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래 인류 역사상 짧은 평화기들은 있었다. 하지만 그 평화기들은 패권국이 등장해야만 성립이 가능했고, 패권국이 저물어갈 때는 항상 다시 지구는 혼란해졌다.
고대시대로부터 따져보자.
당시 고대시대에는 아직 전 세계를 아우르는 패권국은 없었지만, 아시아의 패권국이었던 고대 중국 한나라가
몰락하자 삼국시대를 비롯하여 각종 투르크계 대제국들이 우후죽순 중국 대륙에 건국되면서 한족계 대제국들과 치열한 패권전쟁을 펼쳤다.
서구의 경우도 상황이 별반 다르지 않았는데, 지중해를 아우르던 로마가 훈족의 아틸라를 비롯해서 각종 이민족들의 침입과 내부의 봉기, 분열들로 인해 결국 서서히 망해가자 이른바 중세시대라고 불리는 시대가 되면서 유럽의 신생 왕국들이 생겨나 로마를 먹으려고 눈에 쌍불을 그리고 서구는 15세기까지 서로 싸우면서 국력을 소모해 갔고 그렇기에 로마보다 군사력이 더 약해진 유럽 왕국들은 이민족의 침입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중세시대에는 인류 역사상 최초의 세계 패권국인 대원제국(원나라)이 세계를 지배하였으나 대원제국의 몰락과 함께 원명교체기, 그리고 전 지구적인 전쟁들이 빗발쳤다.
근세시대의 다음 패권국인 영국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1, 2차 대전으로 영국의 패권이 저물어가기 시작하자 미국의 흥기와 함께 평화는 곧 깨졌다.
그리고 오늘날 미국의 패권이 흔들리자 다시 지구는 전쟁의 조짐들이 나타나고 있다. 이는 결코 좋은 징조가 아니다.
이렇듯 인류 역사상 유일한 "평화 시대"가 바로 냉전이 끝난 후부터 지금까지였는데 지금은 이제 러시아군의 우크라이나 침략과 동시에 지구는 다시 전쟁의 시대로 돌입해가는 분위기다. 뿐만 아니라 오늘날은 인구수가 급속도로 증가하면서 전쟁에 각종 이념 분쟁까지 치열하다.
하지만 여기서 간과하면 안될 것이 인류의 역사는 전쟁의 역사임과 동시에 "강간의 역사"라는 것이다. 이게 무슨 소리야? 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세계사 교과서 등에는 차마 너무 잔혹해서 대놓고 기록하진 못하는 경우들이 많지만 사실 전쟁터에서 강간은 일상이나 다름없었다. 오늘날처럼 전쟁이 거의 명맥이 끊긴 시대에서는 강간은 내부 문제였지만 실상 인류 역사에서 강간은 외세의 침략과 함께 찾아오는 식민주의적 산물이나 마찬가지였다.
대표적인 사례들을 살펴보자.
하지만 여기서 간과하면 안될 것이 인류의 역사는 전쟁의 역사임과 동시에 "강간의 역사"라는 것이다. 이게 무슨 소리야? 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세계사 교과서 등에는 차마 너무 잔혹해서 대놓고 기록하진 못하는 경우들이 많지만 사실 전쟁터에서 강간은 일상이나 다름없었다. 오늘날처럼 전쟁이 거의 명맥이 끊긴 시대에서는 강간은 내부 문제였지만 실상 인류 역사에서 강간은 외세의 침략과 함께 찾아오는 식민주의적 산물이나 마찬가지였다.
프롤로그) 세계사의 대표적인 식민주의적 폭력 사건들
1) 고대 로마의 건국이었던 사비니 여인들 납치, 강간 사건
시기: 기원전 753년쯤~로마 멸망
프랑스 화가 자끄 루이 다비드가 1799년에 그린 그림인 "사비니 여인들의 개입(Intervention of the Sabine Women)"
로마는 작은 도시 국가로 탄생하여 지중해를 먹은 대국으로 성장했다. 이런 고대 로마의 건국 사건(혹은 신화) 가운데 하나인 "사비니 여인들의 납치, 강간 사건"은 이러한 폭력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건국 초기 로마는 마치 조선 초기의 왜구들 같은 양아치 집단에 불과했고 틈만 나면 골족에게 얻어맞거나 약탈을 당하기 일쑤였던 그야말로 약소국에서도 약소국이었다.
이런 로마는 자국내 여인들이 부족해지자, 로마인들은 이웃 부족인 사비니족을 축제에 초대한 뒤 그들의 딸들을 집단적으로 납치하여 아내로 삼고 집단으로 강간했다. 후대의 역사 학자들은 이를 로마의 인구를 늘리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조치였다고 쉴드를 치기도 하지만, 이는 명백한 집단 성폭력, 강간이자 미개적인 행위였다.
