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까지 탐험한 조선인 홍어장수 "문순득(文順得)"

조선시대 후기의 뜻 밖에 탐험가가 된 홍어잠수 문순득(文順得)의 탐험기

by 바다의 역사




전남 신안군 우이도 출신의 홍어 상인 문순득이 겪은 표류와 귀환의 탐험은 조선 시대는 물론 국제 해양 역사에서도 매우 독보적인 사례로 꼽힙니다. 그의 경험은 실학자 정약전이 기록한 표해시말에 상세히 담겨 있으며, 이는 당시기의 동남아시아의 문화들을 조선인 그것도 기득권자가 아닌 하층민의 시각에서 생생하게 포착하고 기억하고 기록한 귀중한 사료로 평가받습니다. 특히 필리핀의 경우는 자체적인 기록 문화도 없고 필리핀을 다스리던 스페인 왕국, 미국, 일본 제국이 필리핀에 관해서 왜곡 없이 있는 그대로 기록하진 않을 터라 이렇게 조선인 문순득이 필리핀을 탐험해서 객관적인 시선에서 기록한 것은 21세기 필리핀 정부로서도 매우 중요한 사료이기도 합니다.









1777년(정조 원년)에 전라도의 진도군 흑산면에 소속된 우이도(현 전라남도 신안군의 도초면 우이도리)에서 아버지인 문덕겸(文德謙, 1739~1796)의 4째 아들로 태어난 문순득은 굉장히 두뇌가 명석하고 특히 상업 능력과 기억력이 매우 좋았던 듯 합니다.


문순득은 육지의 상인들과 섬의 상인들 사이에서 중계자 역할을 자처하며 특히 귀한 홍어를 가지고 장사를 해서 이득을 챙겼던 것으로 보입니다.


1801년 12월, 문순득은 일행들과 어선을 타고 흑산도 인근의 태사도에서 홍어를 구입해서 싣고 돌아가던 중 거센 북태평양의 풍랑과 마주칩니다. 그와 그의 일행(작은 부친 문호겸, 마을 동료 이백근, 박무청, 이세보, 김옥문 등 총 6명의 어부들이며 그 중 1명은 어린 소년이었다.)은 북태평양의 거센 풍랑 때문에 어선의 키가 부서지고 돛이 찢어지는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 무려 10여 일이나 바다 위에서 정처 없이 표류했습니다.



g.jpg


처음에는 가까스로 방향키를 잡아서 제주도에 상륙하려고 했으나 키가 완전히 박살나고 돛이 찢어지면서 결국 망망대해로 밀려나버린다. 문순득 자체가 워낙 가난했기에 값이 싼 어선을 구입해서 탔던 것으로 보이는데 아마 그래서 키와 돛이 박살난 듯 합니다.


식수가 떨어져 바닷물로 연명하고 죽음의 공포와 싸우던 이들은 1802년 1월, 가까스로 육지에 상륙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곳은 조선이 아닌 "류큐 왕국(현재의 일본 오키나와)"이었다는 점입니다. 류큐 왕국은 원래는 일본령이 아니었고 명나라령이었고 명나라와 청제국에 대대적으로 조공을 바치던 명나라와 청제국의 식민지나 다름 없었으나 몰래 에도 막부의 사쓰마번이 무단으로 류큐 왕국을 점령해버리면서 류큐 왕국은 청제국의 식민지인 동시에 일본의 식민지인 이중 식민지가 됩니다.


