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아프리카의 중앙에 위치해 있는 튀니지 지역은 모로코, 알제리, 리비아와 함께 "마그레브"라고 불릴 정도로 북아프리카의 교착지이며 사막 기후보다는 온화한 기후보다는 농사가 잘 되었기 때문에 문명 발달에 용이했기 때문에 이집트와 함께 아프리카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아름다운 나라랍니다. 약 기원전 814년쯤 페니키아인(오늘날 레바논 계통)이 세운 고대 카르타고 왕국의 중심지였던 튀니지에 관한 역사를 설명해드릴게요.
약 기원전 언제부터인지 확실하지는 않지만 북아프리카에 대부분에 세를 넓히면서 터를 잡고 살아가던 건 베르베르족이었어요. 그러다가 약 기원전 800년쯤부터 중동에서 탄생한 페니키아 사람들이 저 머나먼 북아프리카로 진출하면서 이베리아 반도와 중동의 교역의 조계지를 북아프리카 지역들에 세우면서 약 기원전 500년쯤에 "카르타고(Qart-Hadasht)"가 탄생하였지요. 카르타고는 풍요로운 농법을 바탕으로 인근 아프리카와 지중해 해안 대부분을 번영했으며 이렇다할 경쟁자 없이 발달을 계속하였지요. 그러다가 언제부터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이탈리아 반도를 통일한 신생 왕국 "로마(Rome)"가 기원전에 탄생하면서 카르타고의 맞수로 탄생하게 되었지요. 이렇게 기원전에 터진 카르타고vs로마의 포에니 전쟁에서 1차는 카르타고가 패배했고, 2차는 카르타고의 명장 한니발이라는 장수가 스페인을 걸쳐서 로마까지 진입하면서 로마를 멸망시키는 듯했으나 당시 북아프리카의 유목민인 베르베르족인 누미디아인 로마와 손을 잡으면서 누미디아, 로마와 양쪽에서 압박을 받자 부담이 된 한니발은 다시 카르타고로 돌아가다가 자마 평원에서 스키피오라는 장수에게 패하게 되었지요. 그렇게 2차 포에니 싸움에서도 패배한 카르타고 덕분에 로마는 스페인을 먹고 카르타고를 조공국으로 삼게 되었지요.
그리고 약 기원전 149~146년쯤에 로마와의 제3차 포에니 싸움에서도 패배한 카르타고 덕분에 그 지방은 "아프리카 속주"로 편입되었고 이로써 고대 카르타고 문명은 막을 내렸으며 이 지방은 이후 로마의 빵바구니, 곡물창고로 중요한 역할을 했어요.
(2) 튀니지의 고대 시대
고대 시대의 당시 세계에서 가장 강한 군대는 흉노제국의 군대였습니다. 흉노제국은 몽골족, 튀르크의 직계 조상이기도 합니다. 흉노제국은 당시 아시아 최강국인 고대 중국 한나라와 전쟁해서 승리했고, 흉노제국의 일원인 훈족(Huns)은 유럽 최강국인 로마제국까지 침략해서 로마제국을 사실상 멸망 직전까지 몰고 갈 정도였으니 말 다했습니다. 이렇듯 흉노제국은 혼자서 고대 중국 한 제국, 로마 제국과 전쟁해서 승리할 정도로 흉노제국의 군사력은 고대 중국 한 제국, 로마 제국보다 훨씬 더 막강했습니다.
훈족(Huns)은 흉노제국의 후예로 여겨지며, 훈족의 기마병들은 4세기 후반인 375년에 유럽 다뉴브 북쪽의 동부 국경을 침략하면서 막강한 훈족의 침략으로 인해 공포에 사로 잡힌 여러 게르만족들은 서쪽으로 도망쳤으며, 이때 원래 폴란드 일대에서 로마 제국의 변경지대인 판노니아(Pannonia)로 이동해 정착해 살고 있었던 "반달족(Vandals)"들도 훈족의 침략을 피해서 대이동(Migration Period)을 겪게 되었으며 “AD 400년 동쪽에서의 훈족의 약탈(raids)이 많은 게르만족들을 로마 제국 영내로 이동하게 했다.”라는 기록이 있으며, 이 중 반달족도 밀려서 서쪽으로 이동했습니다. 이 사건이 그 유명한 "게르만족의 대이동(혹은 게르만족의 이동)"입니다.
