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거운 위로

위로는 받는 것도 주는 것도 어렵다

by 초이

친한 친구가 나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너는 자기 얘기를 잘 안 하는 것 같아"

나는 이 말에 의문이 들었다. 나는 내 이야기를 서슴없이 잘하는 편이기 때문이다. 감추고 싶은 이야기도 딱히 없고, 물어보면 다 말해주는 편이기에 이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친구가 말한 자기 얘기는 나의 TMI가 아님을 나중에 알았다. 그 친구가 말한 내 얘기는 나의 고민거리들이었다.





생각해 보면 나는 TMI나 생각에 대해서는 매일매일 떠들어대지만, 내가 가진 고민이나 문제들을 말하는 편은 아니다. 왜 그럴까? 딱히 생각해 본 적 없는 주제였다. 우선, 나는 내가 가진 고민들이 그다지 큰 문제라고 받아들이는 편은 아니었다. 처음에는 내가 스스로 고민거리를 우습게 여기나 싶었다. 그러나 <바른 행복>에 나오는 행복 피질의 개념을 이해하게 된 후, 어쩌면 내 행복 피질이 불행에 대한 회복탄력성을 높여준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한 번은 TMI처럼 지금 가진 고민을 친구들에게 털어놓은 적이 있었다. 그 말을 하면서도 내가 예상했던 답변은 "힘들었겠다.", "내가 대신 때려줄게." 정도의 가벼운 말들이었다. 그런데 내 친구는 내 고민이라 적어 보냈던 메시지보다 3배 정도 길게 나의 상황에 대한 공감과 이해에 대한 말들을 보냈다. 나를 생각해 주는 친구의 마음이 구구절절 담겨 있었다. 그 마음이 한없이 고마우면서도 동시에 기분이 묘했다. 순간적으로 불편감이 일었기 때문이다. 그러고 나서 그 불편감이 스스로에 대한 혐오로 작용했다. 이렇게 엄청난 위로를 받고 나는 왜 불편하다는 부정적인 감정을 느끼는가?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에서는 진정한 위로는 휴식이라고 한다. 그런데 위로를 받으면 고마운 마음이 들고, 그 고마움은 나중에 갚아야 할 빚이 된다. 그래서 마음의 짐이 생기면서 휴식에 방해가 된다고 말한다. 내가 위로받는 것에 불편감을 느꼈던 것이 사이코패스 같은 사람이 아니라, 부채감이 남기 때문이었다. 친구의 마음 한편에 내 고민이 남는 상황에 대한 불편감 말이다.







나의 이런 성향들은 나아가 타인을 위로할 때 많은 고민을 안겨준다. 내 위로는 짧고 간결하다. 주로 인지적 공감의 말들을 하기 때문이다. 감정적 공감은 잘하지도 못할뿐더러 나 같은 사람에게는 부채감이 될 수도 있다. 여전히 나는 위로를 받는 것이 버겁고, 위로를 하는 것은 어렵다. 다른 사람을 위로할 때 부채감을 남기지 않으면서 그의 마음을 헤아리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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