그때문에 류큐 왕국은 세금을 바칠 때 청제국과 일본 두 제국에게 동시에 바쳐야 돼서 2중으로 수탈을 배로 당했습니다. 류큐 왕국 사람들도 일본인과는 다른 민족이었으나, 에도 막부(군부) 정권 당시 일본의 사무라이들이 무력을 앞세워 침략하여 현재는 일본 에도 막부 정권의 사쓰마번의 식민지로 전락해있는 상태였습니다.



g.jpg


류큐인들은 언어가 통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표류해온 문순득 일행을 구조하여 음식과 거처를 무상으로 제공했으며 당시 류큐 왕국에 주둔 중인 사쓰마번의 총독 산하의 군인들이 문순득 일행을 감시하도록 8명의 감시조를 붙였다고 합니다. 아무래도 사쓰마번이 불법으로 류큐 왕국을 식민 지배 중이라는 것을 중국에게 들킨다면 엄청난 공격이 가해질 것이기 때문에 당시 8명의 감시조들은 문순득과 일행들이 류큐 왕국이 일본 사쓰마번의 식민지라는 것을 들키지 않기 위해 환대해주면서도 늘 감시를 했다고 합니다.


문순득은 이곳 류큐 왕국에서 약 8개월간 머무르며 현지어(류큐어)를 습득하고 일본과는 완전히 다른 류큐의 각종 문화들을 관찰합니다. 당시 류큐 왕국은 국제 열강인 청 제국과 신흥 강대국으로 부상 중이던 일본 사이에서 중계 무역을 하던 중계 무역지로, 문순득은 이곳에서 조선으로 귀국할 날만을 기다렸습니다. 당시 조선은 류큐 왕국과 외교적으로 친선 관계를 맺고 있었기에 표류민 환송체계 시스템이 확실히 정립돼있었는데 아무래도 류큐 왕국이 청제국에게 세금을 바치고 있었기 때문에 만약 류큐 왕국으로 조선인들이나 외국인 표류민들이 들어오면 바로 귀국시키면 안 돼고 청제국으로 먼저 보낸 후에 청제국의 관리들이 심문을 한 후에, 심문절차가 끝나면 비로소 고국으로 귀국하는 체계였습니다.


그 환송체계에 따라 일본 에도 막부의 식민지가 다름 없던 류큐 왕국의 정부는 이들을 청제국으로 입국시켜 조선으로 귀환시키기로 결정하고, 1802년 10월 문순득 일행을 태운 선박을 중국으로 출항시켰습니다.











그러나 중국으로 향하던 선박은 다시 한번 예기치 못한 북태평양의 추운 태풍과 마주칩니다. 류큐 왕국을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선박은 남단으로 하염없이 밀려 내려갔습니다. 다시 무려 12~14일 동안의 긴 표류 끝에 그들이 도착한 지역은 류큐 왕국보다도 훨씬 더 남쪽이자 조선인 백성으로서는 미지의 섬인 "여송국(Luzon, 현재의 필리핀)"이었습니다. 구체적으로 그들이 도착한 섬은 현재의 필리핀 루손섬의 북서부 일로코스 수르(Ilocos Sur) 지역의 비간(Vigan) 인근 살로마그(Salomague) 항구로 추정됩니다.



당시 필리핀은 스페인 왕국의 속국이자 조공국이었습니다. 물론 스페인 왕국은 다 망해가던 시기였지만요. 여튼 이곳에 도착했을 때 문순득 일행은 류큐 왕국 때와는 전혀 다른 기후(류큐 왕국이 매우 추운 북반구 국가인 일본 본토보다 훨씬 덥긴 했지만 동남아시아에서는 가장 시원한 편이라는 베트남, 미얀마보다도 훨씬 더 최북단에 위치해 있는 터라 동남아시아에서도 가장 시원한 편인 베트남, 미얀마보다도 훨씬 시원한 류큐 왕국과.. 동남아시아에서 가장 최남단에 위치해 있어서 동남아시아에서 가장 무더운 필리핀과는 기후 차이가 하늘과 땅 차이로 어마어마하게 큽니다.), 그리고 전혀 다른 이국적인 풍경을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문순득은 1802년 12월~ 1803년 8월까지 약 9개월간 필리핀에 머물렀습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필리핀만의 이상한 문화와 생활상들에 굉장히 문화충격을 받으면서도 상세히 관찰했습니다. 문순득이 가장 놀랍고 특이하게 여긴 점 가운데 하나는 바로 필리핀인들의 머리 모양과 옷이었습니다. 그가 만난 사람들이 필리핀인들(스페인인들과 섞이거나 혹은 문명화된 필리핀인이거나)인지 아니면 구석기인이었던 필리핀 원주민들인 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문순득은 필리핀인들의 모습을 보고 "귓바퀴에는 구멍을 뚫은 흔적이 있으며 머리털은 양털처럼 꼬불 꼬불 말렸으며 거의 다 대머리(아무래도 긴 장발이 대부분이었던 조선인들이 보기에 필리핀인들의 머리는 대머리였던 것으로 보인다)였으며 심지어 옷을 안 입고 다니는 사람이 많았고 전신이 새까맣기가 옷칠한 것 같다."라고 얘기했어요.


