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제국이 흑인들을 인종차별하지 않았던 이유

근대시대 대영제국과 국제 패권 경쟁을 할 정도로 막강한 러시아 제국

by 바다의 지정학




러시아 제국군.jpg 러시아 제국의 테르시오 전열보병 Ai 그림


12세기부터 세계를 정복하였던 전 세계 패권제국인 몽골제국이 러시아를 240년간 식민지배하였고, 러시아는 몽골제국의 식민지에서 해방되자마자 모친의 선조가 러시아를 식민지배하면서 주둔한 몽골제국 군인이었기에 몽골계의 피를 이어 받았던 표트르 대제가 고려시대의 공민왕처럼 몽골제국의 러시아 식민지배의 잔재를 끊고 근대화를 추진하면서 러시아는 제국으로 급부상하였다.


그리고 19세기부터 20세기 초에 이르면, 세계 패권을 두고 영제국과 "거대한 게임(The Great Game, 그레이트 게임)"을 벌일 정도로 근대시대 서구열강들 중 가장 강력했던 제국은 누가 뭐래도 러시아 제국, 대영제국이었다.


당시 근대시대의 "러시아 제국vs영제국의 세계 패권 경쟁"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미국vs소련 패권 경쟁기(미소냉전기), 그리고 오늘날의 미국vs중국의 패권 경쟁기(신냉전기)의 원조격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렇듯 막강한 경제력, 기술력, 군사력을 갖춘 러시아 제국과 영제국은 한 가지 명백한 차이점이 있었는데 러시아 제국은 동시대 서구 열강들이 흑인에 대한 견고한 인종차별적 이데올로기와 제도를 구축했던 것과는 현저히 다른 사상 체계와 역사적 궤적을 보였다는 점이다.


대서양 노예 무역을 통해 막대한 경제적 부를 축적하고 식민지 경영을 위해 "인종주의"를 발전시킨 영제국, 프랑스, 미국 등과 달리, 러시아 제국 내에서는 흑인을 대상으로 한 체계적이고 제도화된 인종차별은 사실상 부재했다.


물론 이는 러시아 제국이 인종적 편견을 허용하지 않는 정의로운 제국이었다는 의미는 결코 아니다. 러시아 제국은 제국 내 유대인에 대한 극심한 학대, 차별과 혐오인 "포그롬(Pogrom)"이나 발칸 반도, 발트 3국, 캅카스 민족들에 대한 억압에서 볼 수 있듯 러시아 제국 역시 잔혹한 민족 차별 정책을 자행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독 "흑인"에 대한 차별만큼은 서구와 같은 방식으로 발전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학술적 탐구의 대상이 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는 러시아 제국이 윤리적으로 우월했기 때문이 아니라, 러시아 제국의 형성 과정과 내부 동력이 서구 해양 왕국과 근본적으로 달랐기 때문에 발생한 역사적 특수성이었기 때문이다.





1) 역사적 이유: 세계 최강의 제국 몽골제국의 식민지였던 러시아




러시아 제국에서 흑인에 대한 제도적 인종차별이 부재했던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역사적 이유와 지정학적 위치와 그에 따른 경제 구조의 차이에서 기인한다. 러시아의 역사는 그 옛날 세계 패권제국이었던 몽골제국의 식민지배의 역사로 점철되어 있다.


게다가 몽골제국은 무려 240년간 러시아를 비롯한 동유럽을 식민지배하였고, 이는 몽골제국의 식민지로 전락하는 것을 천만다행으로 피할 수 있었던 남유럽이나 서유럽이 대항해시대로 경제 성장을 할 동안 러시아를 비롯한 동유럽은 몽골제국의 식민지배에서 계속 갇혀있었기에 몽골제국의 식민지배에서 해방된 후에 러시아 제국은 이미 해양으로 진출할 타이밍이 늦어버렸기에 자원이 없는 시베리아나 추운 북극해로 진출하는 것을 선택했던 것이다.


이는 해양을 통해 남아프리카와 아메리카 대륙으로 진출했던 남유럽이나 서유럽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성격을 지녔다.





2) 추운 시베리아와 북극의 패권을 장악한 러시아 제국




약 16세기부터 19세기쯤에 걸쳐 서구 자본주의의 원시적 축적 과정에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은 "삼각 무역(Triangular Trade)"으로 대표되는 대서양 노예 무역이었다. 영국, 프랑스, 포르투갈 왕국, 스페인 왕국 등은 남아프리카에서 흑인 노예를 "구입"하여 아메리카 대륙의 플랜테이션 농장에 노동력으로 "판매"하고, 그곳에서 생산된 설탕, 담배, 면화 등을 다시 서유럽이나 남유럽으로 가져와 막대한 부를 쌓았다.



