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정복자인 칭기스칸의 후손인 티무르가 세운 몽골계 티무르 제국은 선조인 칭기스칸의 군사 전법을 공부하여 어마어마한 정복전쟁들을 개시했고 그 결과 티무르 제국은 오스만 제국, 맘루크 왕조, 남아시아의 인도까지 모조리 다 정복하면서 자신이 칭기스칸의 진정한 후손이라는 걸 만천하에 떨치고 세계 패권국으로 이름을 날렸다.
하지만 이 세기의 대정복자인 티무르는 명나라 정벌에 나서다가 결국 급사하면서 티무르 제국은 순식간에 몰락한다. 몽골계 제국들은 군사력은 세계 최강이라는 강점이 있지만, 워낙 내전과 군사 쿠데타, 암살이 심해서 분열로 인해 제국의 존속 기간이 짧다는 단점이 있다는 것이 치명적이었다. 티무르 제국도 이런 몽골계 제국의 장, 단점을 그대로 이어받았던 것이다.
티무르 제국이 가지고 있던 세계 패권은 티무르 제국이 쇠락하면서, 그리고 티무르 제국의 지배를 받던 오스만 제국과 맘루크 왕조는 그 후에 호랑이가 없는 굴에 늑대와 여우가 기승을 부리듯 서로가 이슬람의 진정한 패권국이라며 치고 박고 싸우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오스만 제국과 맘루크 왕조는 서로를 멸망시켜야만 직성이 풀리는 라이벌이었다. 일부 학자들은 이때문에 한때 유럽보다 군사력, 기술력, 경제력이 막강했던 동양의 초강대국인 오스만 제국이 결국 서구에게 뒤쳐지게 되었다고 지적한다.
초기 오스만 제국은 세계 패권국인 몽골제국의 식민 통치를 받았고, 그 후에는 몽골계 티무르 제국에게 또 다시 패배하였다. 그러다가 몽골제국과 티무르 제국의 식민 지배에서 해방된 오스만 제국은 그 이후로 동로마 제국을 멸망시키는 등 위력을 과시하면서 유럽을 압도하여 세계 패권국으로 군림할 수 있었으나, 그후 곧바로 맘루크 왕조와의 치열한 경쟁, 그후에는 러시아 제국과의 계속된 전쟁에 빠져서 대항해시대 때 스페인 왕국이나 포르투갈 왕국이나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남반구의 신대륙을 발견하여 경제 발전을 할 동안 오히려 수많은 전쟁들로 경제력을 소모시켰고 결국 그로 인해 근대시대에 들어서는 기존의 초강대국이었으나 똑같이 몰락한 청나라와 함께 병자 취급을 받았던 것이다.
ㄴ) 맘루크 왕조의 영향력
맘루크 왕조는 굉장히 군사력, 기술력, 경제력, 그리고 영향력이 막강했다. 특히 대항해시대의 황금기 시절인 스페인 왕국에게까지 영향력을 행사했을 정도였다. 물론 전면적인 전쟁보다는 고도의 외교전과 대리전 양상을 띠었지만 말이다.
그라나다 함락(1492)년에, 이베리아 반도의 스페인 왕국과 포르투갈 왕국을 800년간 식민 지배했던 무슬림들을 내쫓는 레꽁끼스따가 완료되자, 쫓겨난 무슬림들이 맘루크 술탄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이에 맘루크의 술탄 카이트베이(Qaitbay)는 스페인 왕국에 사절을 보내 "그라나다의 무슬림을 탄압하면, 맘루크 영토 내의 기독교 성지와 수도원을 파괴하겠다"고 협박했다. 이는 스페인 왕실(이사벨과 페르난도)을 긴장하게 만들었고, 스페인 왕국은 유명한 인문학자인 "피터 마터(Peter Martyr)"를 특사로 파견해 유화책을 쓰면서 맘루크 왕조를 달랠 정도로 맘루크 왕조는 스페인 왕국과의 외교전에서 압박으로 "승리"했다.
물론 이를 무력 충돌 승리로 볼 수는 없으나, 외교적 기싸움에서 맘루크 왕조가 주도권을 쥐고 위협하여 스페인 왕국을 협상 테이블로 끌어내어 승리한 것은 일종의 정치적, 외교적 승리로 해석할 수 있다.