이는 필리핀인들의 짧은 머리, 열대 기후라서 옷을 거의 안 입거나 얇게 입고, 또 피부 색깔이 새카만 것을 보고 문순득은 굉장히 충격을 받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게다가 여자들도 머리를 짧게 자른다고 썼어요.




문순득이 특히 흥미롭게 관찰하고 구체적으로 묘사한 것은 투계 즉 닭싸움 문화도 있는데 조선이나 스페인에서는 투우나 싸움소가 있다면 필리핀에서는 이와는 정반대로 투계가 있던 걸로 보여요. 그는 현지인들이 닭의 발목에 못 같은 걸 묶고 싸움을 붙이고 돈을 걸어 내기를 하는 모습을 생생하게 기억했습니다.


이는 당시 필리핀 사회에 만연했던 오락이자 도박 문화를 정확하게 포착한 것입니다. 또한 그는 필리핀 사람들이 밥을 먹을 때 식기구가 전혀 없이 손을 사용하거나, 쌀밥을 주식으로 하면서도 다양한 열대 과일과 해산물을 섭취하고 달고 짠 기이한 식생활도 눈여겨보았습니다. 그리고 부계사회이자 남성우월주의가 심했던 조선과는 달리 필리핀에서는 바깥일도 죄다 여자들이 맡고 집안일도 여자들이 하고 남자들은 일도 하지 않고 낮잠만 잔다면서 이곳(필리핀) 남자들은 일을 하는 사람이 거의 없어 게으르기가 따라올 자가 없다고 얘기했습니다.


그러나 문순득은 이런 이질적인 필리핀 문화를 보며 단순히 미개하다고만 치부하기보다는 그들이 어째서 그런 문화를 갖게 됐는 지 끊임 없이 생각했어요. 그런 걸 보면 문순득은 굉장히 학구열이 강한 학구파 스타일이 틀림 없습니다. 다만, 언어와 풍습의 차이로 인해 처음에는 소통에 어려움을 겪었으나, 문순득은 머리가 좋은지 뛰어난 적응력을 발휘하여 현지어를 빠르게 습득했고, 이를 통해 현지 스페인 관리들과 소통하며 귀환을 모색했습니다.



문순득은 군인이 아닌 상인 신분이었으며 표류 당시 총이나 강철검 같은 살상용 무기를 소지했다는 기록은 전무합니다. 표해시말이나 관련 사료 어디에도 그가 무술에 소질이 있었다거나 호신용 무기를 사용하여 전투를 벌였다는 내용은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는 철저히 비무장 민간인이었으며, 낯선 땅에서 생존할 수 있었던 비결은 싸움 실력이 아닌 친화력, 언어 습득 능력, 기억력과 그리고 위기 대처 능력과 능통한 외교적 처세술이었습니다.



그리고 1803년 8월, 문순득 일행은 마침내 필리핀을 떠나 중국으로 향하는 상선에 오를 기회를 얻었습니다. 이 배는 포르투갈 상선이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들은 필리핀을 떠나 마카오(마카오는 광동성 향산현 소속의 땅으로, 중국 황제가 포르투갈인들에게 매년 거액의 세금을 받고 임대해주던 임대지였기에 비록 포르투갈인들이 거액의 돈으로 임대받은 땅이긴 하나 여전히 중국군이 주둔하면서 포르투갈인들을 감시하던 장소입니다.)로 향했습니다. 필리핀에서 마카오로 가는 항로 중간에 대만 해협을 통과했을 수는 있으나 그가 대만 땅을 밟고 원주민과 교류하거나 탐험했다는 기록은 표해시말에 나타나지 않습니다.


