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고려 나전칠기와 고대 신라 금관의 역사

세계 정상회담에 등장한 중세 시대의 고려 나전칠기와 고대 신라 금관 역사

by 바다의 지정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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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대 시대인 신라 시대의 금관의 역사


고대 신라(기원전 57~기원후 935년)의 금관은 고대 시대인 5~6세기 마립간(麻立干) 시대에 집중적으로 나타나는 화려한 금관이었다.


이 신라 금관은 상시 착용하거나 전쟁, 군사 훈련, 행군 시에 착용하던 금관은 아니었다. 이는 최고의 종교적 의례(제사)나 장례식 때만 사용된 '상징적 예물(禮物)'이었다.


삼국시대~후삼국시대, 고려시대는 국왕들이 전부 전쟁터에 직접 선두에 나서서 싸웠는데 이런 시대에 신라 국왕들이 금관을 전쟁 때 착용하지 않은 이유는 전술적 불리함 때문이었다. 금관은 높이가 수십 센티미터에 달하고(경주 천마총 금관 약 32.5cm), 수많은 금판과 굽은 옥(곡옥)이 매달려 있다. 게다가 화려하지만 무겁고 격렬한 움직임이 불가능하며, 흔들리는 장식은 시야를 가린다. 수백 개의 장식이 부딪히며 엄청난 소음을 발생시킨다. 게다가 햇빛 아래서 수백 미터 밖에서도 빛나는 '황금 표적'이 된다. 적군에게 "나를 사살하라"라고 광고하는 셈이다. 애초에 동서고금하고 왕관을 쓰고 전쟁에 나서는 국왕은 없었다.


게다가 당시 국왕과 장군들은 실제 군사 장비로 전투 시 철로 만든 투구(철제 투구)와 갑옷(철갑옷)을 착용했다. 이는 실전용 방어구이며 금관과는 용도가 완전히 다르다.


만약 착용했다면 전쟁 승리 후의 개선식이나 점령지에서의 선포식 등, 모든 전투가 끝난 "이후"의 정치적 행사였을 것다.


2. "신라와 스키타이, 시베리아" 문화와의 연결


신라 금관이 왜 그런 형태를 하고 있으며, 왜 의례용인지는 당시의 세계사를 통해 알 수 있다.


유라시아 스텝(Steppe) 루트를 통한 고대 신라 금관의 디자인(나무와 사슴뿔 모양의 "출(出)"자 장식, 동물 문양)은 동시대 중국(한족 문화)과는 다른 매우 이질적이다.


이 디자인의 원류는 기원전 중앙아시아와 시베리아 초원 지대를 지배했던 기마 유목 민족 "스키타이"의 금 공예 문화와 직접적으로 연결된다. 스키타이를 비롯한 유라시아 유목 민족에게 "나무"는 하늘과 땅을 잇는 "신성한 나무(신수神樹)" 또는 "세계수"를 상징했다. 사슴 역시 하늘의 신을 모시는 신성한 동물이었다.


신라의 국왕, 즉 "마립간"은 단순한 정치 지도자가 아니라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대(大)샤먼"이자 "제사장" 즉 "샤먼 킹(Shaman King)"이었다. 신라 금관은 마립간이 하늘의 뜻을 지상에 전하는 "신수" 그 자체를 머리에 형상화한 것이다.


이 스키타이의 시베리아 문화가 어떻게 한반도 끝 신라까지 전해졌을까? 이는 세계사적인 "스키타이 민족의 대이동"과 "전쟁"의 결과다. 당시 로마제국, 고대 중국 한나라보다도 훨씬 군사력이 막강한 대제국을 건설한 흉노(匈奴)제국, 선비(鮮卑)제국 등 북방 유목 대제국들이 기후 변화와 전쟁으로 인해 연쇄적으로 남하하거나 동쪽으로 정복했고 이 과정에서 그들의 문화(철제 무기, 금 공예 기술, 동물 문양 샤머니즘)가 한반도를 거쳐 신라의 지배층 문화에 깊숙이 스며든 것이다.


3. 금관의 실제 용도


신라 금관은 죽은 왕을 위한 장례용품(부장품)이거나 살아서 착용했다면 1년에 몇 번 없는 가장 중요한 국가 제사(하늘에 풍년을 기원하는 제사) 때 국왕이 제사장(샤먼)의 자격으로 신과 소통하기 위해 착용한 "신성한 안테나"였다.


이는 세계사적 중앙아시아계 유목 문화의 흐름이 전쟁과 대이주를 통해 신라에 도달했음을 보여주는 증거이며, 오직 "군사적 상징"과 "권위"를 위한 최고의 의례용품이었다.