하지만 로마군들이 영토를 먹어나가면서 속지의 여성들에 대한 끊임없이 강간, 성폭력들은 일상적으로 자행되었다. 역사 학자 리비우스(Livy)의 기록에 따르면, 마을이나 도시를 먹은 로마 병사들에게 약탈과 함께 여성에 대한 성폭력이 허용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고 한다. 이는 속지가 된 이민족들에게는 극심한 공포와 굴욕감을 안겨주어 저항 의지를 꺾는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그 결과, 수많은 여성들이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겪었으며 원치 않는 임신과 출산들을 통해 태어난 아이들은 정체성의 혼란 속에서 살아가야 했다.
2) 고대 로마제국을 멸망까지 몰고간 흉노의 일파 아틸라의 로마제국 침략, 식민 폭력
시기: 고대시대 5~6세기
흉노족 아틸라의 최강 기병군단의 로마제국 침략을 다룬 전쟁 게임 "아틸라 토탈워"
하지만 로마를 욕만 할 수가 없는 것이, 로마제국은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이기도 했다. 로마제국은 역사 내내 끝없이 침략을 당했고 강간도 당했다.
특히 로마제국보다 훨씬 강력한 군사력을 가진 흉노의 일파인 아틸라가 로마제국을 침략하면서 이런 로마에 대한 식민 폭력은 극대화됐다.
4세기 후반, 중앙아시아~동북아시아에서부터 온 흉노제국의 일파인 훈족은 유럽으로 이동하며 그 일대를 모조리 정복하여 게르만족의 대이동까지 촉발시켰고, 이는 서로마 제국 멸망의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 특히 5세기 흉노의 아틸라가 이끄는 훈족은 압도적인 기동력과 잔혹함으로 "신의 채찍"이라 불리며 유럽 전역을 공포에 떨게 했다. 그들의 침략은 단순한 영토 확장을 넘어, 파괴와 약탈 그 자체에 목적이 있는 듯 보였다.
흉노 아틸라의 군대는 갈리아(현재의 프랑스)와 이탈리아 북부까지 침공하며 수많은 도시를 파괴했기에 당시 기록들은 훈족이 지나간 자리는 풀 한 포기 남지 않았다고 묘사할 정도로 그들의 잔혹성을 강조한다.
로마의 역사가나 후대의 기독교 저술가들은 훈족의 악행들을 상세히 기록했는데, 여기에는 방화, 학살, 약탈과 함께 여성과 수녀들에 대한 폭력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특히 451년 메츠(Metz) 시가 함락되었을 때, 도시의 거의 모든 주민이 학살당하고 여성들은 훈족 군단들의 노리개가 되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흉노의 일파인 훈족의 로마제국 침략에서 알 수 있는 사실은 중앙아시아의 유목민적 전시 문화와 관련이 깊다. 정주 문명과 달리 생산 기반을 파괴하고 약탈을 통해 부를 축적하는 흉노족 같은 중앙아시아 몽골계-튀르크계의 군단들에게 있어 점령지의 여성은 또 다른 형태의 "전리품"이었다. 또한, 아틸라는 의도적으로 공포를 조장하여 적군의 저항 의지를 꺾는 전략을 사용했다. 여성에 대한 무차별적인 식민 폭력은 로마인들에게 문명이 야만에게 짓밟힌다는 극도의 공포감과 무력감을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이러한 잔혹 행위는 결과적으로 서유럽 사회에 깊은 상처를 남겼고, "흉노" 또는 "훈족"이라는 이름은 오랫동안 로마제국을 파괴한 제국주의적 대명사로 남게 되었다.
3) 세계 패권국인 대원제국(원나라)이 이집트 맘루크, 일본, 동남아시아까지도 침략 후 자행한 식민주의적, 제국주의적 악행들
시대: 중세시대 12~13세기
대원제국(원나라)이 보낸 고려, 송나라 해군함대의 침략에 저항한 일본 가마쿠라 군부 배경 명작 게임 "고스트 오브 쓰시마"
13세기 중세시대의 세계 정복자인 칭기스칸에 의해 건국된 대몽골제국은 세계를 정복하여 세계 인류 역사상 가장 광대한 세계 제국을 이룩했다. 대몽골제국은 세계를 정복하는 과정에서 군사 전술로 "초토화 작전"을 주로 개시했는데, 주 목적은 정복 대상이 된 제국이나 국가는 군대를 포함하여 아예 국가(제국) 자체를 완전히 "멸절"시키는 완전히 극단의 광기가 담겨있는 군국주의적 작전이었다.
특히 몽골제국을 계승한 쿠빌라이 대칸이 건국한 대원제국 역시도 이런 몽골제국의 초토화 작전을 계승하여 중국 대륙 전역을 식민 지배하며 고려를 식민지로 삼고, 베트남, 미얀마 등 동남아시아와 일본, 심지어는 이집트의 맘루크 왕조에까지 원정군을 보내며 무자비한 집단 학살들과 식민 폭력들을 자행했다. 이러한 몽골제국군의 정복 전쟁들은 세계 1위의 빠른 기동력과 함께, 저항하는 제국들에 대한 철저한 파괴와 학살로 세계사에서 가장 악명이 높다.
