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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길 Jul 01. 2022

대나무가지 회초리의 넋

이른 봄이었다. 흰, 아가 염소들이 녹색으로 솟아오르는 논 위에서 천방지축으로 뛰어놀고 있었다. 어쩜 저렇게도 귀여울까, 저렇게나 고울까. 어미는 젖 짜러 가고 없는데, 이제 어미를 찾는 것 보다는 파릇하고도 생기 넘치는 가없는 넓은 땅에서 저렇게나 평화로울 수가 있을까. 아마도 아무런 뜻 없이 그냥 뛰어놀고 싶었을 것이다. 어린 내 눈에는 그저 귀엽고 예쁘고, 꼭 동화 같은 느낌 속에 빠져 있었다. 아마도 지금 생각하면 자유라고 생각할 수 있을까, 아님, 외로움 속에서 벗어나고 싶은 굴레라고, 세월에 따른 외로움이라고 해야 했을까?     

지금은 가고 없는 어린 아기 흰 염소들의 뛰어노는 모습만 눈에 아련히 잡히는데, 그때의 예쁘고 귀여운 모습은 멍한 눈망울 속에만 남아있다. 어미는 가난했던 우리 가족에 젖줄을 대고 있었고, 나는 마시기 싫다고 고집부리다 칼바람과 같은 대나무가지로 몸값을 대곤 했다. 울 엄마는 참으로 작은 분이셨다. 정말로. 요즘으로 따지면 140cm나 되었을까. 그래도 대나무가지의 회초리는 나의 몸, 등, 다리에 수를 놓고 있었다. 비단 말을 안 들었다는 것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도망가지 않고 버티고 앉아 맞고 있으니 마음속의 한이 녹아들어 그렇게 했을 수도 있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3남 2녀의 어머니로, 시부모님을 모시고, 지금 생각하여도 어지간한 시집살이를 끝없이 한 것이다. 엄마는 나름대로 내가 해야 하고, 해나갈 일들을 내가 듣거나 말거나 내 머릿속에 새겼다.    

  

아마도 대나무가지가 아주 효과가 있는 새김 감으로 생각하였을 것이다. 더구나 울부짖는 멍으로 새겨진 새김 새는 내가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확실하게 심어준 것으로 생각난다. 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바로 전이었다. 엄마는 새벽밥을 두 번 했다. 한번은 큰아들을 부산에 있는 대학까지 기차 통학시키느라 새벽 3시에 밥을 해서 4시 기차를 타게 하고, 그다음 나머지 식구 밥을 하면서 6시에 아버지를 출근시켰다. 모두 학교 가고 나면, 그때부터 산허리에 걸려있는 밭으로 가서 고구마 순을 심고 물을 주었다. 그다음은 논에 가서 잡초를 메었다.얼마나 작은지 논에 엎드리면 벼 잎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같이 논을 메어 보면 정말로 빠르게 4~5골씩을 기어가며 잡초를 뽑았다. 얼굴은 벼 잎에 시달리고 할퀴어, 내가 그림 그릴 때 항칠한 것보다 더 심하였다. 집에 돌아오면, 소여물을 끓여야 했고, 돼지죽을 주고 개들도 살폈다. 그러니깐, 소, 돼지, 개, 말 양 중에서 말만 없었다. 그리고 소는 엄마의 멍을 알았던 것 같다. 내가 소를 몰고 오면 엄마 옆에서 눈물을 흘리는 것을 자주 보곤 했다. 그래서 소만도 못한 놈이라 나무라면 나는 그때 소보다도 엄마에게 도움 되는 것이 없었다.  

    

왜 저렇게나 소보다도 더 일을 많이 해야 하는지 잘 알지는 못했으나, 어렴풋하고 밉기도 했다. 그 반감으로 절대로 도망도 가지 않고 후려치는 대나무가지를 몸으로 받아 시원하다는 생각이었다. 이 매가 아팠다고 생각하기보다는 그렇게 애처롭고 분할 수가 없었다. 내가 어른 같은 말을 많이 했기 때문으로 생각이 난다. 우리 집은 냇가를 바라보는 동쪽으로 헛간과 돼지우리를 감싸는 대나무 숲이 무성했고, 이를 따라 자그마한 남새밭이, 남쪽으로는 탱자나무가 울타리를 만들었고, 그 가운데에 대나무 삽작이 있었다. 삽작의 오른쪽에 소와 염소의 마구간이 있었고, 이에 붙어 사랑채가 있었다.   


