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시인의 정원 Dec 28. 2024

구름 위를 걷다 2

겨울산 한라

등산한 지 3일이 지나 이 글을 쓰는 오늘 12. 27. 에 관음사 코스에서 50대 남자가 심정지로 119가 구조하여 병원에 후송했으나 결국 운명했다. 사망자는 매번 50대 남자이다. 자신의 체력을 과신하거나 무리해서는 큰일 난다. 필자도 위기를 겪었으나 쉬엄쉬엄 페이스 조절을 충분히 했고 서둘지 않았다. 등산은 인생과 많이 닮아서 영감을 주지만 일반인에게 등산이 인생의 전부는 아니다.


겨울산의 하늘은 파란 물이 뚝뚝 떨어질 것처럼 짙었다. 나목들의 가지 사이로 가까워진 하늘이 숨결 따라 가슴을 적신다.


겨우살이들이 까치집 마냥 높이 달려 있었다. 빨간 열매들이 달려있어 새집과는 구별이 되었다.


주목나무들이 흩어져 있고 굴참나무들이 여전한 숲을 지나 구상나무가 하나 둘 보이기 시작한다.

진달래 밭이 가까워졌다.

좌우로 나무기둥에 밧줄이 연결되어 있었다.

나는 기꺼이 밧줄의 도움을 받았다. 내게는 전례 없는 일이었다.

자존심? 그딴 거는 일찌감치 던져버렸다.


속밭에서부터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던 대여섯의 젊은 남녀 무리가 앞에서 쉬고 있었다. 좁은 길이라 스치듯 지나야 한다.

힘들게 오르는 내 모습을 보았던 터라 그들이 불쑥 나를 보며 외친다.

"짜요!" " 짜요!" " 짜요!"

(뭘? 안 짠데, 아 중국인이구나! 힘내라고?) 짧은 순간 스쳐가는 생각들을 정리한다.

나는 유창한 중국어로 대답해 주었다.

"니하오!" " 중궈?"

"타이완" " 유 캔 퍼스트!"

"땡큐 쏘 마취!" " 짜요."

그들을 지나치며 다중 언어를 쓰는 글로벌 중년이 되었다(후훗). 대화를 이어갈  체력은 아껴야 한다. 빠른 걸음으로 뒤돌아 보지 않고 줄행낭 쳤다(메이여우).

그들의 기억에 인텔리 한 한국 아재로 남아 있길 바라면서.

 

 속에 파묻힌 털진달래는 등산로 가에 몇 개만이 보였다.

쉼터가 보이기 시작했다.

'저기 몇 걸음만 더 가서 숨 돌리자.' ' 조금만 더 가자'는 마음으로 진달래밭 쉼터까지 이르렀으니 더욱 반가웠다.

진달래 밭 쉼터에서 간식으로 힘을 보충했다.

정상까지 2.3km가 았다. 한 시간 반 정도의 거리다.

정상 통제시간인 11:30 보다 1시간 진달래 밭 쉼터에 도착했으니, 천천히 가도 정상에 갈 수는 있을 것이다.

문제는 체력이다. 

구상나무 군락지를 지나면 계단만 있는 급경사를 올라야 한다.

꼭 정상을 가야 하는 것은 아니다. 여기까지 온 것도 끈기와 인내로 한 발 한 발 왔으니 가다가 안 되겠으면 멈추면 된다. 하산할 힘도 필요하니 욕심만으로 결정할 수는 없다. 일단 더 가보자.


계단은 눈 덮인 구상나무 숲 사이로 나 있었다. 나무로는 최상급의 귀티가 나는 구상나무 잎과 잔가지에 작은 고드름들이 열려 있었다.


그들은 눈과 바람과 얼음의 계절을 묵묵히 견디고 있었다.

키 큰 굴참나무들이 사라졌다. 이제 구상나무 설원의 숲으로 들어간다. 해발 1700m~1900m에 펼쳐지는 장관이다. 지난밤 선글라스를 챙겨 놓고도 안 가져온 덕분에 안경만 쓰고 원색의 설경을 보았다.

구상나무 숲을 지나 계단이 보인다. 경사도 45도로 느껴지는 마지막 관문이다.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계단을 오르기 시작하면서 돌풍이 불었다.

늘 바람이 세서 구상나무가 없는 구간일 것이다.

털모자를 꺼내 썼다.

밧줄과 기둥을 붙잡고 한 걸음씩 내디뎠다. 허리 아래로 끌어올리는 다리가 쇠덩이 같다. 종아리와 허벅지뿐만 아니라 무릎까지 아프다. 정상 찍고 내려오는 묘령의 여인이 나를 유심히 내려다보며 지나간다. 머플러 위로 큰 눈들이 나를 집중해 본다. 순간 조금 당황스럽다. 예전에 알던 사람일까? 알쏭달쏭한 눈빛으로 지나친다.

밧줄에 매달리다시피 한 걸음씩 내딛는 중년 남자는 처음 보았을 게다. 영화 찍는 배우도 아닌데. 


비탈 계단을 오르다 뒤를 보니 저만치 구름이 발아래에 있다.


정상에 가까이 다가설수록 바람은 거세졌다. 제트기류는 아닐 텐데 초속 25m는 거뜬히 넘을 것 같다.


먼저 도착한 사람들이 줄지어 서 있다.

백록담 표지목에서 기념사진을 찍으려 하는 사람들 뒤에 가만히 다가섰다.

어느 때보다 힘들었지만 정상까지 오르다니.

기쁜 마음에 어찌 내려갈는지는 잊어버렸다.


느려도 쉬어가도 멈추지 않으니 정상에 이르렀다. 청년들과의 시간차이도 그리 크지 않았다.


백록담을 내려다보니 눈 덮인 분화구에는 더 거친 바람이 가득했다. 겨우내 눈과 바람으로 덮여 있을 것이다.

따스한 봄바람이 불어 눈이 녹고 새 풀이 돋는 것은 까마득하지만 지금 이 순간은 설원의 백록담이 좋다.

손도 시리고 뺨이 얼얼하여 말이 둔해졌다.


넓은 데크에 제각기 앉아서 점심 요기를 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말수가 별로 없었다. 나름대로 생각들이 많을 것이다. 성취감도 내려놓음도 희망도 추위와 백록담 표지목 아래 단단히 다져지고 있었다.


보온병에 담아 온 따뜻한 물을 컵라면에 부었다. 라면은 설익었다. 뽀글이 같은 라면을 먹어도 그런대로 괜찮았다. 남은 국물을 보온병에 담았다.


"사장님"

급하게 부르는 소리에 돌아보니 모르는 청년이 데크에 앉아서 쳐다보고 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