ㄷ) 인도양의 패권을 둔 맘루크 왕조vs포르투갈 왕국의 충돌
15세기 후엽~ 16세기 초엽쯤, 오스만 제국과 이슬람 세계의 수호자 자리를 놓고 경쟁하던 이집트의 "부르지 맘루크 왕조"는 중대한 도전에 직면했다. 수백 년간 홍해와 지중해를 잇는 중계 무역으로 막대한 부를 누려왔던 맘루크 왕조 앞에, 아프리카 희망봉을 돌아 인도양에 나타난 포르투갈 왕국이라는 새로운 적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단순한 장사치 집단이 아니었다. 화기와 갤리온선을 타고 돌아다닌 "물의 양아치"들이었으며, 맘루크 왕조의 상선들을 노략하고 인도양 교역 루트를 독점하려 했다. 이에 맘루크 왕조는 밥그릇을 걸고 이들과 맞서 싸우게 된다.
당시 유럽으로 들어가는 후추, 정향 등 향신료는 해상으로는 "인도나 동남아시아~아라비아해~홍해~이집트(맘루크)~베네치아~유럽"의 경로를 거쳤다. 맘루크 왕조는 이 관세를 통해 국가 재정의 대부분을 충당했다.
그런데 약 1498년쯤 빠스꼬 다 가마가 인도 항로에 들어온 이후, 포르투갈 왕국은 이슬람 상인들이 독점하던 이 인도양 교역을 배제하고 직접 자기들이 교역을 하길 원했다. 물론 포르투갈 왕국으로서도 할 말이 많았는데 그간 경제적으로 굉장히 많은 피해를 입었기 때문이다. 판매자였던 인도나 동남아시아로부터 오는 귀한 향신료들을 중간에 맘루크 왕조의 상인들이 비싸게 값을 올려서 최종 구매자이자 소비자인 포르투갈 왕국이나 스페인 왕국에게 판매했는데, 맘루크 상인들이 부르는 대로 값이 정해졌기에 포르투갈이나 스페인 왕국은 갑질아닌 갑질을 받아야했다.
그래서 이에 판매자(인도나 동남아시아)와 구매자(포르투갈 왕국이나 스페인 왕국)가 중간에 상인(오스만 제국, 맘루크 왕조) 등을 거치지 않고, 직접 서로 거래하는 "직거래 행위(교역)"를 하고 싶다고 포르투갈 왕국이 배를 타고 온 것인 셈이다. 하지만 이렇게 그간 국가 재정의 대부분을 충당하던 중간 교역에서 맘루크 왕조가 빠지게 되면 맘루크 왕조가 아예 국가 자체가 붕괴할 수도 있는 심각한 상황이었다.
게다가 포르투갈 왕국의 함대는 인도양에서 아랍 상선들을 붙잡고, 메카로 가는 순례선까지 노렸다. 이는 단순한 교역 경쟁을 넘어 종교 싸움(성전)의 성격까지 띠게 만들었다.
당시 맘루크 왕조 술탄 "알 아슈라프 칸수 알 구리"는 처음에는 외교적 해결을 시도했다. 일단 자기들은 오스만 제국과 경쟁하고 있지 포르투갈 왕국과 경쟁하진 않았기 때문이고, 스페인 왕국을 협박해서 외교전에서 승리한 경험도 있고 말이다. 그래서 교황청에 서찰(書札)을 보내 "포르투갈 왕국이 인도양에서의 도발을 멈추지 않으면 예루살렘의 기독교 성지를 파괴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지만, 포르투갈 왕국은 이를 무시했다. 결국 술탄은 무력 대응을 결심하고 함대 건조를 지시한다.
하지만 문제는 맘루크 제국은 전형적인 대륙 세력이었기에 육군에서는 스페인, 포르투갈보다 훨씬 강력했으나, 수군 강국은 아니었다. 그들의 배는 조선군의 판옥선처럼 대양 항해보다는 홍해나 지중해 연안 항해에 적합했고, 포르투갈 왕국의 거대한 카락(Carrack)선과 화기에 비해 화력이 열세였다.
