수 있는 사람으로 나를 성장시켰다. 더 이상 다른 사람의 평가에 놀아나지 않고 나 스스로 세운 더 높은 가치에 집중했다. 그때부터 나는, 내가 뭘 해도 나를 좋아해 주지 않는 사람에게 기꺼이 웃으며 반응할 수 있는 정신력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지금 그 친구를 만난다면 나를 따돌려줘서 무척 고맙다고 말할 것이다.
모든 이들의 인생엔 역경이 있고, 그 역경을 버티지 못한다고 해서 절대 나쁜 건 아니다. 그 역경을 준 환경의 잘못이다. 그렇지만 그 고통을 마주하고 이겨내는 경험은 나를 바꿀 순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지금의 고통에 너무 주눅 들지 말고 싸워 이겨내 보자고 다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