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케메네스 왕조인 페르시아 제국이 그리스의 여러 도시국가와 스파르타를 상대로 승리하지 못한 결정적인 이유는 거대한 제국의 규모가 오히려 독이 된 보급의 한계와 지형적 특성 그리고 군사 장비의 질적 차이에 있어요.
당시 페르시아는 서아시아와 북아프리카 이집트를 아우르는 매우 큰 동양의 강대국이었으나 그리스 본토까지 이어진 긴 보급선은 치명적인 약점이었어요.
피터 그린의 책인 "그리스 페르시아 전쟁, 1996년"에 의하면 페르시아 병졸들은 수십만 명의 대군을 유지하기 위해 해상 보급에 전적으로 의존했어요. 그러나 살라미스 해전에서 페르시아 함대가 패배하며 해상 장악력을 상실하자 육상 군대에 대한 군량 공급이 불가능해졌고 이는 대규모 병력의 자발적인 도망으로 이어졌던 것이지요.
그리스 특유의 험준한 산악 지형과 좁은 길목은 천혜의 요새로 페르시아 군대의 수적 우위를 무력화했어요. 빅터 데이비스 핸슨의 책ㅇ인 "서구식 전쟁 방식, 1989년"에서는 테르모필레 싸움과 같은 사례를 통해 이를 설명합니다.
페르시아의 주력은 넓은 평원에서 위력을 발휘하는 중세 일본군 사무라이나 닌자 같은 경보병이었으나 그리스의 좁은 협곡에서는 이러한 강점을 전혀 활용할 수 없었습니다.
반면 그리스의 중장보병인 "호쁠리테쓰"는 청동 투구와 흉갑 그리고 대형 방패로 무장하여 좁은 싸움터를 빈틈없이 막았지요. 즉, 그리스나 로마의 군대는 공격력은 약했지만 "방어력"은 매우 좋았던 반면에 페르시아 제국이나 중세 일본군의 보병대는 공격력에 오로지 집중한 보병 군대입니다.
페르시아 보병의 주무기였던 짧은 창과 고리버들 방패는 그리스 군의 긴 창과 단단한 금속 방패를 뚫기에 역부족이었으며 이는 난전에서 막대한 인명 피해의 원인이 되었어요.
페르시아 내부의 정치적 상황과 봉기 문제도 정벌의 연속성을 저해했어요. 제이 엠 쿡의 책인 "페르시아 제국, 1983년"에 의하면 페르시아는 정벌지 곳곳에서 발생하는 무장 봉기를 진압해야 하는 부담을 안고 있었어요. 다리우스 1세 시기에는 이집트 북아프리카 지방에서 봉기가 발생했고 크세르크세스 1세 역시 정벌 도중 본토 내부의 안정을 위해 주력 부대 일부를 이끌고 돌아가야 했어요.
이에 반해서 그리스 도시국가들은 평소 서로 갈등했으나 페르시아라는 거대한 적 앞에서는 일시적인 동맹을 맺어 대응했어요. 이런 점에서 그리스의 도시국가들은 조선시대와 비슷해요. 평상시에는 지들끼리 서로 정치적으로 죽이느라 바빴다가도 강대한 패권국이 침략해오면 일시적으로라도 단결했던 조선시대가 떠올라요.
여튼 이러한 조직적인 저항은 페르시아가 예상했던 각개격파술을 어렵게 만들었어요.
전략적 측면에서 페르시아는 다양한 소수민족으로 구성된 집단군이었기에 언어와 소통의 장벽이 존재했어요. 헤로도투스의 "역사"에 기록된 내용을 참고하면 페르시아군은 복장과 무기 체계가 제각각이었으며 이는 페르시아가 그리스보다 훨씬 군사력이 막강했지만 지휘 통제를 방해하는 요소가 되었어요.
이에 반해 그리스 병졸들은 밀집 방진인 빨랑끄쓰 전략을 통해 고도의 방어력을 발휘했어요. 비록 그리스는 페르시아보다 군사력이 훨씬 약하고 수적으로도 열세였으나 방어에 최적화된 장비와 전술을 갖춘 그리스 군을 상대로 페르시아는 원거리 타격인 보병 궁대 중심의 전술을 펼쳤지만 중장갑을 갖춘 그리스 보병을 잡아먹긴 힘들었어요.
결론적으로 페르시아가 그리스보다 군사력이 훨씬 더 막강했음에도 먹는데 실패한 이유는 군사력 자체가 약해서가 아니라 정벌 거리의 한계와 보급의 불안정 그리고 지형적 불리함과 무장 상태의 차이가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에요. 당시 페르시아는 중앙집권적인 제국 체제였으나 정벌지 관리와 원거리 정벌을 동시에 수행하기에는 행정적, 군사적 비용이 너무 컸기도 했어요. 이러한 역사적 사실들은 고대 기록인 헤로도투스의 역사와 오늘날 학자들의 고증을 통해 확인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