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데기의 역사: 조선시대까지는 먹지 않았다.

의외로 역사가 길지 않은 근현대사의 산물

by 바다의 역사



예를 들면 타임머신이 존재해서 대한민국 사람이 조선으로 되돌아 가서 번데기를 먹는다면


조선인은 분명히 그 대한민국 사람을 쳐다보며 혐오스러운 표정으로


"도대체 자네는 벌레를 왜 먹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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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면서 소리를 지를지도 모른다. 그렇다. 번데기는 사실상 조선시대까지는 존재하지 않았던 음식이다. 애초에 조선시대까지는 곤충을 먹는다는 개념 자체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조선시대까지는 곤충을 먹지 않았고, 번데기나 메뚜기구이란 게 없었는데 대한민국의 근현대 시절에는 어째서 생겨났으며, 그리고 지금은 왜 다시 사람들이 안먹고 있을까? 그에 관해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21세기의 현대인의 길거리 음식 문화를 대표하는 "번데기"는 겉보기에는 그 역사가 매우 짧은데 이제는 다시 먹는 사람들이 줄어들고 있다. 당연한 현상이다. 원래 한민족이 먹는 음식이 아닐뿐더러 남북전쟁이란 특수 상황에서 먹을 게 없으면서 생겨난 일시적 현상이기 때문이다.


번데기의 역사는 반세기가 채 되지 않는다. 번데기는 유구한 전통의 산물이 아니라 1960년대 대한민국 정부의 경제 개발 계획과 양잠(養蠶) 산업의 육성, 그리고 전후 빈곤이라는 시대적 상황이 맞물려 탄생한 "현대사의 발명품"이다.


번데기가 현대인의 식탁(정확히는 길거리)에 최초로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은 1960년대 박정희 정부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1960년대 초 대한민국은 자본 경제력이 부족했다. 정부는 외화 획득을 위해 노동 집약적 경공업과 농가 부업을 장려했는데 그 핵심 중 하나가 "양잠업(Sericulture)"이었다.


정부는 "잠업증산 5개년 계획(1962~1966)"을 수립하여 농촌에 뽕나무 심기와 누에치기를 적극 장려했다. 한국산 생사(Raw Silk)는 품질이 좋아 일본과 서구권으로 수출되는 주요 효자 상품이었다.


누에고치에서 실을 뽑는 과정을 조사(操絲)라고 한다. 고치를 뜨거운 물에 삶아 실을 풀어내면, 그 안에 있던 번데기는 실을 다 뽑아낸 후 남겨지는 "부산물"이자 "폐기물"이 된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발생하는데.. 양잠업이 국가적 산업으로 커지자 전국의 제사 공장(실 뽑는 공장)에서는 엄청난 양의 번데기들이 쏟아져 나왔다. 이를 단순히 버리기에는 처리 비용이 들고 환경 오염 우려가 있었다.


하지만 당시 대한민국은 전후 복구기로 여전히 식량 사정이 넉넉지 않았고 국민들의 영양소, 단백질 섭취가 부족해서 영양결핍에 시달리는 국민들이 넘쳐났다. 그래서 공장들은 버려지는 번데기가 고단백 영양덩어리라는 점에 착안했다. 이를 수거해 조미하고 삶아서 시장에 내다 팔기 시작한 것이 현대적 번데기 식용의 시초다.


즉, 번데기는 "전통의 맛"이 아니라 "산업화 시대의 효율성 추구"와 "단백질 결핍 해결"이라는 니즈가 결합된 결과물이다.


1970년대에 들어서며 번데기는 황금기를 맞이한다. 저렴한 가격과 함께.. 공장에서 대량으로 쏟아져 나오는 부산물이었기 때문에 서민들이 부담 없이 사 먹을 수 있었다. 짭조름하게 간장과 소금으로 간을 하여 솥에 삶아 파는 방식이 정착되어 종이 고깔(일명 "꼬깔")에 담아주는 방식은 당시 국민학교(현 초등학교) 앞의 상징적인 풍경이 되었다.

이 시기 번데기는 단순한 간식을 넘어 가난하지만 치열하게 살았던 산업화 세대의 허기를 채워주는 소울 푸드(Soul Food)로 자리 잡았다.


하지만 이런 번데기 역사에서 가장 비극적이고 중요한 변곡점은 약 1978년쯤에 발생한 대형 안전사고다. 번데기 집단 식중독(농약) 사망 사건은 당시 사회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으며 식품 위생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운 계기가 되었다.


약 1978년 9월쯤에 경기도 파주, 고양, 서울 등지에서 번데기를 사 먹은 어린이들이 집단으로 구토, 경련, 호흡곤란 증세를 보이며 쓰러졌고, 그중 다수가 사망하는 참사가 발생했던 것이다. 당시 언론 보도에 따르면 30여 명 이상의 어린이가 피해를 입었고 다수가 사망했다고 보고 있따.


초기에는 번데기 자체의 부패나 독성이 의심되었으나 경찰과 보건 당국의 역학 조사 결과 충격적인 사실이 밝혀졌다. 번데기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중간 도매상들이 제사 공장에서 나온 번데기를 유통하는 과정에서, 맹독성 농약인 "파라티온(Parathion)"이 담겼던 포대 자루를 세척하지 않고 번데기를 담는 용기로 재사용한 것이 이유였다.