그렇게 훈족의 전방위적인 침략과 압박을 받은 반달족은 406년 겨울에 루아(Rhine) 강을 건너 갈리아(프랑스) 왕국으로 들어섰고, 이후 독일을 거쳐서 오늘날의 스페인이 자리잡고 있는 이베리아 반도를 거쳐 429년에 북아프리카로 쳐들어 가서 로마 속주들을 점령하였고, 431년에는 겐세릭(Genseric)이라는 장수가 히포를 먹고, 439년에는 카르타고를 함락시켜 그곳을 수도로 삼고 신흥 해양 세력인 "반달 왕국(Vandal Kingdom)"을 세우게 됩니다.
이렇듯 이후 5세기에는 게이세리크의 반달 왕국이 건설되었어요. 반달족은 435년 북아프리카를 장악하고 옛 카르타고 지역들을 수도로 삼아 해적 활동을 펼쳤으며 455년에는 로마를 침입하였고 반달족들과 로마군들이 전쟁을 벌였으나 로마군들은 연전연패하면서 속수무책으로 패배했습니다. 그러다가 약 533~534년쯤에 비잔틴의 지도자 유스티니아누스 1세가 장수 벨리사리우스를 보내 간신히 반달 왕국을 저지해 북아프리카를 다시 회복하면서 로마 제국은 가까스로 반달 왕국의 침입을 막고 위기에서 벗어났지요.
약 7세기 중엽쯤에는 그 어마어마하고 무시무시한 이슬람 세력들이 마침내 탄생하여 수많은 유럽 국가들이 이슬람에게 연전연패하면서 유럽은 마침내 굴욕의 시대를 겪게 되었고 서구에서 가장 강했던 로마 제국마저도 이슬람 세력들에게 계속 패배하면서 이슬람 왕조의 경제력, 기술력, 군사력이 로마 제국보다 훨씬 강하다는 것을 입증하는 계기를 보여줬지요. 그렇게 동양권인 아라비아 반도에 머물러 있던 이슬람 왕조들은 파죽지세로 북아프리카로 침입해 압둘라즈를 비롯한 지역을 석권했어요. 이슬람 통치 하에 투니스(당시 튀니스)를 중심으로 아그라비드, 파티마(909년), 즈위드, 하프스 왕조(1229~1574년) 등이 이어졌지요. 하지만 수많은 이슬람 왕조들이 북아프리카에 건립되었다고 해도 여전히 이슬람의 중심지는 북아프리카가 아닌, 서아시아와 중동이었습니다.
(3) 튀니지의 중세 시대
세계의 모든 이슬람 왕조들 중 가장 강한 이슬람 제국은 바로 서아시아, 중동에 세워진 아바스 제국과 호라즘 제국이었습니다. 하지만 13세기에 전세계를 정복한 몽골제국이 서아시아, 중동까지도 모조리 다 정복하자 서아시아, 중동의 모든 이슬람 제국들은 몽골제국의 식민지로 전락해버리고 말았으며 이슬람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이슬람 제국들인 아바스 제국, 호라즘 제국마저도 몽골제국의 식민지로 전락했습니다. 스페인을 800년간 지배했던 우마이야 왕조보다도 훨씬 강력한 군사력을 가진 아바스 제국을 몽골제국이 정복해버리고 말자 결국 이슬람 세계의 중심지는 북아프리카로 옮겨졌습니다. 왜? 전세계의 이슬람 제국들은 모조리 다 몽골제국의 식민지가 되었으며 유일하게 세계에서 살아남은 이슬람 제국은 오로지 "북아프리카"에만 일부 남아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특히 하프스 왕조는 1227년 몇몇 가문에 이어 수니파 베르베르 왕조로 수립돼 튀니지를 통치했으며, 16세기 전반까지 간신히 존재감을 감춘채 살아남아 유지되었습니다. 이 기간 하프스의 통치자들은 이베리아 기독교 세력과 잦은 동맹과 갈등을 반복했는데, 스페인은 메르스 엘케비르(1505년), 오랑(1509년), 트리폴리·부자의(1510년) 등을 점령하고 투니스와도 때때로 협약을 맺었어요.