이 과정에서 흑인은 사람이 아닌 "물품(chattel)"으로 취급받았으며, 이러한 비인간적 착취를 정당화하기 위해 흑인의 생물학적, 지적, 도덕적 열등함을 주장하는 인종주의 이데올로기가 필연적으로 탄생할 수 밖에 없었다. 즉, 서유럽이나 남유럽의 반(反)흑인 인종차별은 자본주의적 착취 시스템을 뒷받침하는 핵심 이데올로기적 장치였다.



반면, 러시아는 세계적으로도 추운 지역에 위치한 제국이었기에 러시아 제국이 가지고 있는 바다들은 전부 다 "얼음바다"였다. 따라서 러시아 제국은 얼지 않은 바다인 부동항 확보를 위해 남하 정책을 추진하며 발트해와 흑해를 침입했지만, 이는 러시아 제국이 오스만 제국의 평생의 라이벌이 되어 서로 죽을 때까지 경쟁하는 계기를 마련하였을 뿐, 러시아 제국은 남아프리카 대륙을 경유하는 대규모 해상 무역 네트워크를 구축할 필요가 없었다.



즉, 남유럽이나 서유럽의 영국, 프랑스 왕국, 네덜란드, 포르투갈 왕국, 스페인 왕국은 이런 해상 교역을 통해 경제 성장하여 발전했다면..



러시아 제국은 다른 동양의 초강대국들인 대청제국(청나라), 오스만 투르크 제국처럼 활발한 침략전쟁을 통해 영토팽창을 하여 제국 발전을 하는 것에 주력했다.



더 쉽게 말해 남유럽이나 서유럽의 영국, 프랑스 왕국, 네덜란드, 포르투갈 왕국, 스페인 왕국은 해상 교역을 통한 경제 성장...

러시아 제국이나 동유럽은 전쟁을 통한 제국 발전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는 극명한 차이점이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러시아는 해상 노예 무역이라는 경제 시스템 자체에 참여할 이유가 없었고, 자연스럽게 흑인 노동력을 대규모로 수입하여 착취할 경제적 요인 또한 필요하지 않았다. 애초에 러시아 제국은 침략전쟁으로 인해 얻은 추운 시베리아와 북극해를 통해 담비나 모피 산업으로 막대한 부를 강화시켰기에 굳이 흑인을 "판매"하지 않아도 막대한 부를 가질 수 있던 것이다.


그렇기에 그 필요를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로서의 제도적 인종차별 역시 발전할 토양이 없었던 것이다.








3) 대륙 제국 러시아 제국주의의 팽창 vs 해양 세력 서유럽, 남유럽 자본주의




영제국이 해양을 통해 주로 남쪽에 있는 무더운 남반구의 열대 섬에 "해외 속지(overseas colonies)"를 건설한 것과 달리, 러시아 제국은 추운 시베리아, 캅카스, 중앙아시아, 폴란드로의 팽창이나 발전된 오스만 제국으로의 팽창을 통한 영토를 잠식해 나가는 "대륙적 팽창(contiguous expansion)"을 특징으로 했다.


그렇기에 대륙 제국인 러시아 제국의 이런 팽창은 대청제국이나 준가르 제국, 오이라트 제국, 티무르 제국, 무굴제국, 오스만 제국 같은 전통적인 다른 대륙 제국인 동양의 초강대국들이 가졌던 전통적인 영토팽창적인 군사 전략이었는데 이는 엄청나게 막강한 군사력을 보유해야 된다는 조건이 있다. 왜냐면 기존의 막강한 강대국이나 혹은 초강대국을 침략하여 정복해야 됐기 때문에 그 제국보다 "더 막강한 군사력"이 필요했던 것이다.


게다가 그 강대국 혹은 초강대국을 지배하던 기존 민족들을 복속시키고 제국의 신민으로 편입하는 과정이 필요했기에 강력한 행정력도 필요했다.