누에는 농약에 매우 취약한 곤충이다. 뽕잎에 아주 미세한 농약만 묻어 있어도 누에는 즉사한다. 따라서 양잠 농가에서는 농약을 철저히 배제한다. 즉, 원료인 번데기 자체는 무공해였으나 유통 업자의 무지하고 비윤리적인 행태(농약 자루 재사용)가 참사를 부른 것이다.


이 사건으로 인해 번데기에 대한 공포감이 전국으로 확산되어 "번데기를 먹으면 죽는다"는 괴담이 돌면서 소비량은 수직 하락했다. 이 시절에 번데기뿐만 아니라 갯고둥(다슬기), 팥빙수, 냉차 등 당시 위생 관리가 취약했던 길거리 음식 전반에 대한 단속이 강화되었고, 소상공인들이 큰 타격을 입었다.


해당 유통업자들은 구속되었으며, 식품위생법과 유독물 관리에 대한 법규가 강화되는 계기가 되었지만 약 1980년대쯤 중엽 이후, 대한민국 경제가 고도 성장기에 접어들면서 노동 집약적 산업인 양잠업은 쇠퇴하기 시작했다. 게다가 인건비가 비싸지면서 뽕나무를 키우고 누에를 치는 농가가 급감했다.


그 결과 현재 번데기는 과거처럼 "단백질 보충을 위한 필수 간식"이 아니다. 이제는 "먹기 힘든 간식"으로 소비된다. 게다가 약 1970~80년대쯤에 기성세대에게는 향수를 자극하는 음식이지만 풍요로운 시대에 태어난 MZ세대 및 청소년들에게는 곤충의 모습 때문에 "혐오 식품"으로 분류되기도 하는 등 극명하게 갈린다.


그렇다면 전근대 시기(조선시대)까지 왜 조상들은 번데기 같은 곤충들을 일체 먹지 않았을까?


생각해보면 조선시대같이 가난한 국가에서 번데기나 곤충들을 먹었다는 기록과 흔적들은 일체 없다. 물론 조선시대 문헌에서도 누에(Silkworm)는 매우 중요한 곤충으로 다뤄지며, 일부 상업으로 이는 비단(Silk)을 얻기 위한 상업적 목적이나 한의학에서 "백강잠(白殭蠶)"이라 하여 약재로 쓰기는 했지만, "식재료(Foodstuff)"로 인식되지는 않았다.


가장 큰 이유는 우선 기후적 이유가 있는데, 곤충을 주 단백질원으로 삼는 문화권은 주로 아열대~열대 지방에 분포한다. 지구상에 보면 남아프리카, 라틴 아메리카, 남태평양의 폴리네시아, 동남아시아들이 이런 곤충을 주 단백질원으로 삼는 문화권이다.


그러나 사계절이 뚜렷하고 겨울이 혹독한 한반도의 기후 특성상 곤충은 연중 안정적으로 공급받을 수 있는 식량이 아니었다.


게다가 조선은 성리학을 통치 이념으로 하는 농본주의 국가였다. 농업(곡물)을 천하의 근본으로 삼았으며 정갈하고 조리된 음식만을 먹었다. 당시 조선인의 시각에서 곤충을 먹는 행위는 기근이 들었을 때나 하는 구황(救荒) 행위이거나, 문명화되지 않은 습속으로 간주되는 경향이 있었다.


실제로 "동의보감(東醫寶鑑)"등 의서에는 누에나 번데기의 약리적 효능이 기록되어 있으나, "산림경제"나 "음식디미방"같은 주요 조리서에서 번데기, 곤충을 이용한 "요리법"을 아예 없다.


게다가 누에는 뽕잎을 먹여 집안에서 정성 들여 키우는 "가축"과 같은 존재였다. 비단을 뽑아내기 전까지 함부로 죽이거나 먹을 수 없는 귀한 자원이기도 했다. 결론적으로 조선시대까지 번데기는 식량 부족 시기의 대체재나 약용으로 소수 이용되었을 수는 있으나, "조선은 예의와 법도를 중시하는 문명국으로서 혐오감을 줄 수 있는 곤충을 주식으로 삼지 않는다"는 암묵적인 문화적 합의와 농업 중심의 식량 생산 구조가 자리 잡고 있었던 셈이다.


그런데 이 번데기가 미래식량으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최근 전 지구적으로 곤충식이 "지속 가능한 미래 단백질원"으로 주목받으면서 번데기도 다시금 언급되고 있다. FAO(유엔식량농업기구) 등에서 곤충 섭취를 권장함에 따라 대한민국의 번데기 식용 문화가 서구권 유튜버나 미디어에 "미래 식량을 선취한 사례" 혹은 "이색적인 도전(Challenge)" 콘텐츠로 소개되기도 한다.


결론은 조선시대까지 한민족은 예의와 농본을 중시하는 문명국으로서, 또 기후적 이유로 인해 굳이 곤충을 주식으로 삼지 않았다.


그러나 1960년대를 거치며 경제 개발을 위한 양잠업 장려와 식량 부족 해결이라는 국가적 과제가 맞물려 "산업 부산물의 식용화"가 이루어졌다.


그리고 1978년쯤에 "농약 묻은 자루 사건"은 무지한 유통 관행이 빚은 비극이었으며 식품 안전에 대한 경각심을 주었다.


그리고 현재 양잠업 쇠퇴로 인해.. 영양 공급원이 아닌 기호 식품이자 1960~70년대의 식품으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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