(4) 튀니지를 둘러싼 오스만 왕조 VS 스페인 왕국의 전쟁의 승리는 오스만 왕조
근세 시대인 약 16~17세기쯤에 들어 서방에서는 스페인 왕국, 포르투갈 여왕의 대항해시대가 탄생하였지요. 그리고 이 때가 되면서 모로코, 튀니지, 알제리는 바르바리 해적(모로코, 튀니지, 알제리, 트리폴리 등 북아프리카의 해변가에 근거지를 둔 이슬람계 해적)들인 일명 "바르바리 해적"은 서유럽, 남유럽의 해역들을 자주 급습해 백인 노예들을 납치하여 오스만 제국에 팔아넘기는 만행을 자주 저질렀어요. 특히 바르바리 해적들의 주요 먹잇감은 북아프리카와 가장 지리적으로 가까운 무더운 남유럽인 이베리아 반도의 스페인 왕국과 포르투갈 왕국이었지요.
이에 포르투갈 왕국과 스페인 왕국은 해적 활동으로부터 포르투갈 왕국, 스페인 왕국을 지키고자 약 1415년쯤 포르투갈 왕국이 세우타를 석권하여 해적 활동을 못하게 막았고, 약 1492년쯤에는 스페인 왕국이 레콩키스타를 성공해 스페인을 800년간 식민 지배했던 우마이야 왕조의 세력들을 이베리아 반도에서 쫓아내는 데 성공하였지요. 그리고 특히 약 16세기쯤에는 튀니스를 둘러싼 일련의 수전과 수성전이 벌어졌지요.
그러다가 몽골제국의 식민지들이었던 아나톨리아 반도의 셀주크 제국, 룸 셀주크 제국, 오스만 제국의 초기 시대에서 독립한 오스만 제국은 1534년에 해적 출신의 함장인 케르아딘 바르바로사(오스만식 이름은 하이레딘)는 당시 모로코가 세워졌던 무와히드 왕조가 멸망한 이후에 마그레브 동부를 다스렸던 베르베르 계통의 왕조였던 "하프스 왕조"가 내분인 틈을 타 튀니스를 급습했습니다. 당시 하프스 왕조의 술탄 무레이 하산(Muley Hassan)은 난파선을 핑계로 피신하자, 해적 출신이었던 바르바로사는 신속히 수도인 투니스를 장악하고 무레이 하산을 축출해 스스로 통치자로 즉위했습니다. 이로써 튀니스는 사실상 오스만 해적들의 근거지가 되었고, 이는 스페인 측에 큰 위협을 줬습니다.
오스만 제국의 해적들과 오스만 제국의 지원을 받은 해적들이 계속해서 스페인 왕국, 포르투갈 왕국을 비롯한 서유럽, 남유럽 왕국들을 노략질하였고 특히 백인 여성들을 납치하여 오스만 제국으로 끌고 가서 하렘으로 데리고 오자 결국 참다 못한 스페인 왕국은 약 1535년쯤에 튀니스 토벌을 결심하였어요. 이듬해 카를 5세(신성로마의 군주)가 대대적인 토벌을 감행했어요. 그는 안드레아 도리아 등 제노바, 나폴리, 시칠리아 동맹 선박을 뭉치게 해 선박 약 400척쯤과 병력수는 약 2만 7천 명쯤을 모은 뒤 약 1535년 6월 17일쯤에 라 고레타(La Goletta)라는 해변에 상륙했어요. 그렇게 서방식 대포와 수군력으로 카를 5세는 1달간 힘겨운 공방을 벌인 끝에 가까스로 겨우 약 7월쯤에 튀니스 성과 라 고레타라는 장소를 토벌하였어요. 그리고 이 시기에 납치되어 있던 약 2만여 명의 기독교 남녀 노예들을 되찾았으며, 하프스 왕조의 무레이 하산은 스페인의 속왕으로 복위했지요. 그리고 스페인 왕국은 그곳에 졸병들을 보내 튀니스를 지키게끔 하여 지중해의 서부 해상 교역을 지키려고 노력하였지요.
