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중국 한나라의 식민지였던 고조선의 멸망

고대 중국 한무제가 고조선을 식민 지배하려고 설치한 "한사군"

by 바다의 역사




기원전 2세기 무렵 아시아의 역사는 격동의 시기를 맞이하고 있었습니다. 대제국의 기틀을 다지던 한나라가 점차 영토 팽창하면서 한반도 북부와 요동 지역을 아우르며 독자적인 국가을 구축하고 있던 고조선까지 닿으면서 두 국가는 충돌할 수밖에 없는 운명을 맞이하게 됩니다. 이 전쟁은 단순한 영토 확장을 넘어 아시아의 패권을 둘러싼 거대한 충돌이었으며 그 결과로 설치된 한사군은 이후 한국 고대사에 깊은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고조선은 한국 역사상 최초의 국가로 청동기 문화를 바탕으로 건국되어 점차 철기 문화를 수용하며 발전한 고대 국가입니다. 즉, 고조선은 청동기~철제 무기 국가입니다. 고조선의 역사는 단군조선, 기자조선, 위만조선으로 이어지는 흐름을 갖는데 본 서술에서 다루는 시대는 기원전 194년에 연나라 출신의 위만이 고조선의 준왕을 몰아내고 건설한 위만조선 시대입니다. 위만조선은 철기 문화를 본격적으로 수용하고 강력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주변의 진번과 임둔 등을 점령하며 영향력을 크게 확장했습니다. 한나라는 기원전 202년에 유방이 초패왕 항우라는 전쟁의 신을 물리치고 건국한 중국의 통일 대제국입니다. 특히 7대 황제인 한무제 시대에 이르러 중앙집권제를 강력하게 확립하고 당시 로마제국보다 훨씬 막강한 군사력을 가진 흉노제국을 비롯한 주변국을 대대적으로 정복하며 영토를 넓히던 시대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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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의 발단과 계기는 양국의 정치적 경제적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대립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기원전 2세기 후반 중국 대륙을 통일하고 국력을 다진 한무제는 북방의 유목 대제국인 흉노제국과의 패권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는 것을 대제국의 최우선 과제로 삼았습니다. 한무제는 흉노제국을 고립시키기 위해 서역으로 장건을 파견하는 등 외교적 군사적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중앙아시아를 진출하며 튀르크메니스탄의 대완국을 점령하여 아할테케 종(한혈마)들을 약탈하여 한나라의 전쟁마로 삼았습니다.


이렇게 군비 증강하며 군사력을 강화하던 한무제가 가장 두려워했던 시나리오는 북방의 흉노제국과 동방의 신흥 강국인 고조선이 군사적 동맹을 맺고 한나라를 양쪽에서 압박하는 것이었습니다. 기원전 1세기에 사마천이 저술한 사기 조선열전에는 한무제가 흉노제국과 고조선의 연합을 매우 경계했다는 사실이 명확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경제적인 갈등 역시 전쟁의 핵심 계기 중 하나였습니다. 당시 고조선은 지리적 이점을 활용하여 한반도 남부의 진국이나 여러 국가들이 한나라와 직접 무역하는 것을 막고 자신들이 중계 무역을 독점하여 막대한 경제적 이익을 취하고 있었습니다. 특히 "호랑이 모피"로 막대한 이득을 챙겼습니다. 진국은 철기 문화를 수용하고 발전하기 위해 한나라와 직접 교류를 원했으나 고조선의 우거왕은 이를 가로막고 한나라에 조공하는 길을 통제했습니다. 한나라 입장에서는 고조선의 이러한 독점적 행태가 대제국의 권위를 훼손하고 경제적 이득을 가로 막는 것이었으며 고조선이 축적한 부를 바탕으로 군사력을 키워 흉노 제국과 손을 잡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이러한 긴장감 속에서 전쟁의 직접적인 도화선이 된 사건이 기원전 109년에 발생합니다. 한무제는 "섭하"라는 사신을 고조선에 직접 파견하여 우거왕에게 한나라에 복종하고 조공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고조선의 우거왕은 한나라의 부당한 요구를 거절했고 협상은 결렬되었습니다. 섭하는 빈손으로 돌아가면 한무제에게 처벌을 받을 것이 두려워 한나라와 고조선의 국경인 패수를 건널 때 자신을 배웅하러 온 고조선의 비왕 장이라는 인물을 기습적으로 날카로운 철제 단검으로 찔러 죽이고 도망쳤습니다.