몽골제국이 침략한 각 제국(국가)별 사례와 전개:
(1) 맘루크 왕조 (이집트): 제국주의적, 식민주의적 광기로 가득찬 몽골제국군의 침략은 북아프리카 지역까지 미쳤다. 1260년 아인 잘루트 전투 전까지, 몽골제국군은 중동 이슬람 제국들을 모조리 정복하면서 바그다드까지도 함락시키고 파괴와 대학살을 자행하는 등 이슬람 세계를 완전히 파괴했으며, 심지어 북아프리카의 맘루크 왕조까지 침략하여 이런 제국주의적, 식민주의적 광기를 이어나갔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맘루크조 여성들이 식민 폭력에 죽어나갔다.
(2) 일본 (가마쿠라 군부): 대원제국(원나라)은 자신들의 식민지인 송나라, 고려에 강제 징병령을 내려 송나라와 고려의 해군 함대들을 동원하여 일본을 2번이나 원정 공격했는데, 이 과정에서 원정군은 일본의 상륙 지점마다 끔찍한 식민 폭력, 제국주의적 악행들을 자행했다. 일본 측 기록에 따르면, 이들은 모든 주민들을 학살하고 여성들의 손바닥에 구멍을 뚫어 밧줄로 꿰어 끌고 가서 노예 시장에 팔아버리는 등 사악한 행위들을 일삼았으며, 이런 제국주의적이고 식민주의적 식민 폭력은 일본 원정 당시에 매우 빈번하게 일어났다고 한다. 이 역사적 부분은 게임 "고스트 오브 쓰시마"에도 자세히 표현되어 있다.
(3) 동남아시아 (미얀마, 인도네시아 등등등): 당시 세계 패권국인 대원제국은 동남아시아까지도 침략하여 미얀마의 버간 왕조를 아예 정복하여 식민지 주둔군인 다루가치가 주둔하게 했으며, 현재 인도네시아 자바 섬에도 해군 함대들을 동원한 해상 원정군을 투입하는 등 동남아시아의 수많은 국가들을 침략, 정복, 식민지배, 침략했다. 이 과정에서도 정복지, 침략지들에서의 약탈과 침탈, 식민 폭력은 대원제국 해군 함대의 일반적인 군사 관행처럼 자행되었다.
(4) 베트남 (쩐 왕조): 대원제국은 세 차례에 걸쳐 베트남을 침략하면서 침략 과정에서 정복하거나 점령한 성, 요새, 도시, 마을들을 모두 파괴하고 대대적인 약탈과 함께 부녀자들에 대한 식민 폭력도 같이 자행했다. 이는 베트남인들의 필사적이고도 생존을 건 격렬한 저항을 불러일으키는 직접적이고도 대표적인 요인들 중 하나가 되기도 했다.
이렇듯 대원제국군의 정복 전쟁에서 제국주의적, 식민주의적 폭력들은 조직적인 공포 정치의 수단으로 작용했다. 항복하지 않고 저항하는 국가, 제국들은 세대, 나이, 성별 불문하고 철저하게 파괴하여 다른 제국들에게 알아서 먼저 항복하라며 본보기로 삼았다. 이러한 여성에 대한 제국주의적, 식민주의적 학살, 폭력, 납치들은 정복당한 민족의 혈통을 더럽히고 자존심을 짓밟아 영원히 정복, 식민지 통치하려는 강력한 군사적, 정치적인 계산도 있다.
하지만 이러한 제국주의적, 식민주의적 폭력들은 전 세계에 대원제국에 대한 뼈저린 적개심들을 남겼으며, 이는 대원제국이 전 세계를 식민지 지배하면서 통치했던 전 세계 식민지 국가들이 대원제국이 각종 내전, 군사 쿠데타 등으로 혼란해지고 쇠락하기 시작하자, 너나 할 것 없이 전 세계 식민지들이 동시에 독립운동들을 하게 되는 강력한 원동력이 되었다.
이는 19세기 제국주의 국가들이 1, 2차 대전으로 쇠락하자 그동안 각종 폭력에 시달렸던 식민지들이 독립운동을 일으킨 것과 굉장히 비슷하다.
4) 종교의 이름 아래 행해졌던 프랑스 왕국과 잉글랜드 왕국의 군용 위안부들
시기: 14~15세기
서유럽, 남유럽에서 굉장히 많았던 "창녀 매춘소"를 그린 1562년 요아힘 보우켈라어의 "매춘소"
중세 유럽은 봉건제 사회로, 동시기의 중세 일본, 고대 중국 삼국시대, 고려시대처럼 각지의 영주들이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전쟁은 빈번했지만, 군대의 규모나 보급 능력은 매우 제한적이었다. 군대는 주로 영주에게 충성을 맹세한 기사들과 용병들로 구성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중세 유럽은 종종 전쟁할 때 "캠프 팔로워(Camp follower)"라 불리는 집단을 대동했는데, 이 집단에는 병사들의 아내나 가족도 있었지만, 상당수는 창녀, 매춘부들이었다. 이들은 병사들에게 음식, 세탁 등의 서비스를 제공하지만 사실상 주로 제공하는 서비스는 바로 성욕을 해소해주는 역할이었다.