하지만 그것도 잠시.. 1560년에 제르바 해전(Battle of Djerba)이 벌어지면서 스페인 왕국은 완전히 대패를 하게 되었습니다. 1560년 5월, 튀니스 동남해의 제르바 섬 근해에서 펼쳐진 수전인 이 수전은, 당시 피야레 파샤라는 장수가 이끄는 오스만 돌궐족의 왕조의 함선과 스페인 왕국, 교황령, 제노바, 몰타, 나폴리 합작의 서방 합작 함선 간의 대립이로 서방 합작군 측은 약 50~60척 규모의 갤리선과 지원함을 동원하면서 자기들이 동원할 수 있는 모든 함선들을 총 가용하였으나, 결국 스페인 왕국보다 해군력이 훨씬 더 막강한 오스만 돌궐의 함대에 압도당해 스페인 왕국은 27척의 갤리선과 상당수 병력이 침몰 또는 격침당했습니다. 또한 이 수전에서 스페인 합작군은 5,000명 이상의 사상자를 냈고, 제르바 섬 교두보를 완전히 빼앗겼습니다. 반면 오스만 돌궐은 사상자가 거의 없이 지중해 해상 주도권을 강화했습니다. 이 전쟁은 당시 명나라나 오스만 제국 같은 동양의 제국들이 스페인 왕국 같은 서양의 세력보다 군사력이 훨씬 더 막강하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입증한 중요한 전쟁이었습니다.
그리고 1569년에는 당시 오스만 돌궐의 알제리 속주의 총독이었던 돌궐인 울루즈 알리 파샤(오스만 돌궐풍 이름은 오치알리)가 약 5,000명의 예니체리와 베르베르 부족병들을 이끌고 육로를 통해 튀니스로 진입했습니다. 그는 하프스 왕조의 술탄 무레이 하미드를 응징하고 튀니스를 다시 오스만 돌궐의 조공국으로 귀속시켰습니다. 이로써 아주 잠시 잠깐이나마 스페인 왕국의 속왕 아래 있던 튀니스는 이제 다시 완전히 오스만 돌궐의 수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1574년에 오스만 돌궐의 최종적인 튀니스 정벌이 시작되었습니다. 대항해시대의 스페인 왕국은 "불나방" 혹은 "하루살이" 같은 존재였어요. 아주 아주 잠시 잠깐 흥했다가, 바로 순식간에 망했지요. 그래서 스페인 왕국은 곧바로 흥했다가 곧바로 망하면서 오스만 돌궐에게 계속해서 연전연패를 거듭했고1574년에는 아예 튀니스는 최종적으로 오스만 돌궐의 손으로 넘어갔습니다. 당시 오스만 돌궐의 11대 술탄이었던 셀림 2세는 250~300척, 약 7만 5천 명 규모의 함대를 거병시켜 알제리, 트리폴리, 튀니스 속주군을 합쳐 총 10만여 명의 병력으로 튀니스를 포위했습니다. 오스만 돌궐족은 파죽지세로 8월 24일 라 고레타 요새(수비 7,000명)를 함락시켰고, 이어 9월 13일에는 튀니스 도심의 마지막 스페인 방어세력도 학살하여 굴복시켰습니다. 스페인 왕국은 뒤늦게 튀니스를 방어하기 위해 돈 후안을 보내 네이플스 함대를 급파했으나 악천후와 스페인 왕국의 부족한 기술력으로 인해 끝끝내 도달하지 못했습니다. 미겔 데 세르반테스의 기록에 따르면, 오스만 제국 측 사상자는 약 25,000명에 달했으나 스페인군 생존자는 단 300명에 불과했다고 되있어요. 결과적으로 이 전쟁은 오스만 제국의 압승이었고 하프스 왕조는 완전히 멸망하여 튀니스는 오스만 돌궐의 조공국(튀니스 아이어레트)가 되어 스페인 왕국은 완전히 쫓겨났습니다.
