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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길 Jan 02. 2023

마치 눈을 처음 보는 것처럼

새벽의 고속도로는 모든 것을 낯설게 한다. 어디쯤 달리고 있는지, 같은 길을 가는데도 도저히 알 수가 없다. 거기에 더하여 눈까지 내리니 모든 것이 낯설 수밖에 없다. 날이라도 밝으면 마음이라도 좀 안정될까 깊은데, 보통 때는 6,000보 정도 걸으면 세상의 얼굴들이 잠을 깨고 있는데 고속도로 위는 잠을 깰 기운이 도저히 보이질 않는다.  

   

눈은 내가 어렸을 때 왔던 눈이 정말로 정답게, 의리 있게 다가왔는데, 그 시골에 5가구만 살았던 곳에, 까치밥 몇 개 매달려 있는, 까치도 아까워서 먹으려고 생각지도 않는, 소의 입김이 마구간 틈새로 베어 나오는, 초가집 지붕 속에 참새가 집들이하는, 대나무는 눈이 무겁게도 내려 앉아 낚싯대처럼 휘어지고, 수탉은 백지위에 발 도장을 찍어 가며 눈이 왔다고 아우성 치고 있던, 덩달아 개들도 남새밭을 운동장처럼 헤집고 다니던, 조그마한 마을의 눈 풍경이 아직도 선하다.  

     

 그 고향은 자본에 밀려 어디 갔는지도 알 수 없는데, 어릴 때 새끼줄 매어 그네 타던 나이든 느티나무만 시간을 지키고 서 있다. 자그마한 마을에 또래 세 놈 중 한 놈은 번뇌를 이겨낸 주지스님이 되어 있고, 또 한 놈은 소식만 가끔 들려오고, 또 한 놈은 번뇌를 짊어지고 사바세계에서 삶과 씨름하고 있다. 온갖 스트레스를, 시지프스처럼 굴리면서 이게 삶이라고 생각하고 살고 있다.  

   

깜깜한 터널을 전조등 없이 지나온 것처럼, 밖은 여전히 낯선 눈이 내 머리를 갉아 먹고 있다. 알만도 한길인데 쏟아지는 눈으로 옆 차선의 차, 후방의 차들은 더욱 낯선 길은 만들어 주고 있다. 예전에도 지금보다는 더 세찬 눈이 온 적이 있을 것이다. 그래도, 첫눈을 맞이한다는 것은 머리의 생각과는 달리 마음의 한 구석에는 무언가 좋은 일이 일어날 것 같은 어릴 때의 기억이 고생스런 지금보다는 더 진하게 박혀 있기 때문일 것이다.     

누구라도 눈을 맞은 기억이 나쁘지는 않았을 것이다. 눈이 오고 난 후의 모습은  비가 온 후의 모습보다는 더 정갈하지 않음이 눈의 속내인 것 같아서, 꼭 사람들의 앞뒤를 보는 것 같아 자주 보는 눈이지만 사람에 따라서는 그렇게 눈을 좋아하지 않을 수도 있다. 눈은 머리가 다 큰 후의 눈과 어릴 때의 눈은 그 차지하는 범위가 다를 수밖에 없다. 어릴 때는 계산이 없이 마냥 좋아할 수 있는 여백이 존재한다. 눈이 오면 추수가 끝난 논 위를 날개 젖은 참새 잡으러 많이 뛰어 다니기도 했고, 비료 포대를 엉덩이에 걸치고 양손으로 잡고 경사진 곳을 대책 없이 미끄럼을 타고, 손에 피가 비쳐도 그냥 재잘거리며 놀 수 있는 진리 같은 참이 있었다. 

    

머리가 크진 후의 눈은 계산에 따라 달라진다. 저 눈이 나에게 가져다 줄 어떤 이익, 정신적인 것이나 사회적인 것이나, 하다못해  섬을 사랑으로 바꿀 수 있는 어떤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깔끔하지 못한 계산이 앞선다. 차를 끌고 갈까, 대중교통을 탈까하는, 다른 사람에게는 중요하지 않은 일들을 진작 본인은 심각하게 생각한다. 그러다 계산이 틀리면 “괜히 차를 끌고 왔네”,“버스타고 올 걸”하는 부질없는 답을 내 놓곤 한다.     

몇 십 년의 눈을 겪어도 정답이 없는 것은 눈에 대해서 무지하다기 보다는 낯설기 때문이 아닐까하는 생각도 해본다. 혹 가다가 만난 사람처럼, 앞면은 있는데 누구라 확신을 못하는 것 같이, 작년에 보았던 눈인데 올해는 나에게 무엇을 요구할까하는 때 묻은 생각들이 낯설게 만들고 확고하지 못한 자신의 흔들리는 정서 때문에 그렇겠구나하며 지나가는 것이다.   

  

우리 동네에 오랜만에 눈이 쌓였다. 잠을 깨어 밖을 보니 겨울을 앓은 정원의 마른 잎새 위에도, 아직 겨울을 느끼지 못하는 자그마한 소나무 위에도, 찬바람과 악수하는 오죽의 가지에도,한 번 청춘을 되돌려 보려는 병꽃나무의 봉오리에도, 아직 꽃잎을 내달고 있는 조그마한 국화꽃 위에도, 눈은 체중을 느끼면서 누르고 앉아있다.      


어제는 낯선 눈이, 지금은 어렴풋이 앞면이 있는 눈으로 다가와 있다. 사람은 세월을 알수록 기억은 저만치 멀어져 간다. 사람이 냉큼 타인에 대하여 손을 붙잡지 못하는 것도 그 사람 같은데 혹시 실수할까봐 마음을 내놓지 못하는 경우도 생겨난다. 그 위에 세월의 눈이 쌓이면 누구도 피해 나갈 수 없는 일들이 생기기도 할 것이다. 그래서 삶에 눈을 더해보고 싶다. 앞면 없는 눈과 내 삶을 기웃거리는 생각과 언젠가는 어제처럼 기억을 덮어 버릴 눈과 하얀 기억을 만들어 보는 것이다. 하얗다고 하면 뭔가 순수한 느낌을 주는 것 같기도 한데, 실은 하얀 소리라고 하면 못으로 유리창을 긁는, 생각조차, 기억조차 하기 싫은 소리를 말한다. 그래서 하얀 기억이라고 하면, 기억 해 내지 못하는 슬픈 기억을 말하는 것은 아닌지 슬퍼진다.     


그래서 하얀 삶이라고 하면 아무것도 생각대로 이루지 못한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닐는지, 하얀색에 대한 너무 좋지 않은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아닌지 은근히 겁이 나기도 한다.

그래서 하얀 마음과 맑은 마음은 다른 뜻이어야 한다는 말도 하고 싶다. 

괜스레 일 보내는 기로에서서 나에게 좋지 않은 기억들을 타인에게 전가하는 일이 되지는 않을까 전전긍긍하고 있다.       


그래서, 좋지 않은 기억을 덮어씌우기 위해서라도 먹구름을 밀쳐내고 미소 짓고 있는 태양의  사진을 연하장으로 많은 분들에게 올리고 싶다. 누구라도 그렇게 살아야 하기 때문에, 처음 보는 듯한 낯선 눈도 강열한 태양의 부르짖음으로 맑은 마음으로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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