이러한 현상이 나타난 배경에는 당시 유럽 군대의 보급 체계가 미비했기 때문에 비공식적인 서비스 인력이 필요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는 학자들도 많다.
하지만 가장 직접적인 점은 중세시대의 유럽은 군사력이 당시 매우 세계적으로 약했기에 현지에서 적국의 여자들을 강간할 만큼 강력하진 못했기 때문도 있다. 유럽과 싸우는 국가들이 그만큼 방어를 잘했기도 했고 유럽이 약했기도 했으니까.
하지만 이것이 유럽 군대가 현지 여성들을 아예 강간하지 않았다는 의미는 결코 아니다. 현지 여성들보다 주로 캠프 팔로워 창녀, 매춘부들을 이용했지 절대 안 했다는 의미는 아니니까 말이다. 물론 당시 유럽인들은 미개인들이나 마찬가지라서 캠프 팔로워의 창녀, 매춘부라고 해도 강간하는 경우도 많았다.
어쨌거나 기록으로 보자면 백년전쟁 당시 프랑스와 영국 양측 군대가 서로의 영토에서 벌인 강간에 대한 기록은 수없이 많다. 특히 이교도 민족에 대한 전쟁에서는 성폭력이 더욱 잔혹한 양상으로 나타났다.
유럽 군대들이 "창녀들을 데리고 다녔다"는 사실은, 군대의 성욕 해소 문제가 당시 유럽에서 매우 중요한 문제였음을 보여주는 것이지, 그것이 적국의 여성에 대한 폭력이 없었음을 증명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아까도 설명했듯 이는 유럽의 군사력이 매우 약했기에 점령지에서 효과적인 성욕 해소가 어려웠기에 내부적으로 성욕을 해결하려는 하나의 방식이었을 뿐, 유럽은 틈만 보이면 언제든 적국의 여성을 향한 성폭력으로 전환하기도 했다.
재밌는 점은 기독교 교리는 성폭력을 죄악으로 규정했지만, 전쟁이라는 극단적인 상황 속에서, 특히 이교도나 적국의 여성에 대한 폭력은 신의 이름 아래 정당화되기도 했다. 아니 오히려 이런 기독교 국가들이 성폭력에 가장 앞장섰으며 후술하겠지만 인류 역사상 가장 거대한 "강간, 성범죄"는 대항해시대에 스페인, 포르투갈인들에 의해 벌어졌던 것만 봐도 기독교 교리가 이 서구인들의 성욕을 막지는 못했던 것 같다. 여튼 이런 강간은 지역 공동체를 파괴하고, 전쟁의 참상을 더욱 깊게 만드는 결과를 낳았으니 비극이다.
5) 대항해시대 스페인 왕국과 포르투갈 왕국의 강간 "라틴 아메리카 인종의 탄생"
시기: 근세시대 16세기
대항해시대의 스페인 사람들이 잉카 문명, 아즈텍 문명의 남녀처럼 벌거벗고 사는 까리브 해 섬주민들을 "첫 발견"하는 걸 그린 그림
서구는 15세기까지 구대륙에서 가장 약소국의 위치에 있었다.
그러던 가운데 15세기 후엽쯤, 스페인 왕국과 포르투갈 왕국을 필두로 한 남유럽 왕국들은 새로운 향신료를 찾아 항로를 개척하고 신대륙인 남아메리카에 도달했다.
스페인 왕국과 포르투갈 왕국의 꽁끼스따도르(침입자)들은 잉카, 아즈텍인들 같은 남아메리카 원주민들을 사람 이하의 생물로 취급하며 수많은 원주민 여자들을 성폭행했다. 잉카인, 아즈텍인, 그리고 브라질 아마존의 원주민 남자들은 금광이나 사탕수수 농사에서 강제 노역에 시달리다 죽어갔고, 잉카, 아즈텍, 브라질 원주민 여자들은 스페인 침입자들의 성노예들이 되었다.
대표적인 사건이 있는데 본래 브라질 아마존 지역에서만 원주민들이 16세기까지는 450~500만명이 살았다고 한다. 당시의 프랑스 인구수가 800만명이고 영국이 600만명이니 매우 많은 셈이다. 그러던 와중에 수염을 잔뜩 기른 스페인인들이 총과 활 같은 원거리 도구들을 들고 온 것이었다.