섭하는 한무제에게 고조선의 장군을 죽였다고 거짓 보고를 했고 한무제는 이를 칭찬하며 섭하를 요동 동부도위로 임명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우거왕은 크게 분노하여 즉각 군대를 일으켜 요동을 공격했고 섭하를 처단했습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 한무제는 고조선 침공의 명분을 드디어 얻게 되었고 드디어 거대한 전쟁의 막이 오르게 되었습니다. 이 모든 과정 역시 사마천의 사기 "조선열전"에 왜곡 없이 정확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기원전 109년 가을에 한무제는 마침내 대규모 군대를 동원하여 고조선을 공격하기 시작했습니다. 침공은 수륙 양면 작전으로 진행되었습니다. 양복 누선장군이 이끄는 수군은 산둥 반도를 출발하여 발해만을 건너 왕검성으로 직접 향했고 좌장군 순체가 이끄는 육군은 요동을 거쳐 고조선의 서쪽 국경을 압박했습니다. 한제국의 거대한 군사력이 동원되었으나 고조선의 저항은 한무제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을 정도로 필사적이었습니다. 송호정이 2003년에 저술한 "한국 고대사 속의 고조선사"라는 책에 따르면 고조선은 오랜 기간 철제 무기를 개량하고 굳건한 성벽을 구축해 두었기 때문에 한나라 군대의 침략에서 필사적으로 버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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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복 장군의 수군은 우거왕이 이끄는 고조선 주력 부대의 기습을 받아 대패하고 흩어졌으며 십여 일 동안 산속에 숨어 지내야만 했습니다. 육군을 이끌던 순체 역시 패수 서쪽의 고조선 군대에게 가로막혀 단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습니다. 초기 전투에서 성공하지 못한 한나라 군대는 전열을 재정비하고 다시 공격을 시도했으나 왕검성을 굳게 지키는 고조선 군대의 방어선을 뚫지 못했습니다. 계절은 바뀌어 겨울이 되었고 오랜 기간 고향을 떠나온 한나라 정벌군대의 사기는 땅에 떨어졌습니다. 좌장군 순체와 누선장군 양복 사이에는 작전 실패의 책임을 두고 심각한 내분까지 발생했습니다.


한무제는 흉노제국과 패권 경쟁 때문에 더 이상 오래 고조선 정벌에 시간을 투입할 수가 없었기에 전략을 바꿔, 공손수라는 관리를 파견하여 두 장군을 중재하려 했으나 결국 누선장군 양복을 체포하고 군대 지휘권을 좌장군 순체에게 몰아주었습니다. 전열을 재정비한 순체는 왕검성을 겹겹이 포위하고 맹렬하게 공격했지만 왕검성은 여전히 함락되지 않았습니다. 한나라 군대는 무력 공격 대신 고조선 지배층 내부의 분열을 유도하는 심리전과 이간책을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전쟁이 1년 가까이 길어지면서 굳건하던 고조선 내부에서도 점차 균열이 발생하기 시작했습니다. 한나라와 끝까지 싸워야 한다는 주전파와 전쟁을 멈추고 한나라에 항복하여 기득권을 유지하자는 주화파 사이의 갈등이 격화되었습니다. 고조선의 고위 관료들은 우거왕에게 항복을 권유했으나 우거왕은 이를 끝까지 거절했습니다. 결국 주화파 대신들은 우거왕을 배신하고 자신들의 무리를 이끌고 한나라 군대에 투항하는 사태가 벌어지게 되었습니다.