하지만 동양의 오스만 제국이 아니라, 뜻밖에 유럽에서 맘루크 왕조를 지원하는 국가가 나타났다. 포르투갈 왕국이 향신료 교역을 독점하면 가장 큰 경제적 타격을 입는 유럽 국가인 베네치아였던 것이다. 세계 패권국이었던 당나라가 이슬람 제국을 정복하려 할때 "카를루크"가 배신을 한 것처럼, 유럽 국가들 중에 포르투갈 왕국을 배신한 배신자가 나타난 것이다. 이렇게 기독교 국가였던 베네치아는 비밀리에 이슬람 국가인 맘루크 제국을 지원한다.
베네치아는 알렉산드리아로 목재, 화기 주조 장인, 선박 건조 장인들을 파견하면서 지원했다. 이렇게 수에즈에서 베네치아의 장인의 지원과 맘루크 왕조의 자본으로 새로운 함대가 건조되었다.
그리고 맘루크 술탄은 용맹한 수군 장수인 "아미르 후세인 알 쿠르디(Amir Husain Al-Kurdi)"를 장수로 부임시켰다. 그가 할 일은 단 하나, "포르투갈 세력을 인도양에서 침몰시키는 것"이었다.
ㄹ) 맘루크 왕조가 포르투갈 왕국을 상대로 거둔 가장 명확하고 거대한 대승리
1507년경, 맘루크의 장수 아미르 후세인이 이끄는 맘루크 선박은 홍해를 빠져나와 인도로 향했다. 이들은 인도의 토착 세력인 "구자라트 술탄국(Sultanate of Gujarat)" 및 "캘리컷의 자모린(Zamorin of Calicut)"과도 연합했다.
당시 포르투갈 왕국의 인도 최남쪽의 부왕 쁘란시스꾸 드 알메이다(Francisco de Almeida)의 아들인 "로렌쑤 드 알메이다(Lourenço de Almeida)"는 선박을 데리고 순찰 중이었다.
그리고 1508년 3월(또는 1월로 기록되기도 함)에 맘루크 왕조의 장수 아미르 후세인과 구자라트 술탄국의 장수 말릭 아야즈와 캘리컷 수군은 인도 서부 차울(Chaul) 항구에 정박해 있던 로렌쑤 드 알메이다의 선박를 급습했다.
구자라트의 장수인 말릭 아야즈는 좁은 수로와 조류를 완벽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그리고 베네치아 기술로 개량된 맘루크 선박의 대포가 불을 뿜었다. 포르투갈 선박은 맘루크 수군이 이렇게 강력한 화력을 가졌을 것이라 예상치 못했고, 맘루크 졸병들은 배를 포르투갈 선박에 붙여 전합 접근을 하여 백병전을 벌였다. 포르투갈군이나 스페인군은 원거리전에는 강했으나 백병전에는 매우 약한 군대였다. 그래서 육상전에서 강했던 맘루크 병졸들은 승기를 잡아 갑판 위에서도 압도적으로 포르투갈군들을 도륙하기 시작했다.
결국 이 날, 포르투갈 왕국의 장수인 로렌쑤 드 알메이다의 선박들은 집중 포화를 맞아 부서지고, 다리에 포탄을 맞은 로렌쑤는 의자에 묶인 채로 끝까지 지시를 계속했으나 결국 두 번째 포탄을 맞고 죽었다. 장수를 잃은 포르투갈 선박은 궤멸적인 피해를 입고 패주했고 포르투갈 왕국의 거의 모든 주력선이 침몰하거나 나포되었고, 140명 이상의 포르투갈 정예 병사들이 사망했다.
이 승리로 인해 인도양의 무슬림 상인들은 환호했고, 맘루크 왕조의 위신은 드높아졌다. 그리고 맘루크 왕조의 병졸들은 포르투갈 포로들을 카이로로 압송하여 승전 연회를 벌였다.
하지만 맘루크 왕조는 1517년 리다니야 싸움에서 오스만 돌궐의 셀림 1세에 의해 정벌당해 사실상 조공국으로 전락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