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세기는 당시 세계 패권을 잡았던 대원제국 즉 원나라의 세계 최강 기병대는 세계 인류 역사상 유례를 찾기 힘들 정도로 세계에서 가장 강력하고 빨랐습니다. 1253년 대원제국의 쿠빌라이 대칸이 대리국을 군사 정복하면서 그곳에 살던 타이족의 운명은 송두리째 바뀌게 됩니다. 대원제국은 세계에서 가장 추운 북방의 냉대 기후의 매서운 칼바람 혹한 추위와 거친 벌판에서 단련된 최강 군대였기에, 타이족 사람들은 그 원정군단들이 굳이 쓸모도 없는 타이족을 쫓아서 아열대 기후인 습하고 무더운 최남쪽의 동남아시아의 아열대 기후까지는 굳이 추격해오지 않으리라는 헛된 희망 섞인 기대를 품었을지도 모릅니다.
물론 대원제국이 보낸 원정군단들이 동남아시아의 미얀마, 참파 왕국, 베트남(단기 주둔), 인도네시아 섬(단기 주둔)까지도 정복하면서 그 기대는 날아가버립니다.
타이족은 마치 둑이 터져 흐르는 강물처럼 남쪽으로 한꺼번에 도망쳐 피신했습니다. 세계 최강군의 침략에 의해 고국이 멸망당하자 그곳에서부터 도망친 이들은 현재의 태국 땅인 짜오프라야 강 유역으로 쏟아져 피난했고, 그곳에서 이미 찬란한 문명을 꽃피우고 있던 크메르 왕국을 완전히 무너뜨리게 됩니다.
당시 동남아시아의 경제대국이었던 크메르 왕국은 타이족 피난민들의 압도적인 인구수와 생존을 향한 절박한 투쟁 앞에 바로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1238년 타이족은 크메르 문명을 없애버리고 동남아시아에 자신들만의 1번째 왕국인 수코타이 왕국을 건설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동남아시아에 태국 역사의 실질적인 시작점이자 찬란한 타이 문화가 싹을 틔운 계기였습니다.
2) 수코타이 왕국의 성군 "람캄행 대왕"의 등장과 통치 철학
수코타이 왕국이 건설된 후 태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국왕으로 칭송받는 인물은 단연 람캄행 대왕이었습니다. 그래서 "대왕"이라는 타이틀까지 받았으니까요. 그는 1279년경 왕위에 올라 수코타이의 황금기를 이끌었습니다. 람캄행이라는 이름 자체가 힘센 행 즉 용맹한 행이라는 뜻을 담고 있을 정도로 그는 탁월한 정치가였습니다. 그는 백성들을 자애롭게 다스리는 부모와 같은 왕이 되고자 했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람캄행 대왕은 왕궁 앞에 종을 매달아 두었다고 합니다. 억울한 일이 있는 백성이라면 누구든지 와서 그 종을 칠 수 있었고 국왕은 직접 나와 그들의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이러한 애민 정신은 훗날 근세 시기인 조선의 세종대왕이 보여준 모습이나 미국의 링컨 대통령, 그리고 21세기 자유 민주주의 국가들과도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습니다. 하지만 람캄행 대왕에게는 국가의 기틀을 다지기 위해 해결해야 할 가장 시급한 과제가 하나 더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타이족만의 정체성"을 담은 문자를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본래 대리국에서도 피지배층으로 살던 타이족들은 당시 세계 최강국이었던 대원제국군(원나라 군단)이 대리국을 군사적으로 정복하자 동남아시아로 도망쳐 크메르 제국을 멸망시켜서 수코타이 왕국을 건설하긴 했지만 본래 피지배층으로 지배당한 노예 민족이었기에 자신들만의 정체성이 딱히 없던 태국인들이 갑자기 왕국을 건설하자 정체성의 혼돈에 휩싸였습니다. 게다가 그 시절까지 타이족들은 자신들만의 고유한 문자가 없어 자신들이 멸망시킨 크메르 문자나 다른 외래 문자를 빌려 써야 했습니다.
2) 1283년 타이 문자의 탄생과 람캄행 비문의 비밀
람캄행 대왕은 1283년에 드디어 타이족의 문자인 "라이 쓰 타이(타이 글자)"를 발명했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태국에서 사용되는 문자의 시초입니다. 대왕은 이 문자를 만든 뒤 1292년에 그 유명한 람캄행 대왕 비문을 세워 자신의 업적과 왕국의 번성을 기록으로 남겼습니다. 이 비문은 태국 역사와 언어학 연구에서 가장 중요한 보물로 여겨집니다.
