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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길 Jul 11. 2022

녹차(綠茶), 정중동의 힘

일지암


녹차를 생각하면 깊은 산골짜기 선녀탕의 맑은 모습과 청명한 아침에 진주를 머금고 크로스 필터에 십자형으로 내미는 예쁜 빛살, 그리고, 고요한 뜰이 깨는 소리도 너무도 맑게 들려온다.

녹차는 정중동의 힘을 가지고 있음인가, 고즈넉하면서도 사람을 생각하게 하는, 일으키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저 고요의 진주가 가슴에 다다를 때면 그저 까치의 울음소리도 정겨워,  오늘은 어디에서 나를 놀라게 할 벗이 올 것인가 자못 궁금해지기도 한다.     


그래서 차는 고요히 혼자 마셔도 좋고, 아침 햇살에 등을 틀며 들어서는 저 사슴과 함께라도 좋고, 언젠가 다투어 소식 없어진 벗이 꿈속에 나타나 잘 있었나 하는 풍경도 좋다. 모두 다 아우를 수 있어서 좋고 향긋한 차가 목으로 넘어갈 때, 못 잊어 애태우던 임 생각에 울컥하여도 좋다. 타향에 살던 친구들을 모아 잔잔하게 얘기하면서 홀라당 벗고 냇가에서 멱감던 그때의 이야기도 찻잔 속 깊이 차고들 수 있다.  

   

녹차란 그다지 말이 없어도 서로가 통할 수 있는 마음이 있어서 더 좋다. 눈을 보면 그 사람의 지내온 역사를 알 수 있듯이, 눈물 한 방울 차에 섞어 들면 또 무슨 말이 필요할까. 그냥 잘 지내왔다고. 그래서 친구란 말보다도 벗이라는 말이 더 살갑게 다가오는 것은 차가 가지고 있는 인내의 맛이 아니겠는가. 

        

 

또한, 정자에 앉아 물밑에 떠 있는 달을 보면서 이야기 할 수 있는 것은 비단 벗뿐만 아니라 자연의 저 달과 별과도 함께 할 수 있는 것이니 더더욱 반갑지 아니한가. 옛 벗이 말하기를 촉석루에서 차를 마시면 내 잔에, 벗의 잔에, 내 눈에, 벗의 눈에, 흘러가는 남강에, 저 하늘에 6개의 달이 뜬다고 하지 않았던가. 어찌 나의 벗이 너이고 너의 벗이 나이라고만 할 수 있겠는가. 저 벗도 내 벗, 이 차도 내 벗, 물에 떠서 흘러가는 저 꽃잎도, 잠 못 드는 저 새도, 저 별도 다 내 벗이 아니던가. 

                                            [촉석루의 벗들(진주), 2018]    


차의 향은 내가 있는 이 주위에만 흩어져 있지 않다. 저 먼 고향에 달을 보고 빌고 있을 어머니, 불러도 대답 없는 내 어머니, 떠 놓은 정화수 위에도 스며들어 자식들을 기다리는 아련한 향으로도 다가온다. 향은 누가 갖다주어서 느끼는 게 아니고, 스스로 퍼져 가슴속에 스며드는 것이다. 이 향을, 천년이 밴 이 향을, 이 그리움을, 어찌 향으로만 맺어 둘 것인가.     


차는 마음의 고향이다. 안 가면 가고 싶고,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신록이 늘어져 있는 실루엣 사이로 차를 따는 아낙네. 우리 어머니의 모습이다. 송골송골 맺힌 이슬을 훔치며 녹차와 같은 키, 까치발로 때어낸 참새의 혀, 둘러쓴 모자 사이로 패인 주름, 손끝 마디마디에 맺힌 한, 누구를 향한 기도일까.     


차는 참 많은 것을 생각게 하고 기억나게 한다. 낡은 35mm 카메라의 흑백 필름으로 꽉 채우지 못하는 초점 사이로 흘러가게 한다. 또한, 차는 사람을 선하게 만들며 구도(求道)케 한다. 허수룩한 밀짚모자에 휘어진 허리로 지게 위의 보릿대가 출렁거리는 것을 보니 틀림없는 우리의 아버지다. 이러한 영상은 구도자의 마음이 아니면 보이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녹차는 사람을 인간답게 만드는 역할을 몇 천 년에 걸쳐서 해오고 있다. 우리가 인간다운 모습으로 자신을 낮추며, 길동무를 만들어 가는 외로운 길일지라도 서로를 챙길 수 있는 건 인간에게 무언으로 가르쳐온 묵언 수행(黙言 修行)이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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