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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인의 정원 Dec 27. 2024

구름 위를 걷다 1

겨울산 한라에 오르다

한 걸음씩 내딛다 보니 어느새

구름이 발 보다 아래에 있다.



평소보다 5kg 불어난 체중과 심폐기능에 도움 되는 일을 하지 않았던 요즘 생활이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고지에 오를 수 있다는 자신감을 여지없이 무너뜨렸다.


입구로부터 계단을 밟고 눈 쌓인 돌길을 걸었다. 200m지점 작은 표석이 다소곳이 놓여 있었다. 

뺨을 타고 물이 줄줄 흐르고, 심장이 나 여기 있다고 쿵쿵쿵 북을 친다. 가 두근거렸다.

머리에 손을 대지 않았는데 맥박이 느껴진다.

걸음을 멈추었다.

이 길을 끝까지 갈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었다.

손뜨개 털모자를 벗었다.

스타일이고 뭐고 땀을 식혀야  한다.

 

한라산을 오르던 50대 가장이 심정지로 숨졌다는 뉴스가 생각났다(조금 더 올라가니 심정지 장소라는 표지판도 있었다).


 이전에 느끼지 못하던 감각이다.

 년 전까지 일주일에 한 번 동호회 축구를 하면서 숨차던 그것과는 전혀 다르다.

잠시 숨을 진정시켰다.

정상까지 갈 수 있을지 자신이 없어졌다.


다시 걸음을 옮겼다.

종아리와 허벅지의 근육들이 팽팽히 당긴다.  


'주위를 둘러보며 천천히 나만의 속도로 나아가자.'


숲길 좌우로

굴참나무들이 우점한 발치에 상록수 굴거리나무들이 듬성듬성 추위를 버티고 있다.


어둑하던 숲에 희멀건 빛이 스며든다.

나목들이 서있는 백지 위로 불덩이가 솟구친다.

쌓인 눈을 비집고 나온 제주조릿대들이 나무들의 언 발을 감싸고 있다.


돌계단에 쌓인 눈을 아이젠이 차박차박 소리를 내면서 스쳐간다.

이전에 알지 못하던 내려놓음이다.

상주는 것도 아닌데 절대 허용하지 않았던 추월, 오늘은 당하고 또 당해도 어쩔수 없다.


야트막한 오솔길  따라 오르다 보니 울창한 직선들이 솟아 있다.

하얀 도화지가 펼쳐져 있고 장대한 아름드리 삼나무 군락이 하늘을 가렸다.


개울 위로 나무다리가 놓여있다. 퉁퉁퉁 발걸음 따라 쌓인 눈과 밟히는 판재가 제 역할을 하고 있다고 소리를 낸다.


느덧 나목들 사이에 굴거리나무들이 사라지고 노가리(주목)들이 반긴다. 때죽나무와 산딸나무는 이따금 깍두기처럼 껴 있다. 조금만 더 가면 휴게마당이 있다. 우선 거기까지 가자.


기억을 더듬어 보니 네 번째다. 이 코스는.

가뿐히 걸었던 익숙한 길은 겨울임이 무색하게 엿가락처럼 늘어나 있었다. '이렇게 멀었나' 생각하며 한 발짝씩  옮겼다.


출발한 입구에서 4km 지점 속밭에 이르렀다. 12개의 등받이 없는 벤치와 지붕 얹은 쉼터와 화장실이 넓은 공터 으로 놓였다. 길이로 치면 정상까지는 절반쯤 온 것이지만 앞으로 갈 길은 지나온 길보다 점점 가파른 구간들이다.

졸참나무들은 함께 동행하기를 마다하지 않고, 드문드문 조릿대 위로 정상 능선이 겹쳐 보였다. 길은 오른쪽을 향하고 있었다. 목적지와 다른 방향이라도 길을 벗어나 직진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때론 돌아가는 길이 맞는 경우가 있다.

길을 벗어나면 허벅지까지 빠진다. 눈이 꽤 많이 쌓였다는 것은 등산로 바로 옆에 발을 디뎠다가 빠진 발자국의 깊이를 보면 가늠할 수 있다.

속밭을 벗어나니 곧이어 나무계단이 이어지고 경사도가 세졌다. 체력과 다리 근육들이 아우성이다. 세월이 꽤 지났다. 완전군장에 박격포를 보너스로 메고 동계종합훈련의 하이라이트 200km 행군도 거뜬히 해내었다. 옛날 일이 돼버린 기억을 붙잡았다.  달랑 백팩 하나 메고 걷는데도 정상까지 갈 수 있을지 장담하지 못하겠다. 일단 진달래밭까지는 가자.


초등생 형제와 젊은 아빠가 나를 가뿐히 제치고 지나간다.

속밭 벤치 맞은편에서 눈에 띄던 세 명이다. 외모는 한국인인데 영어로 대화하고 있었다. 남자의 오른쪽 신발끈이 풀린 채 서두르는 발길을 멈춰보려고 말을 불쑥 던졌다.

"신발끈이 풀렸어요."

남자는 못 들었는지 그냥 간다.

"저기요. 신발끈이 풀렸다고요. " 

조금 더 볼륨을 높여서 말을 건넸다.

"아 예 괜찮아요."

그냥 간다. (이런, 얄미운 사람)

신나게 걷는 아이들의 걸음을 멈추고 싶지 않은 모양이다.

(왕년의 박격포 사수라고

아이언맨이라는 별명을 들은 지 몇 년도 안 되었다고)

외쳐봐야 오늘의 저질 체력이 누구 탓이겠는가.

나이 탓은 절대 아니라고 생각했다. 아직 그 정도는 아니다.

조금 방심했다. 활동량이 줄었고 체중이 늘었다.

일상생활에 불편이 없었기에 모른 척했던 체력이 등산에서 일치감치 바닥을 드러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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