무기래봤자 기껏해야 돌멩이나 나무 창밖에 없던 구석기인들이던 잉카인이나 아즈텍인, 그리고 브라질 아마존 원주민 사회는 원거리 무기가 제대로 없어서 대항할 수도 없었고 지구상에서 가장 습하고 무더운 열대 지방인 브라질에서 생활했기에 알몸으로 생활하던 아마존 원주민들은 추위라는 개념 자체를 아예 모르니 감기에 걸릴 일이 없었는데 스페인인들이 데리고 온 "감기"라는 질병에 걸리자마자 바로 속수무책으로 떼죽음을 당한 것이다.
그리고 이런 수염이 잔뜩 길었던 총과 활을 든 스페인인들은 브라질 아마존의 뿌뚜마요 열대 강 근처까지 도달해서 그곳에 사는 오까이나 안또끼, 보라 원주민 남자들을 납치해서 먹이지도, 재우지도 않고 채찍으로 엉덩이를 때려가며 고무 나무액 채취하게 시켰다.
이렇게 가혹하게 노동 혹사를 시키자 결국 브라질 원주민 남자들은 씨가 말랐고 결국 스페인인들은 그곳 근처에 있는 "잘룸보"라는 브라질 아마존 원주민 여자들을 납치해서 울타리에 가둬놓고 성노예로 만들어 임신할 때까지 돌아가며 강간했고, 그렇게 태어난 남자 아기들은 움막에서 먹여 키우게 했고, 여자 아기가 태어나면 가져다 버리거나 움막에 남은 여자들에게 던져줬는데 거의 다 죽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성인이 된 브라질 아마존 원주민 남자들을 다시 고무나무를 긁은 노예로 삼았던 것이다.
이러다 보니 잘룸보 원주민 여자들은 10명씩 다니며 스페인 사람들을 피해 정글 깊숙이 도망쳐 들어가 말로까를 짓고 살게 됐고, 무서워서 혹시나 싶어 여자 아기들만 낳고자 약초도 먹고 남자 아기만 태어나면 젖뗄 나이가 되면 인근의 브라질 남자 원주민들이 있는 움막에 아기를 준다. 임신의 경우에는 가끔 흘러들어오는 남자들과 잠자리를 하고 난 후에 움막에서 나가게 하거나 아니면 인근의 브라질 남자 원주민 움막으로 가서 얼마간 성행위를 마친 후 돌아오는 식으로 해결하는 것이라고. 이렇게 브라질에서 진짜 여자들로만 이뤄진 왕국, "잘룸보" 원주민 사회가 탄생해버린 것이다.
게다가 콜럼버스가 2차로 항해하던 시기에 같이 간 죽마고우인 "미껠레 데 꾸네오(Michele de Cuneo)"라는 사람이 쓴 편지 내용에 이런 스페인인들이 캐리브 해 열대 섬의 원주민 여자들을 심심찮게 성적 착취하던 현실이 잘 써있다. 콜럼버스 일행이 2차 항해하던 시기에 알몸의 원주민 여자들이 카누를 타고 콜럼버스의 배에 다가왔는데 콜럼버스는 스페인으로 데려갈 캐리브 해 원주민들이 필요해서 그녀들을 배에 데려오게 됐다.
그리고 미껠레 데 꾸네오는 편지에 이런 내용을 썼다. "보트에 있었을 때 아주 아리따운 식인종(캐리브 해 열대 섬 원주민) 여자를 데려오니 선장(콜럼버스)가 주더라구. 선실로 데리고 갔는데 역시 이곳 원주민들 답게 알몸이길래 내 성욕을 풀려고 했지. 옷을 벗으려고 하니 나를 때리더라구. 그래서 나는 밧줄을 잡아다가 이 식인종 원주민 여자를 후려쳤더니 신음을 지르더라구. 어쨌든 결국에는 반항은 그쳤는데, 내 장담컨데 무슨 창녀 전용 학교에서 자란 것 같은 여자였다니까."
이후에도 미껠레는 매우 노골적인 성적 표현이나 높은 수위의 성적 얘기들을 편지에 썼는데 그건 빼고 딱 여기까지만 가져와 봤다.
게다가 엥꼬미엥따(Encomienda)와 같은 시스템은 원주민에 대한 성적 착취를 합법화하는 시스템이었다. 이 제도하에서 스페인 탐험자들은 잉카인, 아즈텍인, 브라질 아마존 원주민 남녀들을 "보호하고 기독교로 개종시킨다"는 명분 아래 사실상 성노예처럼 부렸으며, 이 과정에서 수많은 여자들은 스페인인들에게 일상적인 성폭력에 노출되며 성노예가 되었다. 그녀들은 원치 않는 임신과 출산을 해야했으며, 이렇게 태어난 아이들은 본래 정상적이라면 지구상에 태어나서는 안 될 "메스티쏘(Mestizo)'라 불리는 새로운 돌연변이 인종 집단을 탄생하게 했다.
이렇듯 스페인인들에 의해 잉카, 아즈텍, 브라질 아마존 원주민 여자들에 대해 납치, 감금, 강간, 성매매, 성적 착취, 강제 임신과 출산은 매우 빈번하게 이뤄졌으니, 그 결과가 현재 남아메리카의 인종이 "메스티쏘인"이 된 것이다.