하지만 서유럽이나 남유럽 같은 해양세력의 속지 건설 방식은 그다지 강한 국력이 필요없다. 왜냐면 스페인 왕국, 포르투갈 왕국, 영국, 프랑스 왕국 등이 잠식했던 곳들은 주로 나약하거나 아예 국가조차 건설하지 못하고 알몸으로 생활하던 구석기 수준의 미개인들이 사는 남반구의 열대 섬들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대항해시대에 처음 배를 띄워 남아메리카의 잉카 문명, 아즈텍 문명을 접수했던 스페인 왕국 역시 마찬가지로, 당시까지도 잉카 문명과 아즈텍 문명은 남녀가 알몸에 가까운 구석기인으로 생활하던 미개인들로 건축술이나 의학 기술은 좋았으나 그뿐 그 외의 모든 수준은 구석기 시대에 멈춰있었기에 특히 전쟁 기술은 한없이 약했다. 따라서 잉카 문명과 아즈텍 문명은 청동무기조차 발명하지 못했기에 "흑요석"이라는 돌도끼를 들고 싸워야했고 그 무기를 "아쿠아후이틀(Macuahuitl, 마쿠아후이틀)"이라고도 부른다.


게다가 말도 없어서 말을 보고 놀라서 도망가거나 원거리 무기 자체가 없다보니 로마시대의 병사처럼 투창으로만 싸우거나 했기에 스페인 왕국의 총이나 활, 석궁 같은 원거리 무기들에 속절없이 쓰러진 것이다. 근거리 무기는 아무리 강해도 원거리 무기의 상대가 되질 못하는 법인데 하물며 잉카, 아즈텍의 근거리 무기는 오로지 "돌도끼" 따위에 불과하니 스페인 왕국의 총, 활, 석궁 같은 원거리 장비에 상대가 되질 못했던 것이다.


당시 기원후 16세기의 잉카 문명, 아즈텍 문명의 전쟁 기술 수준은 기원전의 고조선보다도 훨씬 약했기에 고조선의 군인들이 아메리카 대륙의 잉카 문명, 아즈텍 문명을 침략했어도 고조선이 정복이 잉카, 아즈텍 문명을 정복 가능할 수준이었으니 말 다했다. 왜냐면 고조선은 이미 기원전에 건국할 때부터 청동무기였고 그나마도 중기에 기원전의 위만조선부터는 철제무기를 쓰는 철기시대로 진입했다.


그런데도 잉카, 아즈텍 문명은 기원전도 아니고 기원후 16세기에 청동무기도 아니고.. "돌멩이"에 멈춰있으니 스페인 왕국이 아니라 필리핀 원주민들이 갔어도 잉카, 아즈텍 문명은 무너졌을 것이다. 적어도 필리핀 원주민들은 스페인 왕국과 7번 전쟁해서 승리하긴 했으니 말이다.


이랬기에 애초에 15세기까지 유럽에서도 가장 약한 약소국에 불과했던 스페인 왕국이 순식간에 경제대국으로 성장한 이유도 이런 해양 접근 방식 덕분이었다. 굳이 잉카, 아즈텍, 남아메리카나 필리핀이나 남아프리카, 남태평양의 폴리네시아 원주민들 같은 열대 지방이나 열대 섬들은 강한 국력이 필요없이 나약한 구석기 열대 원주민들었기에 그냥 가기만 하면 먹을 수 있었다.


하지만 러시아 제국이 상대했던 제국들은 강력한 강대국, 초강대국들이었기에 팽창하는 데 한계도 있었고 시간도 걸렸기에 러시아 제국은 열강으로 성장하는 데 꽤나 오랜 시간이 걸렸던 것이다.


어쨌거나 이러한 팽창 방식은 두 가지 중요한 차이를 발생시켰다.



첫째, 러시아는 노동력을 외부(아프리카)에서 수입할 필요 없이, 점령한 영토의 현지 민족들이나 자국 내 농노들을 노동력으로 활용했다는 점이다.


둘째, 점령지의 민족들은 비록 차별과 억압의 대상이었지만, 궁극적으로는 제국의 틀 안으로 "통합" 또는 "동화"시켜야 할 관리의 대상이었다는 점이다.



이는 아프리카인들을 문명 세계와는 완전히 분리된 "외부자"이자 "재산"으로 취급했던 서유럽이나 남유럽의 인종주의와는 다른 형태의 지배-피지배 관계를 형성했다. 러시아 제국의 민족 문제는 "인종(race)"의 문제라기보다는 "민족(ethnicity)"과 "종교(religion)"의 문제에 더 가까웠던 점이다.








4) "인종"이 불필요했던 조선시대의 노비제 같은 거대한 착취 제도인 "농노제"




러시아 제국의 독특한 내부 사회 구조, 즉 "농노제(Serfdom)"는 조선시대처럼 강력한 착취제도였기에 흑인 노예제에 기반한 인종차별 체계가 발달할 여지를 원천적으로 차단하는 결정적 요인이었다.