1803년 9월 마카오에 도착한 문순득은 그곳에서 또다시 몇 달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마카오에서 그는 더욱 본격적인 서양 문물을 접했습니다. 서양인들의 외모, 복장, 그리고 그들이 사용하는 도구들을 보며 견문을 넓혔습니다. 이후 1803년 12월, 그는 중국 본토로 이동하여 난징(남경)과 베이징(북경)을 거쳐 조선으로 돌아가는 귀국길을 떠났습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중국 관리들의 감시와 조사, 철저한 심문을 받았고, 조선에서 온 조공 사절단(동지사)을 만나게 되어 비로소 안전한 귀환길에 오르게 됩니다. 그는 중국 내륙을 이동하며 청나라의 방대한 영토와 문물을 목격했고, 이는 단순한 표류자가 아닌 국제적인 감각을 지닌 인물로 거듭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1805년 1월 문순득은 마침내 압록강을 건너 조선 땅을 밟았습니다. 집을 떠난 지 꼬박 3년 2개월 만의 귀환이었습니다. 고향 우이도로 돌아온 그는 죽은 줄만 알았던 가족들과 재회했습니다. 그의 탐험기는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고, 당시 우이도 인근 흑산도에 유배 와 있던 실학자 정약전의 귀에 들어갔습니다. 정약전은 그의 탐험이 진짜라는 것을 눈치챘으며 문순득을 초대하여 그의 표류 경험을 상세히 듣고 이를 기록할 가치가 있다고 판단하여 받아 기록했습니다.


정약전은 문순득의 구술을 바탕으로 날짜, 날씨, 지리, 풍속, 언어 등을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표해시말(표해시말)이라는 책을 완성했습니다. 이 책에는 문순득이 류큐 왕국과 필리핀에서 배운 현지어 단어들이 한글 발음으로 기록되어 있어 언어학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가치를 지닙니다. 그런데 그는 그 오랜 세월 동안 필리핀을 탐험하면서 봤던 것들을 정확히 기억해 내서 "기억력"까지 매우 뛰어나다는 것을 입증했습니다.




문순득이 귀환하고 몇 년이 지난 1809년(순조 9년)에 제주도에 정체불명의 외국인들이 표류해 온 사건이 발생했습니다.(조선의 순조실록에는 이 필리핀인들을 보고 "팔이 긴 원숭이같다"고 기록했습니다.) 조선 조정은 통역관들을 보냈으나 이들의 정체와 국적을 특정하려 했으나 언어가 정말 통하지 않아 이들을 어떻게 처리해야할지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이때 조선 조정은 필리핀어를 할 줄 아는 문순득을 한양으로 급히 소환했습니다. 문순득이 그들을 만나 대화를 시도한 결과 그들은 여송(Luzon) 지역 즉 필리핀 마닐라 인근에서 온 사람들임이 밝혀졌습니다.


조선왕조실록과 비변사 등록의 기록에 따르면, 이 필리핀인 표류민들을 사형하지는 않았습니다. 당시 조선의 원칙은 표류민을 구호하여 상국인 청나라를 통해 본국으로 송환하는 국제 송환체계에 따르고 있었습니다. 문순득의 통역 덕분에 국적과 사정이 밝혀진 이들은 조선 정부의 지도 하에 이후 환송체계 시스템에 따라 필리핀인 표류민들은 중국이 데려갔고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심문과 조사를 끝마친 후 조치되었습니다.


수없이 많은 세월들을 탐험한 문순득.. 그는 진정한 사전적 의미의 "탐험가"였던 것입니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치파오는 원래 "바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