여기 목록에 나온 국가들 가운데 가장 많은 여자들을 성폭행한 국가가 바로 스페인 왕국, 포르투갈 왕국이다. 이게 어떻게 가능했을까? 앞에 나온 얘기들에 힌트가 있다. 1번에서 7번까지의 사례들은 문명국을 식민지배한 경우들이 대부분이다. 그렇기에 저항이 굉장히 심했다. 하지만 라틴 아메리카의 경우는 잉카 문명, 아즈텍 문명은 신대륙에서 유일하게 "그나마" 문명국에 속하긴 했지만 16세기까지도 알몸으로 생활하면서 기껏해야 무기로 돌멩이를 쓰던 구석기인 수준이었고 브라질 아마존 원주민들이나 캐리브 해 열대 섬 원주민들은 얘기해 뭘 하나 그냥 알몸으로 돌아다니던 구석기인 그 자체였다.
그러니 쉽게 얘기해서 양심의 가책만 없다면 그저 곤충을 짓밟는 것보다 쉬운 일이었다. 그러니 스페인인들이나 포르투갈인들은 힘들고 고단하게 배를 타고 라틴 아메리카까지 건너와서 지루하고 심심할 때면 보이는 알몸의 잉카인, 아즈텍인, 브라질 아마존 원주민 여자들을 성적 착취하며 강간하면서 놀았던 것이다.
이렇기에 라틴 아메리카에서의 성폭력은 인종주의와 식민주의가 결합된 가장 대규모 형태의 성폭력이었다. 스페인인과 포르투갈인들은 자기들의 혈통을 좋게 생각하면서도, 유흥과 노동력을 확보하기 위해 잉카, 아즈텍, 브라질 아마존 원주민 여자들과의 사이에서 자녀를 낳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던 이중적인 면모를 보였던 것이다. 이는 현지 잉카, 아즈텍, 브라질 아마존 원주민 남자의 자존심을 낮추고, 그들의 가족을 망가뜨리려는 의도도 있었다.
그 결과, 라틴 아메리카는 현재 지구상에서 가장 복잡한 인종 분포를 가진 짬뽕 인종이 되었다. "메스티쏘"의 탄생은 단순한 인종의 짬뽕이 아니라, 강간과 성폭력, 그리고 생존을 위해 저항했지만 실패해버린 아픈 라틴 아메리카 역사의 산물이다.
6) 19세기 서구열강이 벌인 식민지 성폭력
시기: 근대시대 19세기~20세기
1848년쯤 프랑스에서 태어난 탈인상주의 그림계의 거장 "폴 고갱(Paul Gauguin)"의 그림 가운데 그나마 선정적이지 않는 1891년 그림 "타히티의 여인들"
서구에서 스페인 왕국과 포르투갈 왕국뿐만 아니라, "신사의 나라"로 불리던 영국과 "자유, 평등, 박애"를 외치던 프랑스 역시 근대 시대에 자기들이 먹은 지방에서 수많은 여자들에 대해 성폭력들을 자행했다. 이는 단순한 개인의 일탈이 아닌, 그곳 현지 원주민들의 저항 의지를 꺾기 위한 방법이었다. 특히 이런 영국군과 프랑스군에게 강간을 가장 많이 받았던 지역은 남아메리카와 동남아시아, 남태평양의 오세아니아 지방이었다.
영국은 근대 시절인 18세기 후엽부터 동남아시아로 세력을 확장하여 고무, 주석 등 풍부한 자원을 착취하기 위해 말레이 연방, 미얀마, 북보르네오 등을 속지로 만들었다. 영국은 "문명화의 일"이라고 거짓 해명했지만, 실제로는 무력을 동원해 현지 동남아 주민들을 억압하고 경제적 수탈을 자행했고 여자들을 마구잡이로 성폭행했다.
영국군은 19세기 후엽쯤에 말레이시아의 페락 주의 페락 전쟁(Perak War) 등 저항을 토벌하는 과정에서 민간인에 대한 집단 보복을 일삼았으며, 이 과정에서 마을을 불태우고 약탈하며, 여성들을 강간하기를 즐겼다.
또 영국은 거액의 돈을 주고 중국계 노동자, 인도계 노동자들을 고용하여 이들이 동남아시아나 남태평양의 오세아니아 고무 플랜테이션이나 주석 광산을 직접 다스리는 감시관이 되기도 했다. 이렇게 동남아시아와 남태평양의 고무 농장의 감시관들이 된 중국계 노동자들과 인도계 노동자들은 영국인처럼 악랄하게 동남아시아와 남태평양의 현지인들을 짓밟고 죽이고 심지어 여성들을 강간했다.
이렇게 열악한 환경 속에서 동남아와 오세아니아의 여성들은 영국인 관리자나 중국계 감독관에 의한 끔찍하고 식민주의적인 성적 착취와 폭력에 무방비로 노출되었다. 만약 현지 동남아 여성들이 저항하거나 불만을 제기할 경우, 해고나 더 심한 보복을 당하기 일쑤였다.