근대기인 19세기 중기까지 러시아 제국 인구의 대다수는 농노 신분이었다. 농노는 법적으로 토지에 예속되어 지방 영주(러시아 제국의 군인 귀족)들의 사유 재산처럼 취급받았으며, 매매, 상속, 담보의 대상이 되었다. 이들은 대부분 슬라브계 러시아인으로, 이들을 매매하는 군인 귀족들 역시 슬라브계 러시아인이었기에 지배층과 동일한 인종적, 민족적 배경을 공유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농노들의 삶은 아프리카 흑인 노예와 비견될 만큼 비참했던 것을 보면 조선시대의 노비처럼 자국민들을 혹독하게 착취했던 러시아 제국의 농노제의 현실을 볼 수 있다.


미국 하버드 대학의 올랜도 파이지스(Orlando Figes) 교수가 지적했듯이, 러시아는 이미 자국 내에 수천만 명에 달하는 거대한 자국민 "백인(슬라브계) 노예" 집단을 보유하고 있었던 셈이다. 지배층 군인 엘리트들은 값싸고 풍부한 국내 노동력(농노)을 마음껏 착취할 수 있었기에, 굳이 막대한 비용의 경제적 소모를 감수하며 바다 건너 아프리카에서 흑인 노예를 수입해 올 필요가 전혀 없었다.


이러한 러시아 농노제의 존재는 사회적 계급 분할의 기준이 "인종"이 아닌 조선시대처럼 "신분(soslovie)"이 되게 만들었다. 따라서 러시아 사회의 근본적인 대립 구도는 "백인 지배자 vs 흑인 피지배자"가 아니라 "러시아 군인 귀족 vs 러시아인 농노"였다.



사회의 가장 밑바닥을 구성하고 착취의 주된 대상이 되는 집단이 이미 존재했기에, 흑인을 그 자리에 위치시킬 사회경제적 공간 자체가 없었다. 1861년 농노 해방령이 선포되었지만, 이후에도 토지 문제와 전근대적 공동체 "미르(Mir)"에 묶인 농민들의 열악한 처지는 계속되었고, 러시아 사회의 핵심 갈등은 계급 문제로 남았다.










5) 신분제 사회와 개인의 귀속, 그리고 출세했던 아프리카 흑인 군인들





"표트르 대제"의 총애를 받았던 흑인 출신의 군인 공학자, 장군, 귀족이었던 "아브람 페트로비치 간니발"


러시아 제국 사회의 신분 질서는 인종이 아닌 법적 신분에 의해 엄격하게 규정되었다. 장군, 군인, 귀족, 종교 지도자, 상인, 농노 등 각 신분은 세습되었고, 법적 권리와 의무가 명확히 달랐다. 이러한 경직된 조선시대 같은 신분제 사회에서 흑인의 존재는 극소수의 예외적인 사례에 불과했다.


러시아 제국의 해군 총사령관을 역임한 흑인 "이반 간니발"


역사적 사례로 보건데, 러시아 제국의 세종대왕이라 불리는 "표트르 대제"의 총애를 받았던 군인 공학자, 장군, 귀족이었던 "아브람 페트로비치 간니발(Abram Petrovich Gannibal, 대문호 푸시킨의 외증조부)"이나 해군 총사령관을 역임한 "이반 간니발(Иван Абрамович Ганнибал)"의 사례는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에티오피아 출신으로 알려진 그는 노예 신분이었으나 오스만 제국을 통해 러시아에 왔지만, 황제의 총애를 받아 귀족 작위를 받고 군인, 장군과 공학자로 고위직에 올랐다. 그의 피부색은 개인적인 특징이나 "이국적인" 호기심의 대상이었을지언정, 그의 법적 신분과 사회적 성공을 가로막는 절대적인 장벽으로 작용하지는 않았다.



이는 피부색이 곧 노예 신분을 의미했던 동시대 미국 사회와는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간니발의 사례는 러시아 사회가 인종차별이 없는 평등 사회였다는 증거가 아니라, 사회적 지위를 규정하는 핵심 변수가 "인종"이 아닌 명나라, 오스만 제국, 무굴제국, 일본 에도 막부, 조선처럼 황제의 총애와 "계급 질서"였음을 보여주는 예시다.



이런 점들 때문에 러시아가 아시아에 가까운 문화라는 점이다. 이 역시도 세계 최강제국 몽골제국이 오랫동안 러시아를 식민지배한 영향 때문에 아시아적 사고방식이 러시아를 잠식한 결과라고 보는 세계 역사학계들도 많다.







