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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 위를 걷다 3

겨울산 한라에 오르다

by 시인의 정원

"사장님"


돌아보니 앉아서 쳐다보는 낯선 청년이다.

"아, 여기요"

나는 얼른 등산용 스틱 2개를 내밀었다.

스틱을 받아 든 청년은 별말 없이 고개를 돌렸다.


컵라면을 먹고 자리를 치운 뒤 일어서니 데크 빈자리에 스틱 두 개가 놓여 있었다. 주위에 아무도 없다.

누가 잊어버리고 갔을까?

이걸 다시 가지러 올라오지는 않을 텐데 여기 놔두면 쓰레기가 되거나 다른 사람이 가져가겠지.

주인이 없다면 쓸 수도 있겠다.

하산길이 힘은 덜 들어도 체중이 앞으로 쏠리기에 낙상하거나 발목을 삘 수도 있다. 스틱은 가져 올 생각지도 않았다. 저질 체력 덕분에 등산을 어렵게 했다. 눈앞에 누군가 두고 갔을 스틱은 천사가 떨어뜨린 게 아닐까? 이런 생각들을 했다. 어느새 내 손에는 스틱이 들려 있었고 곧이어 뒤에서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린 것이다.

눈빛을 보니 자기 것이라고 강하게 어필했다.

나는 0.1초 만에 스틱을 돌려주었다. 그의 것이든 아니든 잠시 탐냈던 부끄러움에 얼굴이 화끈거렸다.


'이제 내려가자.'


아무리 아름다워도 산 정상에 오래 머물 수는 없다. 내려가는 시간과 해 지는 시간을 어림잡아서 여유 있게 가야 한다. 산 위에서는 해가 일찍 지고, 더구나 동지가 지난 지 며칠 안된 낮이 가장 짧은 시기 아닌가.

하산길에 부상 같은 변수도 있고.


밧줄을 잡고 내려가는데 뒤늦게 오르는 사람들이 아직도 꽤나 있다. 이번은 한라산을 가장 힘들게 올랐다. 다른 이들도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높은 산을 등산하듯 다들 그렇게 버티고 인내하고 희망을 일구며 사는 것이리라.


백록담에서 하산 길

하산길은 훨씬 수월했다. 다리도 덜 아팠고 미끄러지거나 발목만 조심하면 될 것이다. 가뿐히 진달래 밭 쉼터에 이르렀다. 안내소에서 해가 짧으니 서둘러 하산하라고 몇 번씩 방송을 한다. 화장실에 들렀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들러주는 게 좋다. 눈 쌓인 등산로에서 갑자기 볼 일이 생기면 정말 난처하다. 다른 사람이 안 보이다가도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 온다. 등산로를 벗어날 수도 없다. 등산로를 벗어나면 눈 속에 허벅지까지 빠진다. 눈 속에 깊은 구덩이가 있어서 조난당할 수도 있다.


진달래 밭에서 속밭에 이르기까지 오를 때보다 두 배의 속도로 빠르게 내려왔다. 힘이 덜드니 생각도 덜하다. 약간의 여유가 생겼다. 속밭에서 잠시 쉬었다. 이제 남은 구간이 4km이고 완만한 경사이니 큰 어려움은 없을 것이다.

뒤에 누군가 따라오는 발소리가 규칙적으로 들렸다. 것이다.

길이 조금 넓어지면 앞지르기할 듯이 발자국 소리가 바짝 다가온다.

그때였다.


"포롱 뽀로롱 뽕 뽀보봉"

휘파람새는 아직 올 때가 아닌데...


생각지도 않았던 가스 분출이 연발로 있었다.

이건 절대 고의가 아니었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발생하였다.

뒤에 따르던 발소리가 뚝 끊어졌다.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뒤돌아 보며 사과하기도

민망하여 말없이 계속 걸었다. 다시는 발걸음소리가 가까이 들리지 않았다.

sticker sticker


다시 삼나무 숲을 지난다.

해가 곧게 뻗은 삼나무 줄기를 타고 내려오고 있다. 어둡기 전에는 입구에 도착할 것이다.

발걸음을 재촉하여 내려간다.


앞에 어린 소년과 엄마가 대화하며 걷고 있다. 사랑스러운 모습이다. 주머니 안에서 쵸코과자 한 봉지가 '나 여기 있다'라고 꿈틀거린다. 마지막 비상식량이다.

길이 조금 넓어지는 틈을 타서 앞지르기한다.

예의 바른 소년의 엄마는 길을 비켜준다.

몇 학년이니? 말을 건네는 손에 쵸코과자가 들려 있었다. 수줍어하는 아들 대신 엄마가 대답한다. 2학년이에요. "고맙습니다."

소년은 미소 지으며 받는다.

"감사합니다" 엄마도 미소를 짓는다.

의심 없이 받아 주는 모자가 고맙다.

발걸음이 상쾌하다.


대략 30분만 더 걸으면 오늘의 등산은 마친다. 지루한 길이 이어지지만 긴장을 놓으면 아니 된다. 다 마쳐야 마친 것이다.


입구가 보인다. 다 왔다.

휴게실에 들어가려는데 긴장이 풀려서 인지 걸음걸이가 심상치 않다. 아장아장 아기 걸음이다. 종아리, 허벅지는 물론, 고관절까지 아프다.

주차장이 만차라서 차를 세우지 못하고 마방목장 넓은 주차장에 세웠기에 버스를 타고 이동한다.


관리실에서는 백록담 표지목 사진을 보여주면 등반 인증서를 프린트해 준다.


그래서 어느 코스로 갔냐고요?

다녀오신 분들은 이미 아시겠지만

성판악 코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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