급기야 기원전 108년 니계상 참은 자객을 보내 고조선의 지도자인 우거왕을 암살하는 치명적인 배신을 저질렀습니다. 왕이 암살당하는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고조선의 병사들은 항복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성기라는 인물은 남은 군대와 백성들을 이끌고 왕검성의 문을 굳게 닫아걸고 끝까지 한나라 군대의 침략에 맞서 싸웠습니다. 하지만 한나라 군대는 이미 투항했던 고조선 출신의 대신들을 앞세워 성벽 내부의 군사들을 회유하고 선동했습니다. 결국 내부의 적에 의해 성기마저 살해당하고 마침내 기원전 108년 굳건했던 왕검성은 함락되고 말았습니다. 이로써 단군 이래 오랜 역사를 이어오던 고조선은 멸망하게 되었습니다. 우거왕 암살과 성기의 결사항전 기록은 반고가 1세기에 저술한 한서 조선전에도 교차 검증되는 객관적 사실입니다.


고조선을 멸망시킨 한무제는 그해 기원전 108년에 고조선의 옛 영토를 통치하고 수탈하기 위해 한사군이라는 "식민지를 지배하는 기관"을 설치했습니다. 한사군은 낙랑, 임둔, 진번, 현도라는 4개의 군으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한사군 설치의 근본적인 목적은 고조선의 유민들을 효율적으로 식민지 통제하고 이 지역의 풍부한 철광석과 소금 등의 자원을 경제적으로 수탈하며 중국식 군현제도를 한반도와 요동 지역에 이식하여 중국 문화권으로 영구히 편입시키려는 데 있었습니다. 소위 "중국 한화 동화 정책"이나 다름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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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랑군은 평양 지역을 중심으로 설치되어 한사군의 정치적 경제적 핵심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임둔군은 함경남도 일대에 진번군은 황해도 자비령 이남 일대에 현도군은 압록강 중상류와 동가강 유역에 설치된 것으로 학계에서는 추정하고 있습니다. 다만 진번군과 임둔군의 정확한 지리적 경계에 대해서는 학자들마다 이견이 있습니다. 따라서 이 이상으로 넘겨 짐작하거나 임의로 단정 지어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어쨌든 한나라의 군현이 설치되면서 고조선 백성들의 삶은 극심한 고통과 억압의 연속이었습니다. 한나라는 고조선 고유의 법률이었던 8조법을 폐지하고 무려 60여 조에 달하는 가혹한 한나라의 형법을 강제로 적용시켰습니다. 이는 백성들의 일상생활을 철저하게 통제하고 조금이라도 저항하는 자는 가차 없이 처벌하기 위한 법ㅈㄱ 수단이었습니다. 그러나 자유롭고 주체적인 삶을 살았던 고조선 유민들은 한나라의 폭압적인 법적 통치에 순순히 복종하지 않았습니다. 산속이나 늪지대로 숨어들어 유격전을 펼치며 한나라 관리들을 습격했고 곳곳에서 대규모 무장 봉기를 일으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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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고조선 유민들의 맹렬하고 지속적인 저항은 한사군의 통치 기반을 심각하게 뒤흔들었습니다. 한사군이 설치된 지 불과 26년 만인 기원전 82년에 한나라는 진번군과 임둔군을 유지하는 데 막대한 군사비와 행정 비용이 소모되자 결국 2군을 폐지하고 그 영역을 낙랑군과 현도군에 통폐합시킬 수밖에 없었지만 전체 한사군을 철거시키지는 않았습니다. 이어서 기원전 75년에는 현도군마저 고조선 유민들과 새로 성장하던 고구려라는 강국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혀 원래의 위치에서 쫓겨나 압록강 북쪽 먼 곳으로 밀려나게 되었습니다.


