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은 시작과 희망을 다스리는 말이다. 너무 가깝게 여겨져 반갑고 마음이 따스해서 좋고 전하고자 하는 깊이가 마음을 찡하게 하는 말이다.
어쩌면 봄은 기다리게 하는, 기다려도 되는, 고통을 숨겨주는 애틋한 말이기도 하다.
봄은 그 이전에 겨울을 생각하게 한다. 겨울은 모진 고난을 갖다주는 또는 우리가 겪는 일 중에서도 겨울이란 말은 등골을 차갑게 만든다. 겨울은, 동토는 우리의 생각과 잃어버려서는 안 될 양심과, 펼쳐야 할 자유와 가슴 시리게 하는 기다림, 함께 있어야 할 임과의 이별을 뭉쳐 차가운 땅속에 묻어 지키는 일을 한다. 구해 내고자 하면, 지구상의 어느 화폐나, 금, 은으로써도 막을 수 없는, 뿐만 아니라, 형언할 수 없는 정신적 재산을 몽땅 퍼부어도 구해낼 수 있는 것이 아니어서 그저 침묵으로서만 쳐다보게 된다.
[동토(러시아), 2015]
좀 더 곱씹어 보면, 누구나 품고 있는 마음을 표출하고 싶지만 그 일이 양심과 자유에 관련되어지는 것이면, 우리가 숨을 쉬고 있으면서도 공기의 고마움을 까맣게 잊고 있듯이, 아주 무감각하게 지내려는 습성을 갖고 있는 것 같다. 아예, 짐승이라면 자신의 영역을 표시해두고 자신과 가족을 위해서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덤벼 자신이 원하는 바를 이루고 있지만.
인간은 왜, 지켜야 하는 일을 미루며 기다리려고 할까? 양심 때문은 아닌 것 같고, 책임감은 더욱 아니며, 비겁함이나 두려움 때문이라 해 둘 수 있을까? 이는 모두 살아가는 방법 중에 한가지이다. 굳이 내가 나서지 않아도 일은 해결되어 있을 것이고, 그렇지 못하더라도 꽁지를 내리며 버티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법적으로 보호받고 있는 양심은 무엇이어야 하는가? 이 양심은 비겁함도 포함하여야 하는가. 또한, 양심은 타의에 의하여 조절되어야 하는가. 어떤 필요악이 되어 필요할 땐 쓰고, 불필요할 땐 버려야 하는가.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이 왜 양심을 지키지 못하는 걸까?
양심은 자신을 구할 수도 있고, 구렁텅이에 넣을 수도 있는 아주 무서운 것이라서 관리할 기관이 꼭 필요할 것 같다.
‘사람도 짐승 같이 살이야 하는가?’하는 전제를 두어보면, 이를 제어하는 것으로 인간이 가지고 있는 것이 이성이다. 그래서 이성을 잃었다는 말로 상황을 마무리하는 경우도 흔히 일어난다. 이성은 단순하게 정당한 것을 행할 수 있도록 판단을 세우는 것으로 정의한다.
그래서 이성은 양심과 항상 다투고, 또한, 비겁함과도 날을 세우고 있을 것이다. 분자 궤도를 빌려 설명을 해본다면 양심은 그 분자의 핵이 될 것이고, 이성과 비겁함은 핵 주위를 돌고 있는 전자로 볼 수 있다. 따라서 반응 환경에 따라 이성이 떨어져 나가기도 하고, 비겁함이 떨어져 나가 양심이라는 분자를 변하게 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성이 떨어져 나가면 비겁함 쪽으로 기울 것이고, 비겁함이 떨어져 나가면 이성 쪽으로 기울 것이다.
반응 환경이 겨울이 될 때 자연적으로 비겁함이 떨어져 나가야겠지만, 인간은 너무도 영특하여 이성을 강제로 떨어뜨리는데 익숙한 모습을 보여 왔다. 우리가 전번에 봄을 빼앗겼을 때 당연히 비겁함이 떨어져 나가야 했었지만, 이성이 갈 길을 잃고 추풍낙엽처럼 가버렸던 사실도 기억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봄이 왔을 때 스스로 버렸던 이성을 주워 담아 아주 교묘하게 사용함으로써 우리는 더 할 수 없는 추한 길로 들어섰고, 오늘의 겨울을 맞고 있다.
봄은 우리에게 기다림을 준다는 것은 누구라도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면, 희망과 시작을 가져다주기 때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