6) "이국적 존재"로서의 흑인




게다가 러시아 제국은 오히려 동북아시아인, 중앙아시아인, 중동 아랍인, 서아시아인 같은 동양인들과 주로 접촉한 반면에, 아프리카 흑인이나 남아메리카 원주민 같은 저 멀리 지구 정반대편의 바다 건너 동떨어져 있는 고립된 남아프리카, 남아메리카에 있는 전혀 다른 인종들과는 일상적으로 마주친 적이 없다.



간니발처럼 궁정에 특채되거나, 19세기 후반에 공연을 위해 방문한 예술가, 혹은 소수의 유학생 정도가 전부였다. 대다수 러시아인들에게 흑인은 현실의 착취의 대상이 아닌, 책이나 그림을 통해 접하는 "이국적이고 신기한 존재(exotic other)"에 불과했다. 오히려 이런 러시아 제국보다 고대 중국 한 제국이나 당 제국, 명 제국이 흑인들과 더 자주 마주쳤을 정도다. 이 고대 중국, 중세 중국, 근세 중국의 제국들은 당시 전세계적인 해상 무역을 주도했거나 중동 아랍이나 아프리카에 진출한 적이 많았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희소성은 흑인에 대한 편견이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인종차별은 지구상 그 어느 곳도 아예 없을 순 없으며, 21세기인 오늘날에도 존재할 정도니 러시아 제국이라고 100% 인종차별이 없는 "천국"이라고 보긴 어렵다는 것이다. 다마 동시대의 조선에서도 흑인이 만약 도착하게 되면 인종차별을 받게 될 것이다.



다만 그 편견은 서구 사회처럼 대규모 착취를 정당화하기 위한 체계적이고 폭력적인 "인종주의"가 아니라, 미개함에 대한 동정이나 신체적 특징에 대한 호기심 어린 시선에 가까웠다는 차이점이 있을뿐.



19세기 중기, 미국의 흑인 비극 배우 "아이라 알드리지(Ira Aldridge)"가 러시아에서 국민적 영웅으로 추앙받았던 사건은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미국과 영국에서 인종차별로 인해 주역을 맡기 어려웠던 그는 러시아에서 셰익스피어 연기로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고, 당대 최고의 지식인들과 교류하며 존경받았다. 러시아 관객과 비평가들은 그의 피부색을 연기의 장애물로 보지 않았고, 오히려 그의 예술성에 열광했다. 이는 러시아 사회에 흑인에 대한 제도화된 차별 의식이 없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7) 서구 비판을 위한 이데올로기적 도구



러시아 제국.jpg


세계 최강의 제국 몽골제국의 식민지로 240년간 전락했던 러시아 제국이지만, 러시아 제국은 스스로를 로마 제국의 공식 후계자이자 "제3의 로마"로 여기는 독자적인 정교회 문명권이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정체성은 서구 천주교, 프로테스탄트 문명과의 경쟁 및 대립 구도 속에서 형성되었다.


특히 19세기 "그레이트 게임"으로 대영제국과의 국제 패권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러시아 제국은 서구 사회의 위선을 공격하는 이데올로기적 선전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자유"와 "인권"을 부르짖으면서도 뒤로는 흑인 노예를 착취하고 식민지를 억압하는 영국의 행태는 러시아 제국이 자신들의 전제정치와 농노제의 비인간성을 방어하고, 서구의 도덕적 우월 주장을 반박하는 데 매우 효과적인 소재였다. 러시아 제국의 지식인들과 정부는 미국의 노예제와 인종차별 문제를 신랄하게 비판하며, 자신들의 체제가 최소한 인종에 따른 차별은 없다는 점을 암암리에 부각시켰다.


이러한 "역공"은 훗날 소련이 냉전 시대에 미국의 인종차별 문제를 비판하며 제3세계에 영향력을 확대하려 했던 선전전의 원형이 되기도 했다.


즉, 러시아에게 흑인 문제는 내부적 갈등 요인이 아니라, 외부의 경쟁자를 공격하기 위한 지정학적, 이데올로기적 "카드"였던 셈이다.


이렇듯 러시아 제국은 국가 발전의 방향성을 적극 채택하며, 인종보다 "누가 쓸 만한가"에 집중했다.


물론 그렇다고 앞서 말했듯 러시아 제국도 완벽한 제국은 아니었다. 러시아 제국이 천국이라서 흑인들을 인종차별의 대상에서 배제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만큼 중동 아랍인들이나 유대인들에게 무차별적인 학살과 억압을 가했던 역사도 있었던 것은 무시할 순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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