진번, 임둔, 현도 3군이 차례로 멸망한 후 마지막까지 한반도 내부에 남아있던 군현은 낙랑군이었습니다. 낙랑군은 400여 년 가까이 평양 일대에 존속하며 중국의 선진 문물과 한자 철기 기술 등을 한반도 남부 지역에 전파하는 교역로 역할을 하기도 했습니다만 한반도 식민지의 상징이기도 했습니다. 낙랑군은 주변의 토착 세력들을 견제하고 통제하기 위해 다양한 외교적 술수를 부렸으나 토착 세력들은 점차 낙랑군의 선진 기술을 수용하며 자신들의 국가를 고대 국가로 발전시켜 나갔습니다. 특히 고조선의 옛 영토에서 새롭게 솟아오른 고구려는 건국 초기부터 한나라의 군현 세력과 끊임없이 전쟁을 벌이며 성장했습니다.











세월이 흘러 4세기에 접어들면서 중국 대륙은 5호 16국 시대라는 극심한 혼란기에 빠져들었고 낙랑군에 대한 중국 본토의 지원은 완전히 끊어지게 되었습니다. 이 틈을 타서 기원후 313년 고구려의 미천왕은 맹렬한 기세로 낙랑군을 공격하여 평양 지역을 탈환하면서 낙랑 식민지 통치 기관을 완전히 쫓아냈습니다. 이어서 기원후 314년에는 황해도 일대에 남아있던 낙랑군의 잔재인 대방군마저 완전히 축출함으로써 마침내 한반도에 존재했던 한나라가 고조선을 식민지로 통치하려고 건설한 기구는 역사 속으로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애초에 제국 본국인 한나라 자체가 멸망하다 보니 한나라가 한반도를 식민지로 지배하려고 설치한 낙랑군은 본국에서의 지원을 받을 수가 없게 되었고 그로 인해 결국 스스로를 "국가"처럼 되면서 자국의 군대를 가지게 됐고 오랫동안 한반도 내에 남아있던 겁니다.


마치 네덜란드나 영국의 동인도회사가 기업이긴 하지만 독자적인 사병을 거느리고 있는 것처럼 말이지요. 여하튼 고구려가 한사군을 몰아내고 고조선의 옛 영토를 탈환한 것은 단순한 영토 확장을 넘어 한민족의 완전한 자주성을 탈환했다는 점에서 매우 거대한 역사적 의의를 지닙니다.


이제 한사군이라는 한반도를 식민지 지배하려는 통치 기관이 역사에 남긴 영향과 오늘날 학계의 근황에 대해 서술하겠습니다. 과거 일제강점기 시절 일본의 식민사학자들은 한사군의 존재를 지나치게 과장하고 왜곡했습니다. 그들은 대한민국의 역사가 처음부터 고대 중국의 식민 지배를 받으며 시작되었기 때문에 한국인은 스스로 국가를 발전시킬 능력이 없는 타율적인 민족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물론 고조선이 처음에는 청동기 국가였으며 철기 국가가 된 것은 한나라에서 넘어온 위만 장군이 고조선을 찬탈하여 "위만조선"이 되었다는 점에서 외세의 침략에 의해서 철제 무기를 도입하는 철기 국가로서 처음 시작됐으며 한무제가 고조선을 침략하면서 오랫동안 식민 지배를 받아온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고조선은 오랫동안 마치 의병처럼 한나라의 식민 지배에 저항하였으며 "스스로 만든 국가들인 고구려, 백제, 신라" 같은 국가들이 한반도 내에 남아있던 고대 중국 한나라가 한반도 식민지를 지배하려고 설치한 기관들인 여러 한사군들을 축출하려고 애를 썼으며 그 선두에 고구려가 섰습니다. 그리고 식민 지배를 받았다고 국가를 발전시킬 능력이 없다는 것도 역사를 모르는 사람이 주장하는 "바보 같은 주장"입니다.