영국은 속지에 자국의 법을 적용해 강간죄를 규정하기도 했지만 하지만 이는 유럽인 여성을 보호할뿐, 영국인 병졸이나 관료가 현지 동남아나 오세아니아 여성을 성폭행했을 경우 제대로 처벌받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오히려 영국은 송나라나 명나라, 조선시대처럼 엄격하고 금욕적이고 보수적인 유교적 성도덕이 있는 빅토리아 시대의 성 관념을 내세우며 현지 말레이시아, 그리고 폴리네시아 원주민 여자들의 성 문화를 "미개하다"고 폄하하고 이를 통제하고 억압하는 수단으로 삼았다. 대표적으로 "부자연스러운 범죄"를 처벌하는 법(Section 377 등)을 도입하여 동성애를 범죄화하는 등, 성에 대한 통제 자체를 지배의 도구로 활용했다.
영국의 이런 성폭력들은 말레이시아, 그리고 남태평양 사회에 깊은 정신적 트라우마를 남겼으며, 식민 지배에 대한 증오와 저항 의식을 키우는 결과를 낳았다. 또한, 영국이 이식한 가부장적 법률 체계는 독립 이후에도 여성 인권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프랑스는 근대 시절인 19세기 후엽쯤, 무력을 동원해 캄보디아를 진출했다. 프랑스 왕국 역시 영국처럼 "문명화의 일"을 주장했지만, 실제로는 여성에게 강간, 성매매, 성적 착취, 수탈로 번지는 경우들이 다반사였다.
프랑스 식민 당국자와 병졸들은 현지 캄보디아 여성들을 "임시 아내"로 삼는 것을 공공연하게 즐겼다. 이 여성들은 경멸적인 취급을 받았고, 프랑스인 남성이 본토로 돌아갈 경우는 버려지기 허다했다. 이는 명백히 성 착취였지만, 근대 사회에서는 남몰래 용인되었다.
이런 프랑스의 식민지 여자 강간, 성폭력들은 남자로서의 우월감을 과시하고, 피지배 민족의 자존감을 짓밟으려는 명백한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현지 여성의 몸을 통제하고 유린함으로써, 프랑스 왕국은 자기들의 지배가 얼마나 절대적인지를 각인시키려 했다. 그 결과, 캄보디아는 프랑스에 대한 깊은 적개심이 뿌리내렸고, 이는 끈질긴 독립 운동으로 이어지는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 게다가 이런 운동 이후에도 프랑스인 아버지에게서 태어난 수많은 혼혈아들은 정체성의 혼란 속에서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야 했다.
병사는 아니지만 1848년쯤 프랑스에서 태어난 탈인상주의 화가인 "폴 고갱"은 현재도 누구나 한 번쯤은 들어봤을 유명한 화가다. 하지만 그의 유명성과는 다르게 그는 생각보다 논란이 많은 인물이다.
폴 고갱은 첫 번째 타히티 열대 섬에 방문했던 시절(1891~1893)에, 떼하아마나(Teha'amana, 또는 떼후라)라는 이름의 13세 소녀를 "바히네(vahine)", 즉 현지인 아내로 삼았다. 당시 프랑스 식민지 개척자들 사이에서는 현지 폴리네시아 원주민 여자들을 아내로 삼는 것이 드물지 않은 일이긴 했으나 너무 어린 소녀였다. 게다가 고갱은 떼하아마나의 가족에게 소정의 대가를 지불하고 사실상의 부부 관계까지 맺었으며, 그녀는 그의 수많은 작품에 여자 누드 모델로 등장한다.
게다가 고갱에게는 덴마크인 아내 "메떼 가뜨(Mette Gad)"와 그녀에게서 태어난 5명의 자녀들이 있었는데, 폴 고갱은 가족들을 프랑스에 버려두고 떠났던 것이다. 메떼가 남편인 폴 고갱이 타히티에서의 생활, 특히 어린 소녀와의 문란한 성생활에 대해 얼마나 구체적으로 얼마나 알고 있었는지에 대한 명확히 기록은 찾기 어렵지만 폴 고갱은 가족을 경제적으로 거의 부양하지 않았기에, 부부 관계는 사실상 파탄에 이른 상태였다.
또, 폴 고갱은 그린 그림 속 모든 여성과 성관계를 가졌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그의 편지와 자서전적 소설 '노아 노아(Noa Noa)" 등을 통해 다수의 타히티 여자 원주민들과 성적인 관계를 맺었음을 알 수 있다. 그렇기에 그는 잉카 문명, 아즈텍 문명, 브라질 아마존처럼 개방적인 성문화를 가진 타히티 열대 섬에 일부러 성적인 탐닉과 착취를 하러 갔다는 비판을 받기도 하다.
