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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몬밤 이야기

경계인으로 섬에 살다

by 시인의 정원

제주에 오기 전 용인에 살 때였다. 레몬밤 포트를 구해서 난생처음 식물집사가 되었다. 오전 햇빛이 살짝 스치고 가는 빌라 창턱에 포트를 두었다. 매일 정성 들여 물을 주었다. 일주일간 매일 살펴보면서 물을 주니 잘 자라는 것 같았다.

열흘이 지나자 작은 포트에 심긴 레몬밤은 시들기 시작했다. 대체 왜 시드는지 알 수 없었다. 지금처럼 휴대폰으로 검색만 하면 전문지식까지 바로 검색할 수 있는 때가 아니었다. 식물 관련 책을 사 볼 정도로 식물 덕후도 아니었다. 우연히 눈에 띈 식물이었고, 한 번 길러보자는 생각뿐이었다. 이 주일이 되기 전에 레몬밤은 죽고 말았다. 이유도 모른 채.


제주에 이주 했다. 1999년 시월의 어느 날, 가을이 무르익어가던 때였다. 오랫동안 휴경하여 예전에 밭이었다는 흔적만 남은 땅을 개간하였다. 바닷가 작은 마을의 해안으로부터 걸어서 10분 거리였다. 집 주변에 무성한 풀을 뽑고 허브를 심었다. 오일장에서 로즈메리와 레몬밤 포트를 샀다. 땅에 심는 일은 처음이었다. 30대 중반의 청년 가족이 시골 외딴집에서 일구는 첫 경작이었다. 허브 책을 구입하여 펼쳐보며 삽목 하여 번식하는 방법을 배웠다. 로즈메리와 레몬밤은 잘 자라고 삽목으로 번식한 개체도 거의 다 살았다. 레몬밤은 희고 작은 꽃들이 허다하게 피었는데 꽃이 지고 맺힌 씨가 떨어져 발아하였다. 바람에 씨가 날려 정원 곳곳에 퍼진 레몬밤으로 풀처럼 흔하게 되었다.


용인에서 키우다 죽은 레몬밤은 환경이 안 맞았고, 물을 너무 자주 주어서 실패하였다. 제주에서 땅에 심은 것은 충분한 일조량과 비와 온도가 잘 맞았으므로 마음껏 번식한 것이다.


내게 맞지 않는 환경이라는 판단이 서면 맞는 환경을 찾아가는 것이 좋다. 물론 최대한 노력해 보고 충분히 사려 깊은 생각과 방향을 설정한 뒤에. 인내해야 하는 과정인지, 의미 없는 소모인지 판단하는 것도 쉽지 않다. 이성보다 감정이 앞서기 때문이다.


제주살이 25년이다. 육지 것이라고 대놓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제주 토박이들은 낯선 이방인을 대하듯 경계심과 적의마저 품고 살피곤 했다. 여행지와 삶의 터전은 근본적으로 다를 수밖에 없다. 여행자들은 가끔 묻는다. 이렇게 아름다운 곳에서 살면 어때요? 얼마나 좋을까. 행복할까. 하는 질문이다. 풍경이 생활을 좌우하지는 않는다. 아름다운 풍경이나 장면들을 자주 접한다. 맑은 공기와 변화무쌍한 날씨와 이국적인 섬의 조건들이 만들어 내는 경치다. 익숙해지면 감흥이 떨어지는 게 인지상정이다. 첫 느낌이 아무리 좋아도 1년이면 무덤덤해지는 것과 같은 이치일 것이다.


육지인도 도인(섬사람)도 아닌 경계인으로 사는 게 익숙해졌다.

오늘은 섬의 경계선에 가 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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