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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길 Jan 09. 2023

겨울 잎새


잎은 생명을 영위하는데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다. 동물은 움직이면서 필요한 먹이를 찾거나 만들어 낸다. 그 중에 일부는 남의 생명을 위협하기도 하나 스스로는 자신의 생명유지에만 힘을 쏟을 뿐이다. 많은 동물들은 풀을 먹이로 삼거나 또는 잎을 먹이로 삼는다. 동물들이 먹이가 입에 맞지 않으면 뱉어 낼 수 있는 권리를 탐하고 있다. 그러나 식물들은 동물의 먹이 활동에 전혀 반항하지도 못하고 자기의 생명을 담보하는 잎들을 설움을 삼키면서도 내어 주고 있다. 식물의 측면에서 보면 동물은 거의 적에 가깝다. 아무런 보상도 없이, 아무런 한계 조건도 없이 원하는 대로 다 뺏어 간다. 이것을 자연의 이치로 본단 말인가.    

 

“적자생존”은 다른 말로 바꾸어 보면 “먹자생존”이다. 지구상에서도 먹이를 잘 찾거나 잘 구하는 종족은 현재까지도 잘 챙겨 먹고 있음을 확인 할 수 있다. 그러다가 차가운 계절이 오면 열심히 챙겨먹고 동면을 하러 간다. 그것도 자신이 가장 유리한 곳을 찾아서 자신의 성격대로 적응 조건대로 기분 좋게 자러 간다.     


식물들은 동물에 비하면 유리한 점은 전혀 없이 잎의 노력으로 생명을 유지한다. 동물들은 강풍이나 비바람이 치면 움직여 유리한 장소로 이동하여 그 다음을 대비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지만, 식물은 직접 대응함으로써 그 고통과 싸워 나간다. 이길 수 있는 것은 전혀 없이 맨 몸으로 대항하다 잎도, 줄기도, 열매도 모두 빼앗긴다. 그러고도 살아남는 기막힌 적자생존이다. 일년 동안 몇 고비나 넘기고 나서야 그 간의 고통을 단맛으로 바꾼다. 그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인간은 식물과 동물을 모두 지배하며 먹거리를 챙겨 생명을 연장하며 적자생존 해왔다.     


지구 위에서는 왕으로 존재한다. 각자 개인은 자연의 표효에 무섭기도 어렵기도 하지만 인간 전체를 두고 보면 결국 어떤 상황에서도 승자로 남을 수 있다. 그런데 인간이 놓치고 사는 것도 있다. 동물이 멸종하더라도 사람은 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식물이 멸종하면 살기 어렵다가는 것을 크게 인지하지 않고 사는 것 같다. 그것은 지구는 절대 망하지 않을 것이라는 자신감에서 올 것이다. 그래, 지구는 망하지 않을 줄 모르겠지만, 지구위에 존재하는 식물들은 인간의 행동에 따라 많이 달라질 수 있고, 달라지고 있다. 인간은 각자가 살기 위해서 지구를 지키려 하지 않는 개인주의자들이다. 지구가 데워져 식물들이 사그라들고 있어도 그렇게 걱정하지 않는다. 잎의 중요성을 깨닫지 않고도 잘 살 수 있다는 자만을 가지고 있다.  

   

차츰, 식물들도 자신을 지키려는 일들을 하고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자신들을 괴롭히는 대상에 대하여 독소를 생산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지금은 피톤치드(Phytoncide)를 생산하는데 이것이 다른 해충들에 작용하여 쫓아내는 데는 성공하고 있으나, 사람들에게는 건강에 아주 좋은 활성 물질로 작용한다. 그렇지만 조금 더 해를 끼친다면, 잎을 먹으면 그 대상이 생명을 잃을 수 있는 독소를 만들어 낼 것이다. 그렇게 되면 사람을 포한한 모든 동물들이 살아갈 수 없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사람을 보은의 동물이라도 한다. 이 보은은 사람 상호간의 보은이 되어서는 안 된다. 식물로부터 받는 수많은 은혜에 대하여 보상은커녕, 식물이 살아가는데 좋지 않은 환경만 만들고 있다. 더구나 잎은 동물들이 숨을 쉴 수 있게 산소를 제공하는 중요한 수단이 되고 있는데, 사람들 주위에 공기가 너무 많아서 그 아쉬움을 전혀 모르고 산다.     


[겨울에 지친 잎새(여수, 2022)


오늘 뜰에 추위에 얼어 뒤틀어진 수많은 잎새들을 보았다. 그럼에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전혀 없어 안타깝기만 하다. 저 식물들도 애초에 좋은 땅에 뿌리를 내렸다면 저런 고통을 없을 것인데 하는 일차원적 생각밖에는 다른 일을 생각하지 못했다. 지중해나, 열대지방의 식물들은 겨울을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우리와 같은 대륙성기후, 즉, 여름과 겨울을 가지고 있는 나라, 그래서 잎새를 지킬 수 있는 계절이 반년도 채 못 되는 곳에서 잎새의 고통을 더 클 수밖에 없다. 우리는 겨울이 그렇게 길다고는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고작해야 12월, 1월, 2월 쯤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잎새의 측면에서는 절반이 겨울인 셈이된다. 10,11,12,1,2,3 으로 무려 6개월 동안 잎새는 추위에 떨어 자신의 활동을 하지 못한다. 오늘 본 잎새도 그렇게 찬바람 앞에 서서 뜰고 있었다. 물론 자연이 하는 일 앞에서 다른 방법이 있을 수는 없겠지만, 인간은 자신을 지켜주는 잎새들의 이야기들을 깊은 마음속에 간직해야 할 것이다. 잎새도 인간이 갖는 감정, 정서, 기쁨, 고통, 슬픔...인간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들을 느끼고 있을 것이다. 너무도 긴 겨울 동안 속을 웅켜잡고 얼마나 따스한 4월을 기다리고 있을 것인가를 느껴야 한다.     

꼭 마지막 잎새가 떨어지는 날을 애닯아 하지 않아도, 그 자리에 새로운 잎새가 돋을 때 그 사랑스러움을, 인간적인 측면에서 거대한 축복을 보내어도 과하지 않으리라.

       

우리는 잎새가 겨울 속에서 일그러져 가고 있는 것을 눈으로가 아닌, 가슴으로 느껴야 한다.

우리에게도 겨울은 참으로 잔혹할 수 있다. 머리가 정지되고, 숨쉬기가 어려우며, 많은 질병에 시달리게 하고, 마음조차 얼어붙어 옆을 바라볼 수도 없으며, 머리는 아예 생각과 발상전환을 정지시켜 판단을 하지 못하게 한다. 더구나, 그리운 상대에 대해서는 눈물샘조차 막아버려 그 대상 자체를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사랑하는 사람의 이미지도 보통 때와는 달리 깨어진 얼음에 굴절되어, 내 마음에 저장된 형태와 마음에서 아주 멀어져 있다.     


그렇다고 자연을 타개하자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자연 속에 있으면서 자연을 존중하지 않고 질타의 대상으로 생각한다면, 아마도 그 죄로 우리의 생각 능력조차도 빼앗아 갈지 모른다. 즉, 마음을 더 황폐하게 만들 것이고, 자아를 찾지 못하게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마음은 상황에 의해서 움직일 수 있다. 우리의 마음에 겨울이 가득 차 있으면 모든 것은 차갑게 보일 수 밖에 없다. 겨울 잎새의 마음도 지금의 상황이 반영되어 있어 아주 외로움을 느끼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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