여기서 우리가 궁금해하는 점이 바로 시기적인 문제입니다. 조선의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창제한 것은 1443년의 일입니다. 산술적으로 계산해 보아도 람캄행 대왕의 문자는 1283년에 나왔으니 세종대왕보다 무려 160년이나 앞서 문자를 만든 셈입니다. 시기적으로는 람캄행 대왕이 훨씬 선구자적인 위치에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대왕은 이 문자를 통해 불교 교리를 전파하고 행정 체계를 정비하며 타이족이라는 민족적 자부심을 고취시키려 했습니다.
하지만 과학적인 정교함이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이야기는 조금 달라집니다. 람캄행 대왕의 문자는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한 것이 아니라.. 기존에 존재하던 인도 문자 체계를 타이 언어에 맞게 변형하고 개량한 것에 가까웠기 때문입니다.
3) 타이 문자의 기원과 구성적 특징에 관한 분석
람캄행 대왕이 참고한 글자는 무엇이었을까요? 역사학자들과 언어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타이 문자의 뿌리는 "고대 인도의 브라미 문자에서 파생된 팔라바 문자"에 닿아 있습니다. 애초에 "태국은 동남아시아에 있는 인도"라 불릴 정도로 문화, 언어, 문자, 종교까지 모든 점들이 죄다 인도 문화이기 때문입니다. 이 팔라바 문자가 동남아시아로 건너와 고대 크메르 문자 등으로 발달했는데 람캄행 대왕은 바로 이 고대 크메르 문자를 기본 모델로 삼았던 겁니다.
당시 중세 시대의 세계의 공통 문자는 파스파 문자(대원제국의 대칸이 세계 정복 후에 파스파에게 황령을 하달하여 전 세계의 공통 문자로 지정하기 위한 목적으로 창제한 당시의 세계 공통 문자.)였었고, 고대 시대의 경우는 아시아는 중국 한자와 위구르 문자(몽골과 튀르크), 서양은 라틴 문자가 공통 문자였고, 오늘날 21세기는 영어가 공통 문자였다.
그리고 동남아시아의 경우는 크메르 문자를 많이 사용했기에 태국에서 람캄행 왕이 크메르 글자를 참고했던 걸로 보입니다.
왜 세계의 공통 문자인 파스파 문자의 영향이 아니라 크메르 문자의 영향을 받은 걸까? 이는 "성조" 때문입니다. 파스파 문자는 다 좋은데 몽골어 자체가 굉장히 멋있긴 한데 몽골어는 튀르키예어, 독일어나 러시아어, 이탈리아어처럼 음의 높낮이가 아예 없고 굉장히 전투적이면서도 언어 자체가 굉장히 빠르고 날렵한 느낌이 강하기에 "성조"라는 개념 자체가 아예 없습니다. 한국어나 일본어, 영어도 성조가 없는 언어입니다. 물론 경상도나 부산 사투리에 성조의 느낌이 약간 있다곤 하지만 성조라고 부를 수는 없습니다.
성조란 건 같은 단어인데 음의 높낮이로 아예 의미가 달라지는 언어를 뜻합니다. 그렇기에 성조가 뚜렷한 태국 언어인 태국어의 복잡한 성조와 음운 체계를 완벽하게 담아내기에는 파스파 문자는 맞지 않았던 겁니다. 이는 중국 한자나 라틴 문자나 다른 모든 문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같은 동남아시아에서 "성조" 언어가 뚜렷한 크메르 문자를 주로 참고한 겁니다. 그리고 이런 크메르 글자를 바탕으로 해서 람캄행 왕은 모음을 자음의 옆이나 윗쪽, 아래쪽이 아닌 자음과 같은 줄에 배치하려는 독창적인 시도를 하기도 했습니다만 그러나 이런 방식은 훗날 다시 변형되어 현재의 복잡한 태국 글자 형태로 정착하게 됩니다.
그래서 조선시대 세종대왕의 훈민정음과 비교했을 때 태국 글자가 과학적이지 않다고 평가받는 이유는 훈민정음이 발성 기관의 모양을 본떠 만든 음소 문자이자 세계 유일의 제자 원리를 가진 문자이기 때문입니다. 반면 람캄행 왕이 만든 태국 글자는 기존 인도계 문자의 형식을 따르고 있고 크메르 글자에도 영향을 받아서 자음과 모음의 결합 방식이 복잡하고 "성조" 때문에 표시하는 방법이 직관적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태국 글자는 전통적인 문자 체계를 계승하고 발전시킨 결과물이라면 조선 세종대왕의 훈민정음은 완전히 "혁신적"인 언어 그 자체여서 언어학적 원리를 철저히 분석하여 설계된 혁신적인 발명품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말그대로 조선 세종대왕의 훈민정음으로 지구상의 모든 언어를 다 따라할 수가 있고 못 배울 언어가 없는 겁니다.