4. 중세 시대인 고려 시대의 나전칠기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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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시대인 고려 시대(918~1392년)의 나전칠기, 특히 원형 쟁반(圓盤)은 당대 최고의 사치품이자 고려의 기술력과 금속 제련술을 집약한 "소프트 파워"의 상징이었다..


고려의 나전칠기는 단순히 자개를 붙이는 수준이 아니었습니다. 극도로 세밀한 세공 기술력의 상징으로, 전복이나 조개껍데기(자개)를 종이보다 얇게 갈아내어(수백 분의 1 밀리미터) 실처럼 가늘게 자르거나(절패법), 일일이 손으로 문양을 오려냈다(주름질).


이후에는 복잡한 공정 작업을 거쳐, 수십 번 옻칠을 하고 말리는 과정을 반복하며, 그 사이에 머리카락 굵기의 자개와 얇은 금속선(동선, 은선)을 함께 박아 넣었다. 이렇게 완성된 칠기는 수백 년이 지나도 변치 않는 견고함과 내구성과 빛의 각도에 따라 영롱하게 빛나는 화려함을 동시에 지녔다.


2. 당시 세계 해양 무역의 기반인 송(宋)나라와의 "무역 전쟁" 속핵심 수출품


중세 시대 세계사의 무역 중심축 중 하나는 중국 송나라였다. 고려는 이 송나라와 밀접한 관계를 맺으며 해상력, 해군력, 해운력이 발전하며 국제 무대에서 활약했다.


그러던 중에 세계 질서, 세계 정세가 완전히 뒤바뀌게 돼는 대사건이 발발하는데.. 10~11세기 북방의 거란제국(遼), 금(金)나라 등 '정복 국가'(전쟁으로 세워진 제국)들이 중국 북부를 정복하자, 남쪽으로 밀려난 송(특히 남송)나라의 육상 실크로드가 막혔다. 송나라는 제국의 존속과 생존을 위해 해상 무역에 제국의 총력을 걸었다.


이러한 세계 정세 속에 중동의 아랍과 이란, 고려는 이 해상 무역의 핵심 파트너국 중 하나였다. 고려의 수도 개경 근처의 벽란도는 당시 세계 최대의 국제 무역항 중 하나였다. 송나라의 무역 상인들은 고려의 나전칠기, 인삼, 종이(고려지) 등을 갖기 위해 고려를 끊임없이 진출했다. 특히 고려 나전칠기는 송나라 황제와 귀족 사회에서 부와 권위의 상징품 중 하나였다. 중국 송나라 사신 서긍(徐兢)이 쓴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에는 "고려의 나전칠기 기술이 매우 세밀하여 가히 귀하다(螺鈿之工 細密可貴)"고 극찬한 기록이 있다.


즉, 고려의 나전칠기 쟁반은 금나라 군대의 중국 대륙 정복과 남하 정복 정책으로 인해 재편된 세계 무역 질서(해상 무역의 부상) 속에서 고려가 무역적 지위를 지키는 핵심 전략 물자이자 외교적 무기였다.


3. 고려 나전칠기의 위기


이렇게 국제적으로 잘 나가던 고려의 나전칠기의 역사는 두 번의 대사건으로 인해 그 운명이 갈린다.


세계 최강의 패권국가 대원제국의 고려 정복(13세기): 30여 년간 이어진 대원제국의 고려 정복전쟁은 고려 전역을 완전히 초토화하고 파괴했다. 이 침략전쟁으로 인해 나전칠기를 만들던 장인들은 모두 죽거나 고려에서 출국했고, 고려의 모든 생산 기반 자체가 파괴당해 무너졌다. 그리하여 고려 나전칠기 기술의 "단절" 혹은 "쇠퇴"가 시작된 것이다.


세계 패권시대 팍스 몽골리카(Pax Mongolica)와 기술 이전: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고려가 세계 패권국가인 대원제국의 식민지로 전락한 후 "팍스 몽골리카"라는 세계 패권기의 세계망에 강제 편입되었다. 고려의 장인들이 대원제국의 군사적 수도(대도, 현 베이징)로 강제 징발되어 갔고, 여기서 고려의 기술자들은 대원제국의 귀족의 공방을 위해 희생해야 됐다.


왜구(倭寇)의 침략(14세기 말): 고려 말, 왜구의 노략질은 극심했다. 이들은 단순한 해적이 아니라, 남북조로 분열된 일본의 군사 조직이 가세한 "준군사조직"이었다. 이들의 주된 해안 침략 루트는 해안가였고, 나전칠기의 주재료인 전복 등을 채취하고 생산하던 남해안과 서해안 일대가 초토화되었다. 이는 고려 나전칠기 기술의 쇠퇴를 가속화하고, 조선 초기의 기술 단절로 이어지는 결정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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