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르만 헤세 <나르치스와 골드문트>를 읽고
이 책의 제목은 나르치스와 골드문트인데, 진짜 주인공은 골드문트이다. 이 책의 저자 헤르만 헤세는 니체 철학에 영향을 깊게 받은 사람이고, 그 철학을 소설로 펼쳐놓았다고 봐도 무방하다. 대부분의 책은 인간의 성장을 다루고 그 성장의 방식은 “나답게”라고 말한다. 인간은 각각 다른 본성을 타고났으니 본인답게 살아가는 게 가장 인간 본연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이라 생각한다. 니체는 인간이 가진 본능적 욕망들을 나쁜 것이라 표현하는 기독교의 방식을 비난하고, 욕망을 따르는 것이 오히려 주체적인 내가 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 책도 본인이 가지고 태어난 욕망에 충실한 인물이 등장한다. 바로 골드문트다.
처음에 그는 수도원에 들어와서 나르치스를 보고 한눈에 반하고, 그를 닮고 싶어 한다. 나르치스도 마찬가지로 학생으로 들어온 골드문트에게서 매력을 느끼고 눈으로 그를 좇아 다닌다. 골드문트는 나르치스를 본받아 학자, 성직자가 되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그러다 의도치 않게 동료와 수도원을 빠져나가서 만난 소녀를 보며 본능적으로 욕망을 느낀다. 결국 그 사실을 나르치스에게 고해성사한다. 나르치스는 그에게 비난이 아니라 깨달음을 준다. 골드문트는 나르치스 본인과 다르다며, 네 안에 어머니를 찾고 네 방식을 찾아 살라고 말이다. 골드문트는 문득 자신이 ‘어머니’를 잊고 살았다는 사실을 인지하며 어머니를 찾기 시작한다. 그렇게 골드문트는 진짜 자신을 찾아 수도원을 떠난다. 이 소설의 전체적인 내용은 골드문트가 어떻게 방황하고, 어떤 욕망을 만났고, 어떻게 예술적 혼을 찾는지가 주된 내용이다. 골드문트의 방황기라고 볼 수 있다. 그의 삶은 욕망을 쫓아 떠돌며 생산적인 것과는 거리가 먼 행위들만 주로 하고 산다.
헤르만 헤세가 말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그는 우리의 관념에 뿌리 깊게 자리한 기독교적 도덕심을 흔들고, 내 욕망에 따라 사는 것이 인간 본연의 삶이라고 말해준다. 골드문트는 모든 것들을 경험하고 그 경험을 바탕으로 진정한 예술가가 된다. 반면 나르치스는 골드문트가 수도원을 나가고 나서 어떻게 살았는지 자세하게 나오지 않는다. 훗날 골드문트를 다시 만나고 나서 나르치스가 한 독백은 나에게 감탄을 유발했다. 수도원에서 매일 같은 삶을 살고, 본인을 통제하게 두고 살았을 나르치스는 정 반대의 삶을 살아온 골드문트를 보며 자신의 삶보다 오히려 골드문트의 삶이 더 가치 있음을 인정한다. 쾌락을 포기한 순수한 삶보다 어둡고 죄와 향락에 빠진 삶이 더 용감하고 고귀한 삶이라고 말하는 그 독백에서 그는 이미 경험하지 않아도 깨달음의 경지에 도달했음을 느꼈다.
나는 니체와 헤르만 헤세가 말하는 것에 동의한다. 우리의 욕망은 가린다고 한들 없어지는 것이 아니니, 오히려 그것을 표출하고 인정하는 것이 더 나은 삶의 방식이라는 점 말이다. 하지만, 꼭 방탕만이 인간의 욕망의 표현 방식은 아닌 것 같다. 나르치스처럼 본인과 다름을 인정하는 것은 나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제대로 마주한 사람만이 가능한 일이다. 그러니 나르치스는 이미 누구보다 본인 자신이 되어 있는 사람이다. 골드문트의 삶은 책 전반에 자세히 다루고 있기에 그에 대해 궁금한 점은 하나도 없다. 하지만 쾌락을 포기한 나르치스는 내내 어떤 삶이었을까 궁금해진다. 사랑하는 친구인 골드문트를 보내고 홀로 수도원에서 어떤 마음으로 어떤 생활을 했는지 헤르만 헤세가 번외 편을 써주었으면 하는 생각을 하며 아쉬움 가득하게 책을 덮었다.
나는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누구를 닮았는가 생각해 보면, 그 누구도 닮지 않았다. 내 안에는 나르치스처럼 자기 통제력이 가득하고, 골드문트와 같은 욕망에 충실한 모습도 분명히 존재한다. 내 삶은 나르치스와 골드문트가 팽팽하게 줄다리기를 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나는 항시 나르치스가 이겨 내 삶을 통제하길 희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