요약하자면, 15~17세기에 걸친 대항해시대 동안 오스만 돌궐VS스페인 왕국 간의 튀니스 해안에서 벌어진 해상전은 스페인 왕국 및 오스만 제국의 후원을 받은 바르바리 세력 간의 격렬한 해상 전쟁터였기도 했습니다. 튀니지의 연안 주요 도시들인 튀니스, 라 고레타, 마흐다 등은 이 과정에서 오스만 함대와 오스만 왕조의 지원을 받은 바르바리 해적들 쪽이 수차례 승리하기도 했습니다. 특히 마흐다, 제르바 등 해상전에서의 오스만 왕조의 승리는 스페인 왕국의 군사적 열세를 여실히 드러냈으며, 1574년 오스만 돌궐의 최종적인 정벌 이후 오스만 돌궐이 지중해 서부로 완전히 진출하여 스페인 왕국이 더 이상 지중해 쪽에서 버티지 못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5) 튀니지의 오스만 제국 지배기 (1574년~1881년)
1574년에 벌어진 오스만 돌궐의 튀니스 정벌 이후, 튀니스는 "튀니스 아이어레트"라는 이름의 오스만 조공국이 되었습니다. 관할 수장으로 데이(dey), 베이(bey)라는 추장들이 임명되었고, 수도 튀니스에는 오스만 돌궐의 군인들을 상주시켰습니다. 이 시기 튀니스는 오스만 돌궐 지배하에 있었지만, 상당한 자치 권한이 허용되었습니다. 특히 오스만 돌궐과 튀니시 관료, 귀족 간에 혼혈 귀족이 형성되었고, 이들은 후에 후세인(Husainid) 왕조의 중추가 되었어요. 한편, 종주국인 돌궐과 종속국인 바르바리 해적과의 관계는 더욱 강화되어, 튀니스 항구는 이슬람권 해적들의 요충지로 발돋움했어요. 바르바리 해적단들은 스페인 왕국, 포르투갈 왕국,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함대들에 대한 약탈과 노예화가 여전했고, 17세기까지 튀니스 함대는 지중해 전역을 활보했어요.
17세기 말에는 현지 병사 출신 하신 1세(Husayn 1)가 1705년 권력을 독점해 후세인 왕조를 열었어요. 이후 튀니스는 형식상 오스만 돌궐의 술탄의 조공국, 제후국이었으나 실질적으로는 독립적인 군주국처럼 운영되었어요.
(6) 튀니지의 근대 시대 (1881년~1956년)
그러다가 19세기 초가 되었습니다. 전통적으로, 그리고 역사적으로 명나라가 건국된 14세기부터 전세계의 패권국들은 누가 뭐래도 명나라, 대청제국, 티무르 제국, 그리고 오스만 제국 같은 동양 제국들이었습니다. 명나라, 대청제국, 티무르 제국, 오스만 제국은 스페인, 포르투갈, 네덜란드 같은 서구 세력들보다 훨씬 막강한 군사력, 기술력, 경제력으로 세계에 군림했으며 특히 명나라는 세계 남해 대원정으로, 티무르 제국은 세계 최강의 제국 몽골제국의 후신으로, 대청제국은 세계 1위의 기병대 팔기군으로, 오스만 제국은 세계 1위의 보병대 예니체리로 전세계에 최강자들로 각 시대별로 각각 군림했습니다. 하지만 스페인, 포르투갈, 네덜란드의 실패를 딛고 마침내 "대영제국"이라는 완전체가 서구에 등장하면서 "산업혁명"까지 일어나자 결국 근대화라는 새로운 패러다임(paradigm)이 생겨났고 군국주의나 다름없을 정도로 군인들의 힘이 너무나 막강한 탓에 새로운 근대화가 발생하는 게 불가능했던 대청제국(청나라)나 오스만 제국은 각각 대청제국의 경우는 팔기군의 군부독재가, 오스만 제국은 예니체리의 부정부패가 근대화를 반대했습니다.