인류 역사를 보더라도 영국은 처음에 로마의 속주에서 출발했다가 근대 시대에 해양 패권국이 됐고, 러시아는 세계 최강대국인 몽골제국의 식민지였다가 해방 후에 러시아 제국, 소련 등을 거치면서 세계 초강대국 혹은 세계 패권 경쟁국가로 급성장했으며, 미국은 영국의 속국이었다가 전쟁을 통해 독립을 쟁취한 후에 오늘날 강대국으로 우뚝 섰습니다. 그리고 대항해시대의 스페인 왕국, 포르투갈 왕국도 후우마이야 왕조라는 이슬람 무어인들이 세운 왕조에게 자그마치 800년이나 지배를 당했어도 "꽁끼스따도르"라는 국토 회복 운동으로 독립 후에 "대항해시대"를 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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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사례만 봐도 일제강점기를 겪었지만 현재 유럽의 그 어느 열강보다 군사력, 경제력, 기술력이 막강하지 않습니까? 그렇기에 식민지를 경험한 국가라도 그 시절에는 슬플지 몰라도 해방되거나 독립한 후에는 흥한 경우들이 많습니다. (물론 아닌 경우들도 많지만요.)


그렇기에 이 같은 일본의 주장은 조선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한 역사 왜곡이었습니다. 하지만 광복 이후 대한민국의 역사학계는 일제 식민사학의 논리를 철저하게 비판하고 실증적인 연구를 통해 새로운 역사관을 정립했습니다. 역사를 전공하고 연구하는 입장에서 이런 일제의 역사 왜곡과 중국의 동북공정, 그리고 환빠는 무조건 철저하게 경계해야합니다.















현대 대한민국의 역사학계는 한사군이 한반도에 존재했으며 그로 인해 고조선이 오랫동안 고대 중국 한무제와 한나라에게 식민 지배를 당했다는 사실 자체는 부정하지 않습니다.


고조선의 멸망과 한사군의 설치 그리고 이를 극복해 낸 역사는 오늘날 우리에게 국가의 존망에 대해 깊은 교훈을 남깁니다. 고조선은 당대 세계 최강의 군사 대국이었던 한무제의 군대를 상대로 1년 이상 굳건하게 저항했을 만큼 강력한 군사력과 경제력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외부의 적보다 더 무서운 것은 내부의 분열이었습니다. 지도층 내부에서 발생한 갈등과 배신이 결국 국가의 멸망을 불러일으켰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조선의 백성들은 포기하지 않고 수백 년간 처절하게 저항하여 마침내 스스로의 힘으로 외세를 몰아내고 자주적인 국가를 다시 세웠습니다. 이는 어떤 외부의 시련 앞에서도 굴복하지 않는 강인한 생명력을 보여주는 훌륭한 역사적 발자취입니다. 이런 저항의 정신은 고조선 이후에도, 수천년간 한민족에게 각인되어 결국 한민족이 오랫동안 정복, 식민 지배 당했어도 끝까지 결국에는 살아남는 원동력이 된 것은 분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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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적으로 기원전 2세기 고대사에 큰 획을 그었던 한나라의 고조선 침략 전쟁은 막강한 군사력으로 영토를 팽창하려던 한무제의 야심과 중계 무역을 통해 독자적인 성장을 이룩하려던 고조선의 이해관계가 정면으로 충돌한 거대한 역사적 사건이었습니다. 전쟁의 발단이 된 섭하 피살 사건부터 수륙 양면으로 전개된 치열한 전투 그리고 우거왕의 암살과 내부 분열로 인한 안타까운 멸망에 이르기까지 모든 과정이 사마천의 사기 등 공식적인 역사서에 세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한사군이라는 한반도를 식민 지배하려고 설치한 통치 기구가 설치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고조선 유민들은 굴복하지 않고 끝없이 저항하여 마침내 기원후 4세기에 이르러 고구려가 낙랑군을 몰아내면서 역사적인 극복을 이뤄냈습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들은 단순히 식민 지배의 역사가 아니라 외세의 침략 속에서도 주체성을 잃지 않고 마침내 새로운 역사의 장을 열어젖힌 한민족의 강인한 생명력을 실증하는 역사의 생생한 기록입니다. 수많은 학계의 논문 그리고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 기록들이 이 모든 사실을 객관적이고 왜곡 없이 증명하고 있습니다. 부족한 정보는 짐작하지 않고 오직 검증된 사실만을 바탕으로 서술한 본 내용이 고대사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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