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성이란 한 개체가 가지고 있는 고유한 성질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보통 물성이라면 그 물질의 물리적 성질을 생각할 것이다. 물론 어느 물질할 것 없이 고유한 성질이 있다.
물을 보면 0℃에서 얼고 100℃에서 끓는다. 이것이 물의 물성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좀 더 다가서면, 물의 참모습은 다른 곳에 있다. 물의 유순한 측면은 항상 위에서 아래로 순리대로 흐르는 성질을 가지고 있으면서, 자신의 길을 가로막으면 에워가는 배려의 뜻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물은 또한 생명의 근원이어서 모든 생명을 태어나게 하는 포근함을 갖추고 있으며, 그의 속은 알 수 없이 깊어 속내를 알 수 없고, 자신을 드러내지 않아 중후한 무게감, 사람으로 말하면 드러나지 않는 깊은 인격을 가지고 있다.
또한, 물은 자신을 가둘 줄 안다. 또한, 모든 생명체가 항상 그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물이 화를 내지 않는 것은 아니다. 고약하게도 화가 나면 아주 심하게 그 원천조차 찾을 수 없도록 화풀이를 해댄다. 물론, 자신의 화보다는 주위의 자극이 그를 못 살게 했을 경우일 것이다. 어쩌면, 이러한 것은 더욱 인간적인 모습으로도 다가올 수 있고, 사람들이 조금은 무겁게 행동하도록 일깨워 주는 일이 될 수 있다. 문제는 여기서 발생한다.
우리는 물의 물성을 잘 알고 있다. 그런데도 물성을 존중할 줄 모른다. 항상 물성을 존중하지 않으면 그 피해는 인간들이 입게 되어 있는데도 자중할 줄 모르는 인간들은 물성을 챙기려 하지 않는다. 익사 사건을 보면 그 언저리에는 물의 물성을 존중해주지 않는 곳에서 발생한다. 물에 들어가기 전에는 기초 운동을 해야 하며, 수영복을 입어야 하고, 깊은 물에 들어갈 때는 산소통을 등에 져야 하며, 물에 대한 기준을 지켜야 한다. 상대의 기준을 지키는 것이 바로 물성을 존중하는 것이다. 산에 대하여 살펴보아도 마찬가지다. 산은 높다, 따라서 등산할 때는 목적에 맞게 등산복을 입어야 하고, 등산화를 신어야 하며, 물을 준비해야 하고, 계절에 맞는 장비를 챙겨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산이란 물성을 존중하지 않아서 일어나는 일이 된다.
사람들 사이의 관계에도 부모, 형제, 친구, 사랑하는 사람, 직장 선후배, 학생과 교사, 대통령과 국민, 군대의 상하관계, 사회생활... 등 많은 관계 속에 살아가고 있다. 부모는 부모의 물성을 가지고 있고, 자식은 자식대로의 물성을 가지고 있다. 이 물성들은 서로 존중되어야 가정이 성립될 수 있다. 부모는 부모 나름의 물성을 지키기 위해서 무지하게 노력을 한다. 이에 따라 자식들도 부모가 지켜야 하는 물성을 깨뜨리려고 하지는 말아야 하며, 물론 자식들의 물성도 부모에 의해서 존중되어야 한다. 서로의 영역이 다르므로 이를 지킴으로써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다.
친구를 보면, 아무리 친구라 하더라도 지켜야 할 선은 존재한다. 이것이 친구의 물성이다. 친구는 모든 것을 같이 할 수 있는 대상이지만 친구가 가지고 있는 물성을 건드리면 사고가 난다. 친구로서의 물성은 친구인 서로가 너무도 잘 알 것이다. 왜냐면, 친구니까. 사랑하는 사람 사이의 물성도 서로 존중되어야 한다. 실제로 사랑하는 사이의 물성을 깨뜨려 보라. 누가 서로의 곁에 있을 것인가.
[상대 존중(뉴욕), 2003]
대통령과 국민 사이도, 대통령의 물성은 나라를 지키는 일이다. 대통령의 물성이 존중되지 못하면 나라는 당연히 어지러워질 것이다. 또한, 국민의 물성을 존중하지 않으면 같은 일이 일어날 것이다. 우리의 현실은 대통령이 국민의 물성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존중하지 못한 것에서 일어났다고 본다.
물성을 스스로 지키기 위해서는 ‘~ 다워야’ 한다. 나는 나다워야 하고, 너는 너다워야 하며, 직책을 가진 사람들은 그 직책에 ‘~다운’ 물성을 가져야 한다. 주위에서 있으면서 항상 우리를 답답하게만 만드는 국회를 보라. 누가 국민을 대표하여 나라를 잘 살게 만드는 국회답다고 할 것인가. 나라도 나라다워야겠지만 나라를 구성하고 있는 모든 부분은 자신의 생명을 걸고라도 ‘~다워야’ 한다.
답지 못하면 신뢰를 얻기 힘들다. 신뢰는 상대방을 움직이게 하는 굳건한 힘이다. 신뢰는 쌓기는 힘들어도 무너지기는 아주 쉬운 것이라서, 자고 나면 자신의 신뢰 탑이 생채기를 입은 곳이 없는가를 살펴야 한다. 또한, 신뢰는 믿음을 주는 것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사회를 구성하는데 없어서는 안 될 요소라는 것을 인식해야 하고, 자신이 빠지면 세우는 탑의 그 부분이 무너져 탑 전체를 위태롭게 할 수 있다. 그래서 그 자신은 혼자가 아님을 스스로 깨닫고 중요한 위치에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개인의 위치가 중요한 것은 그 바탕에 다른 대상에 대한 신뢰가 깔려있어야 함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이렇게 자신은 그 주위에 ‘~다울’ 수 있는 자신의 공간을 마련해야 한다. 이러한 과정들을 통하여 자신의 물성을 채울 수 있으며 ‘~다워’ 질 수 있다.
모두는 물성을 가져야 하고 ‘~다워야’ 한다. 그래야 스스로에 대한 책임도 느낄 수 있고 맑아질 수 있다. 멀리서 찾을 필요까지는 없다. 나는 나다우며 나의 물성을 지키고 있는가를 항상 챙겨야 한다. 상대의 물성을 나무라는 것은 옳지 않다, 대부분의 물성은 개체가 태어날 때 가지고 태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나무란대도 소용이 없다. 그냥 그대로 존중해 주어야 한다. 사랑이란 말은 생겨날 때부터 그 특징을 가지고 생겨났기 때문에 우리가 사랑의 물성을 좌우할 수 있다고 해도 그것은 이미 사랑이 아닐 가능성이 크다. 부모란 단어도 생겨날 때부터 그 물성을 가지고 태어났다. 그러므로 그 뜻의 의미를 파헤치기보다는 있는 물성을 존중하는 것이 상관관계를 갖는 모든 개체에 생명을 불어넣는 것이 될 것이다.
쇠가 쇠의 물성을 갖지 못하면 이미 쇠가 아님과도 같아서 쇠의 역할에 사용될 수 없게 된다. 한겨울에 난로가 난로답지 못하면 그 누가 난로를 찾겠는가.
심지어 한 나라를 구성하는 것은 더 말할 나위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