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이집트 왕국의 평화기는 조선시대보다 훨씬 길었다.

고대 이집트 왕국은 기술이 발달했지만 전쟁을 못했고 페르시아의 식민지

by 바다의 역사




여러분은 고대 이집트 문명하면 뭐가 생각이 드시나요? 오랜 역사와 아름다운 문화를 꽃 피운 나라, 경제와 높은 인구수와 기술, 과학의 번영을 이룬 아름다운 나라, 아름다운 미녀들과 클레오파트라의 사랑을 떠올리시는 분들이 대부분인데요.


고대 이집트 왕국은 이런 오랜 역사에 기원전의 패권국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굉장히 전쟁을 싫어했으며, 더 나아가 전쟁을 잘 못했기에 군사력은 꽤나 약해서 주변국들에게 항상 시달리며 속국(조공국, 식민지)까지 된 그런 나라에요.


어떻게 보면 고대 이집트의 역사는 항상 고대시대부터 식민 지배를 당해온 대한민국의 역사와 굉장히 비슷하고 겹치는 부분이 많아요. 이집트 문명이 메소포타미아 문명과 달리 "마아트(Ma'at)"라는 독특한 이념과 지리적 환경 때문에 전쟁보다는 안정과 유지를 중시했기에 오늘은 그 부분에 관해 더 자세히 알아볼게요.


이집트는 사막(동, 서), 바다(북), 험준한 산악(남)으로 둘러싸여 있어 굉장히 다양한 기후대라 외부의 침입이 매우 어려웠으며 고유의 문화를 평화롭게 발전시킬 수 있었습니다. 이는 개방된 평원이라 고대 시대부터 끊임없이 전쟁과 약탈에 시달렸던 황하 문명, 중동의 메소포타미아 문명과는 굉장히 다른 부분이었습니다.


게다가 정기적으로 범람하여 비옥한 토지를 제공하는 나일강 덕분에 이집트는 경제적 자급자족이 가능하여 식량이 풍부했고, 생존을 위해 억지로 다른 나라를 토벌하거나 무리한 교류를 할 필요가 없었지요. 이는 이집트인들에게 "변화는 불필요하며 지금의 질서(마아트)를 유지하는 것이 가장 좋은 것"이라는 보수적인 생각을 심어주었어요.


식탁이 뭔가 그 시절 이집트의 고증과는 안 맞지만 ai라서 양해해주시길

게다가 더 충격적인 건 이집트에 "법전"이 없었다는 것이지요. 아까 이집트 역사가 대한민국 역사와 비슷했다고 했는데 유일하게 이 부분만은 대한민국의 역사와 다른 점이기도 해요. 법전이란 건 그 국가의 대표 세계관이라고 해도 될 만큼 중요한 것인데, 그렇기에 약 기원전 1755~1750년쯤에 바빌론의 함무라비 왕에 의해 아카드어로 성문화된 "함무라비 법전"이나 고조선의 "8조법", 조선시대의 국가 정부 공인 법전인 "경국대전"이 가장 대표적이지요.


기원전부터 중국의 황하 문명이나 메소포타미아 문명 여러 민족과 국가들이 전쟁, 경쟁했기에 서로 간의 분쟁을 조정할 객관적인 "성문 법전"이 필수적이었습니다.


하지만 정반대로 이집트는 평화로웠으며 "살아있는 태양신"인 파라오의 이야기가 곧 법이었습니다. 기원전 이집트 문명의 파라오는 태양신의 뜻인 "마아트(평화, 질서, 도덕)"를 이 땅에서 구현하는 존재였으므로 파라오의 정사 행위 자체가 법이었기에 별도의 성문화된 법전이 필요 없었던 것이에요. 이는 이집트가 강력한 중앙집권적 질서 속에서 평화를 유지했음을 보여주는 예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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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는 잉카 문명이나 아즈텍 문명, 마야 문명처럼 막대한 황금과 높은 건축 기술(피라미드 등)을 가졌지만, 후엽으로 갈수록 당시 히타이트, 누비아, 앗시리아, 바빌론보다 국방력이 취약해졌으며, 더 나아가서는 로마제국보다 훨씬 강력한 군사 강국인 페르시아 제국의 식민지가 됐지요.


수천 년간 천혜의 요새 안에서 평화를 누리다 보니 외부의 강력한 세력에 대항할 군사 기술 혁신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지 못했습니다. 반면, 기원전부터 끝없는 전쟁들이 일상이었던 중국과 중앙아시아(몽골계 대제국들과 튀르크계 대제국들), 동북아시아와 서아시아(히타이트, 아시리아, 바빌론, 페르시아 제국 등)는 이미 기원전부터 철제 무기, 기병과 전차 전술 등 살상 무기 기술들을 끊임없이 발전시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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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이집트 후기 왕조인 제26왕조 등은 자국민으로 구성된 강력한 상비군이 아니라 그리스인이나 카리아인 등 외부에서 온 용병에게 국방을 크게 의존했습니다. 이는 결정적인 순간에 충성심 부족이나 배신(예: 파네스의 배신)으로 이어져 안보 방어 체계를 무너뜨렸던 것인데 재밌게도 이는 먼 훗날인 동로마 제국이 멸망할 때도 똑같이 이어져요.


이집트를 속국으로 삼았던 로마는 분열된 후 계속 쇠락을 거듭하다가 결국 동로마 제국 시대에는 완전히 "동네북"의 약소국으로 전락하여 로마인들은 죄다 여자와 먹을 것 등의 쾌락에 빠져 방탕하게 살다가 살찐 비만 체형이 되버렸기에 집에만 있으려고 하여 스스로 군대를 가려하지 않았기에 자연스럽게 동로마 제국의 군대는 외부의 용병이 대신하게 되었는데 외부에서 강력한 세력이 침입해왔을 때 그들은 모두 도망쳤지요. 동로마 제국을 멸망까지 몰고 간 셀주크 돌궐 제국이나 아예 멸망시킨 오스만 돌궐 제국이 침입했을 때도 외부 용병들은 죄다 오줌싸고 지레 겁먹고 도망갔지요. 외부의 용병들은 아무리 돈을 많이 줘도 막상 생명까지 바쳐가면서 헌신하며 충성하진 않았거든요.