                               

                                                               [대나무가지 회초리]


서쪽에는 울 엄마 키의 10배가 넘는 버드나무 5그루가 비상 줄기에 뒤엉켜 힘들게 앓고 있었고, 그 밑 장독대엔 버선을 그린 갱지가 거꾸로 붙어 실바람에도 흔들리고 있었다. 또한, 집 주위로 냇가가 오른쪽에 두 개, 왼쪽에 두 개가 흐르던 아주 외딴 호롱불을 쓰는 집이었고, 다른 동네와는 너무 떨어져 있어 아래, 위, 동, 서로 십 리 이상은 가야지 사람을 볼 수 있는 곳이었다. 겨울에는 종일 썰매를 타도 지겹지 않게 냇가가 얼어 주었고, 봄에는 아련한 동화가 있었으며, 여름에는 몸을 담그면 시간 가는 줄 모르는 아주 긴 냇가가 있었고, 가을에는 곱게도 멍든 단풍이 속앓이하며 다가오는 외롭고도 평화로운 마을이었다. 길손이 우리 집 사랑채에서 밤을 지새우고 가는 일도 많았다. 혹, 한 번씩 들르는 스님이 이런저런 소식을 전해주는 그러한 동네에 3가구가 살았다. 참으로 엄마는 몸을 쥐어짜는 삶을 살았던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다 1969년 9월 27일 엄마는 한 번 더 주저앉을 수밖에 없는 일이 일어난다. 이때 형언할 수 없는 태풍과 폭풍이 들이쳐서 4개의 냇가가 모두 터져 생의 기반을 완전히 잃었다. 그보다 가슴 미어지는 일은 엄마가 그렇게 아끼며 좋아했던 소, 염소, 돼지가 다 가버렸다. 엄마는 아슬아슬한 순간에도 조금만 시간적 여유가 있었다면, 그렇게 물을 싫어하는 염소의 줄을 풀어 놓고만 왔어도 어디엔가 살 수 있었을 것이고, 소도 마찬가지였을 거라 생각하며 목 놓아 통곡했다. 이런 일들이 더욱 엄마의 마음을 줄로 다져 메었던 것으로 생각한다.      


어쩌면 이렇게 모질게 못을 박고 살아야 하는가 하는 한이 몸서리쳐 졌을 것이다. 나락을 탈곡할 때의 탈곡기를 밟을 때 키가 작아 탈곡기에 휩쓸려 들어가고, 자기 키의 2배나 넘는 도리깨질로 보리타작을 하고, 손에 맺히는 피멍은 가슴까지 도달했으리라. 콩 타작, 참깨 타작, 들깨 타작, 고추 수확, 배추, 도라지 수확, 이것들을 사람이 해낸다기보다는 모진, 너무도 모진 한이 해내었을 것이다. 나에게는 중학교에 다니면서도 엄마에 대한 아무런 대책이 없었다. 그저 말하지 않는 그것이 엄마에게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고, 무조건 참았다. 비록 이것이 매를 버는 한이 있더라도.     


인생사 새옹지마라고 한번은 떵떵거리며 살지 않겠냐는 생각을 울 엄마도 했을 것이다. 그러면 나아져야 했는데 그렇지 못했던 것으로 생각한다. 50을 넘었어도 손에 쥔 한을 놓을 수가 없었나 보다. 나 보고는 약대에 가서 돈 많이 벌어 집안을 좀 세우라고 했다. 그때 당시의 약사는 무척 돈을 잘 벌었고, 그의 땅을 밟지 않고는 다닐 수 없었던 그 정도의 부자였다. 나도 그렇게 하겠노라고 약대에 갔다. 그러고 군 필하고 약국을 1년 남짓했을까, 엄마는 정말로 내가 번 돈으로 식사 한 끼 받지 못하고 돌아가셨다. 누구나 믿기지 않는 일로, 추석 다음 쉬는 날 엄마에게 갔더니, 왜 이제 오냐시며, 떡국을 차려 주셨다.    

  

그리고 부산으로 온 새벽에 연락이 왔다. 엄마가 가셨다고. 할머니도 아니고. 끝까지 이놈의 얼굴 보고 가려고 기다렸나. 아니, 그래도 약사인데 약도 한번 들게 하지 못하고, 그렇게 가셨다. 억울하지만 그렇게 말 못 할 큰 병도 아니었고, 갑자기 가셨다. 아주 자그마한 사람이 온 가족을 가슴에 움켜쥐고 갔다. 내가 돈이라도 좀 벌면 쪼그라든 상처가 매워질 수 있었을까. 그래서 더 미안하다. 그래서 오히려 돈 버는 것을 포기했다. 그러나 이것은 엄마를 위한 길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그렇게도 움켜쥔 가슴을 억지라도 펴 드리기 위해, 그렇게 움켜쥔 한의 덩어리가 꼭 물질만은 아닐 것이라고, 비겁한 위로라도 해 드리고 싶어서, 그렇게 짓눌렀던 다 풀지 못한 한을 조금이라도 들어드리고 싶어서, 부자가 되기보다는 엄마의 응어리가 조금이라도 풀어질 수 있도록, 엄마의 바람이라고 생각하는 국립대 교수가 되었다.   

  

지금, 힘들었던 끝없는 그리움으로 심장에 새겨두기 위해 쇳소리 나는 악기로 내 심장을 두드리고, 곤두세워 대나무가지 회초리의 넋을 기억하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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