그러면서 대영제국이 된 영국은 빠르게 성장하여 전통의 강호들이었던 동양 제국들을 추월했고, 19세기 후기부터 본격적인 서세동점이 시작되면서 오스만 제국도 위기를 맞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19세기 초부터는 서구 열강의 세력 경쟁과 서구 열강들 중 가장 군사력이 강했던 "러시아 제국vs대영제국"의 그레이트 게임 속에서 점차 오스만 제국의 영향력이 약화되었으며, 이는 북아프리카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특히 북아프리카에 대한 오스만 제국의 영향력 약화는 이때를 노린 이탈리아와 프랑스의 경제적, 정치적 간섭을 불러왔습니다. 19세기 중엽까지 튀니지는 오스만 제국 내에서도 베이의 상속권 확립 등의 상당한 자치권들을 인정받았으나, 과도한 부채와 농민봉기들로 인해 점차 불안정해졌습니다.
한때는 서방에서 가장 경제력, 기술력, 국방력이 높다는 스페인 왕국, 포르투갈 왕국과 전쟁해서 연전연승할 정도로 스페인 왕국, 포르투갈 왕국의 천적으로 군림했던 명나라, 대청제국(청나라)와 같은 오스만 돌궐이었으나... 이제는 근대시대를 맞아 시대에 뒤떨어진 "종이 호랑이"들로 퇴보했고, 1881년까지 오스만 제국의 영향권이던 튀니스는 바르도 조약을 통해 프랑스 보호령이 되었습니다. 보호령 체제에서 법적으로는 현지 베이가 여전히 군주 지위를 유지했으나, 실질 권력은 상주한 프랑스 거주 총독이 부임하여 맡고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죠. 프랑스는 튀니스의 경제와 교통, 사회 기반을 정비하고 농업, 광산 개발을 추진했으나 토지 소유와 경제는 대부분 프랑스, 이탈리아인 식민자에게 돌아갔어요. 이 과정에서 튀니스 내 교육을 받은 청년 튀니지인 엘리트 운동가들이 형성되어 근대식 개혁과 정치 참여를 요구했어요. 약 20세기 전후쯤으로는 수많은 민족주의 운동들이 등장했으며, 1934년 하비브 부르기바(Habib Bourguiba) 등을 중심으로 신헌법당(Neo-Destour)이 창당되어 독립운동을 주도했어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반식민지 운동이 고조되었고 마침내 약 1956년 3월 20일쯤에 프랑스와의 협상으로 튀니스는 완전 독립을 달성했어요. 부르기바는 초대 총리에 부임했으며 약 1957년 7월 25일쯤에 베이 정치의 군주제는 폐지되어 튀니스 공화국이 세워졌어요. 부르기바는 대통령이 되어 모계적 여성 권리 신장, 가족법 개정, 교육 보급 등의 근대식 계몽주의적 개혁을 추진했어요.
(7) 튀니지의 오늘날
튀니지 독립 이후 하비브 부르기바 시기는 계몽적 개발과 단일당 통치로 특징지을 수 있을거에요. 그는 약 1959년쯤에 헌법 제정으로 공화국 체제를 공고히 하고, 농업 개혁 등으로 경제적 근대화를 추진했어요. 그러나 독재자로 많은 욕을 먹던 하비브 부르기바는 약 1987년쯤에 부통령이던 지네 엘 아비디네 벤 알리(Zine El Abidine Ben Ali)가 내란을 일으켜 내쫓아서 집권하면서 2대 대통령이 되었지요. 벤 알리 정권(19872011년)도 경제 성장과 관광산업 발전을 이루는 한편 정치적 자유는 억압되었습니다. 2011년 "재스민 혁명"으로 벤 알리 정권이 붕괴된 뒤, 튀니지는 2014년 제정된 민주화 헌법 아래 다당제 공화국으로 전환되었다. 이후에도 정치적 불안정과 경제적 불확실성이 있었으나, 교육 수준 향상, 관광 활성화, IT 산업 발달 등으로 사회경제 구조는 꾸준히 변화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