이집트도 마찬가지였어요. 페르시아 제국의 침입 당시 이집트는 파라오 아마시스 2세의 사망과 왕자인 프삼티크 3세의 옹립 과정에서 혼란을 겪고 있었으며 정치 혼란으로 인해 집권층들이 페르시아 제국에 투항하여 협력하기도 했습니다.


기원전 525년, 페르시아 제국의 캄비세스 2세(Cambyses 2)는 북아프리카 이집트를 대대적으로 침입하여 펠루시움 전투(Battle of Pelusium)에서 승리하고 이집트를 완전히 정벌했습니다.



unnamed.jpg 고대시대의 페르시아 제국의 식민지가 되버린 북아프리카 이집트 왕국


페르시아 제국은 이미 싸우기도 전에 승리했는데 이는 철저한 사전 준비와 정보전을 했기 때문이에요. 이집트군에서 이탈한 그리스 용병대장 "파네스(Phanes)"로부터 이집트의 군사 정보와 사막 횡단길을 입수했던 페르시아군은 또한, 아라비아 유목민들과 협정을 맺어 사막을 건널 물과 낙타를 지원받는 등 치밀한 보급 계획을 세웠습니다.


당시 페르시아 제국은 서아시아 전역을 휩쓴 막강한 철기 군대였습니다. 페르시아 제국의 군사력은 최전성기의 로마 제국보다도 훨씬 막강하다는 평가가 많을 정도입니다. 반면에 이집트 문명은 아직 청동기 중심의 무기 체계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고, 전술적으로도 페르시아의 궁병을 당해낼 수 없었습니다. 고대~중세시대의 최강의 무기는 "활"이었거든요. 고대시대~중세시대에서 활은 든 병사는 검이나 창을 든 병사들의 천적일 정도로 막강했습니다.


역사적 기록인 폴리아이누스의 "전략론" 등에 의하면, 페르시아 제국의 캄비세스 2세는 이미 사전 정보를 입수하여 이집트인들이 신성시하는 고양이, 따오기 등의 동물을 방패에 그리거나 앞세워 이집트 병사들이 차마 공격하지 못하게 만들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집니다. 이는 페르시아 제국이 상대의 문화적 약점을 파고들 만큼 교활했음을 시사합니다.



unnamed.jpg 고대시대의 페르시아 제국의 식민지가 되버린 북아프리카 이집트 왕국


페르시아 제국이 서아시아와 중동, 북아프리카의 패권국이 된 강력한 이유는 이런 철저한 준비력에 있었습니다. 페르시아 제국은 비단 이집트 왕국뿐 아니라 히타이트(기원전 12세기 멸망), 아시리아, 바빌로니아 등의 옛 영토인 리디아(히타이트의 후손), 신바빌로니아 제국, 이집트 왕국들을 차례로 정벌하며 대제국을 건설했습니다.


하지만 페르시아 제국은 굉장히 똑똑한 제국이었고 폭력적인 제국은 아니었어요. 페르시아 제국은 관용 정책(Cyrus the Great's Tolerance)을 취하며 고대시대의 세계 패권국인 대당제국(당나라)처럼 페르시아 제국의 시조 키루스 대제도 피정복민의 종교와 관습을 존중했습니다. 바빌론 유수 상태였던 유대인들을 해방시켜 고향으로 돌려보낸 것이 대표적이기도 합니다. 그렇기에 기독교 성경에서도 페르시아 제국은 기독교 성경에 등장하는 모든 제국들 중 가장 강력하면서도 가장 관용적이고 유대인들에게 자비를 베풀던 제국이었습니다. 이러한 페르시아 제국의 관용은 피정복민들의 저항을 줄이고 제국을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기반이 되었습니다.


영화 300에서도 등장하는 중세 일본 가마쿠라의 닌자부대처럼 나오는 임모탈(Immortals)은 1만 명으로 구성된 정예 불사 부대인데, 이는 페르시아 제국 황제의 친위대이자 제국군의 핵심 전력이었습니다. 한 명이 쓰러지면 즉시 다른 병사가 그 자리를 채워 항상 1만 명을 유지했기에 적에게 공포를 주었습니다.


게다가 페르시아 제국은 농경정주민족이라기보단 반농반목축의 전통이 있었기에 기동성이 뛰어난 궁기병과 사거리가 긴 궁병을 유기적으로 결합한 당시 서아시아와 중동, 북아프리카에서 가장 강대한 전술을 구사했습니다.


그리고 페르시아 제국은 사트라프(Satrap) 제도를 구축하여 제국을 여러 구역으로 나누고 총독(사트라프)을 파견해 다스리되, "임금님의 귀"라고 불리는 감찰관을 보내 총독을 감시하게 하여 중앙집권과 지방분권의 균형을 맞췄습니다.


물론 이렇게 히타이트(기원전 12세기 멸망), 아시리아, 바빌로니아 등의 옛 영토인 리디아(히타이트의 후손), 신바빌로니아 제국, 북아프리카의 이집트 왕국들을 차례대로 정복하고 식민지로 만들며 강대한 대제국을 건설한 페르시아 제국도 먼 훗날인 중세 시대의 세계 최강 제국이었던 대몽골제국이 페르시아 제국을 완전히 정복하면서, 페르시아 제국의 최전성기가 완전히 끝장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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