이렇듯 프랑스 근대 시절 후기 인상파 화가 폴 고갱은 타히티 원주민 여자들과 정식으로 결혼하지는 않았지만 현지 타히티 열대 섬 원주민 관습을 이용해 어린 소녀들을 아내로 맞이하고 다수의 타히티 열대 원주민 여자들과 성적인 잠자리들을 했다. 이는 당시 잉카 문명, 아즈텍 문명, 브라질 아마존처럼 개방적인 타히티 열대 섬의 성문화와 유럽 근대 식민주의의 어두운 단면이 복합적으로 작용된 결과라고도 볼 수 있다.
7) 제2차 세계대전의 일본제국의 군용 위안부와 나치 독일과 소련군, 영국, 미국의 위안부들
시기: 약 1939년 9월 1일~1945년 9월 2일쯤
제2차 세계대전 일본제국의 식민지였던 필리핀에서 일본군의 군용 위안부로 끌려간 필리핀인 성노예를 다룬 영화 "Elena 1944"
20세기 초엽, 열강들의 갈등은 경제적인 이유로 두 차례의 세계대전으로 폭발했다. 특히 제2차 세계대전은 민간인을 대상으로 한 무차별적인 폭력과 인종 청소, 그리고 국가에 의해 조직되고 동원된 대규모 여자 성폭력이 극에 달했던 싸움들이엇다.
추축국 중에서 2번째로 강력했던 일본 제국은 전쟁 기간 동안 식민지였던 조선, 동남아시아 전역에서 수많은 여성들을 강제로 동원하거나 취업 사기를 통해 "군용 위안부"로 만들어 전선의 군인들을 위한 성노예로 삼았다.
소련군 역시 이에서 자유로울 순 없는데 1945년, 나치 독일의 패망이 임박하고 소련군이 독일 영토로 진격하면서 대규모 보복성 강간이 발생했다. 베를린에서만 수만에서 수십만 명의 독일 여성이 소련군에게 강간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나치 독일을 이겼다는 소련군의 오만함과 자만심, 그리고 나치 독일을 통제해야 된다는 경각심, 그리고 복수심과, 전쟁의 광기가 극에 달한 순간이었다.
나치 독일 역시 점령지에서 광범위한 성폭력을 자행했다. 특히 유대인 같은 "열등 인종"으로 규정된 여성들은 강제 수용소나 점령지에서 독일군에게 상습적인 성폭행과 성고문을 당했다. 이는 단순히 성욕 해소를 넘어, 인종 청소라는 나치의 이데올로기를 실현하기 위한 잔혹한 수단이었다.
영국과 미국 같은 서부전선에서도 연합국에 의한 여자 성폭력 사건들이 다수 발생했다. 나치 독일의 식민지나 다름없던 프랑스가 해방된 이후나 독일 점령 과정에서 미군과 영국군 병졸들에 의한 강간 사건들이 보고된 적도 있다. 동부전선에 비해 그 규모나 조직성은 덜했지만, 전쟁터의 남성 병졸이 점령지의 여성을 대상으로 저지르는 성폭력이라는 본질은 다르지 않았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의 성폭력은 주로 "원거리" 무기로 싸우는 전쟁이라는 것과 "전면전"이라는 전쟁의 양상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민간인과 병졸의 경계가 무뎌지고, 적국 백성 전체를 적으로 간주하는 분위기 속에서 여성의 몸은 또 다른 "수탈 대상"이 되어야 했다. 국가와 병졸들은 이러한 성폭력을 조직적으로 조장하거나, 최소한 묵인했다.
그 결과, 전쟁이 끝난 후에도 수많은 피해 여성들은 평생 지울 수 없는 육체적, 정신적 상처를 안고 살아가야 했으며, "강간으로 태어난 아이들"은 출생의 비밀과 정체성의 혼란 속에서 고통받아야 했다.
8) 에필로그
전쟁과 정복의 과정에서 여자 성폭력은 단순한 부산물이 아니라, 적을 굴복시키고, 민족의 정체성을 파괴하며, 침략자의 우월성을 각인시키는 체계적인 도구로 사용되어 왔다. 이는 특정 시대나 지역에 국한된 현상이 아니며,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인류사 전반에 걸쳐 나타나는 식민주의와 제국주의의 어두운 산물인 것이다.
오늘은 각 시대와 문명 속에서 자행된 제국주의적 성폭력의 대표적인 사례들을 역사적 배경, 전개 과정, 그리고 그 결과를 통해 심층적으로 살펴봤다.
이처럼 인류의 세계사는 거대한 전쟁들과 영웅들의 서사 뒤에, "여성 강간의 역사"를 감추고 있다. 전쟁과 정복 속에서 자행된 여자 성폭력은 단순한 개인의 범죄가 아니라, 한 민족과 공동체를 파괴하고 지배를 공고히 하려는 제국주의와 식민주의의 잔혹한 통치 도구였다. 이 어두운 역사를 직시하고 기억하는 것은, 다시는 이러한 비극이 반복되지 않도록 하기 위한 우리 모두의 책무이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