그런데 근~현대 시절 1933년쯤에 조선어학회가 한국어를 보다 더 쉽고 정확하게 널리 쓰기 위한 표준화 작업을 위해 "한글 맞춤법 통일안"을 하면서 ㅿ, ㆁ , ㆆ, ㅸ 같은 이런 순경음 비읍 같은 가벼운 소리 시리즈들 같은 것들을 빼버렸는데 이 글자들이 하필 외국어를 발음할 때 진짜 현지인처럼 발음할 수 있게 해주는 글자라서 많은 아쉬움을 주고 있습니다. 물론 문맹률을 줄이기 위해 보다 한글을 쉽게 만드는 작업은 필요했기에 그들의 위업 덕분에 현재 대한민국이 지구상 iQ가 1등이 됐고 문명률도 가장 높지만 그런 글자들을 뺀 것에는 아쉬움이 있지요.
어쨌든 현재 한글보다도 더 위대한 문자가 훈민정음이었고 이런 훈민정음으로는 표현, 발음 못할 언어가 지구상에 아예 없었는데 태국 글자로는 이게 안 되는 점이 있지요.
4) 아유타야 왕국의 번성과 깜보디아와의 복잡한 역사적 갈등
수코타이 왕국 이후 1350년에는 좀 더 남쪽 지역에 아유타야 왕국이 건설됐습니다. 아유타야 왕국은 열대 강물로 둘러싸인 천혜의 요새였으며 해양 루트를 통해 유럽과 동남아시아를 잇는 해상 교역으로 성장했습니다. 이곳은 람캄행 왕이 닦아놓은 문화적 토대 위에서 더욱 화려한 문명을 꽃피웠습니다.
반면 한때 이 인도차이나 지방에서 번성했던 크메르 왕국은 타이족의 침입에 점점 멸망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수코타이 왕국와 아유타야 왕국의 공격으로 인해 크메르 왕국의 수도였던 앙코르까지 완전히 결국 함락되었고 이후 캄보디아는 수 세기 동안 미얀마, 태국과 베트남에게 끊임없이 노략 받는 고난의 역사를 겪게 됩니다. 질문에서 언급된 크메르 루주라는 단어는 사실 1960년대와 70년대에 활동한 캄보디아 공산주의 세력을 일컫는 의미고 이들이 과거 크메르 왕국에 향수를 느끼고 있으며 민족주의적 구호를 내세우긴 했지만 그 과정은 비극적인 숙청 중 하나인 킬링필드로 이어졌습니다.
5) 18세기 태국의 위기와 차크리 왕국의 건국
번성을 누리던 아유타야 왕국도 영원할 수는 없었습니다. 1767년 미얀마의 꼰바운 왕국이 대대적으로 태국을 때리면서 아유타야 왕국은 완전히 쑥대밭이 됩니다. 이때 태국의 수많은 예술품과 기록들이 불타 사라지는 아픔을 겪었다고 해요. 하지만 태국인들은 다시 일어섰습니다. 탁신이라는 장수가 미얀마군을 몰아내고 뭔가 돈까스가 먹고 싶어지는 똔부리라는 왕국을 건설했고 그 뒤를 이어 라마 1세라는 왕이 현재의 방콕을 수도로 정하며 짜끄리 왕국을 건설했습니다.
현재 태국의 왕실이 바로 이 짜끄리 왕국이며 이들은 람깜행 왕을 이어받는다고 합니다. 람캄행 왕이 만든 문자는 아유타야 왕국 시대와 방콕 왕국 시대를 거치며 끊임없이 다듬어지고 변형되어 현재 7000만 태국인이 사용하는 현대 태국어로 완성되었습니다. 비록 훈민정음처럼 글자 하나하나에 과학적 정교함이 있는 형태는 아니고 훈민정음보다 위대하거나 뛰어난 글자는 아닐지라도 태국 글자도 수백 년의 시간을 견디며 민족의 혼을 담아온 그 가치는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비록 과학적인 설계 면에서는 훈민정음이 앞선다는 평가가 많지만 13세기라는 이른 시기에 자신의 민족을 위해 문자를 고안해낸 람캄행 왕의 행위는 동남아시아 역사에서 독보적인 사건임이 분명합니다.
6) 현대 태국 사회에서 람깜행 왕과 문자의 위상
현재 태국에서 람깜행 왕은 단순한 과거의 왕이 아니라 국가의 정체성을 확립한 국부로 추앙받습니다. 그의 이름을 딴 람캄행 대학교는 태국에서 가장 유명한 국립 대학교 가운데 하나이며 그가 세운 비문은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어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습니다.
태국 문자는 음성 언어를 표기하기 위한 표음 문자의 성격을 띠고 있었기에 국가 통치와 기록 보존에 훨씬 효율적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