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물길 Jul 28. 2022

천둥소리

오케스트라

외딴 시골집, 하얀 박꽃이 하늘을 바라보며 태양, 달, 별, 구름을 사모하고 있고, 그 빈틈으로 사이로 고구마 빼때기가 뒤척이며 누워 있다. 꼭 배가 고파서는 아니지만 사닥다리를 타고 올라가 지붕에 있는 빼때기를 씹어 먹는 일은 빼때기를 삶아 사카린을 넣어 달달하게 배를 불리는 것보다 또 다른 재미와 욕망을 불러일으키곤 했다. 달랑 네 집 사는 동네를 지붕에서 쳐다보면 야릇한 기쁨도 다가오곤 했다.


                                                      [외딴 시골집(창원), 1978]


그때도 여름은 참으로 뜨겁게 달아올랐다. 초가집을 중심으로 4개의 하천이 있었고, 유독 큰 내가 말라버리면 참으로 큰일들이 일어난다. 냇가에 물이 넘쳐흐를 때에는 물에 휩쓸려 갈까 봐 마음도 못 내었지만 차츰 여름으로 다가감에 따라 흐르는 량이 적어지고, 넓은 냇가는 자기가 가기 쉬운 곳으로 찾아 흘러 꼬맹이들이 멱감고 장난치며 놀기에는 참으로 안성맞춤이었다. 온몸에 탄 피부가 그을려져 살갗이 일어나고 물집이 실려도 그것을 벗겨내고, 물집을 터뜨리는 재미로 하루해가 넘어 가곤 했다.     


피부가 타고, 얼굴이 새까매져 갈 무릎에는 그 큰 냇가도 목이 마르고, 주위에는 벼들이 주인을 원망하다 못해 스스로 하늘을 향해 기도하는 모습을 보였다. 꼬마의 눈에는 타들어 가는 논보다 풍덩 멱 감을 수 없는 것이 더 원망스럽다. 주인들을 더 마음이 타들어간다. 양수기도 없던 시절이라 몸으로 해결할 수밖에 없던, 노력이 아니면 벼를 살릴 수 없는, 원시보다는 조금 발달된 농법이지만 물이 마른 지금은 원시 농법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소는 무슨 죄를 짓고 세상에 나왔길래 사시사철 주인의 노예밖에 될 수 없었을까를 생각해보면, 꼴 먹이러 다니던 꼬마의 생각에도 불쌍하다는 마음이 들고 죄를 짓지 말아야 다음 세상도 사람으로 태어 날 수 있다는 어른들의 이론을 머리에 새기기도 한다. 냇물이 말라버렸을 때 가장 먼저 해야 하는 일이 냇가에 웅덩이를 파는 것이다. 그것도 논이 가까운 냇가 둑 근처에 파야하기 때문에 시내 한가운데 파는 것보다 더 많은 어려움이 따르는 것이었다. 먼저 소가 쟁기처럼 생긴 널따란 기구로 모래를 파내고, 나머지는 사람들이 고리 달린 큰 삽으로 서로 박자에 맞추어 파 들어간다.       

 

깊게 고인 물을 퍼 올리는 노동을 이용하지 않고는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었다. 5 m가 넘는 곧 바른 소나무 끝에 물을 담을 페인트 통 같은 물을 담을 수 있는 통을 고정시키고 다른 끝에는 퍼 올린 물을 수로에 부을 수 있는 손잡이를 만들어 지렛대 원리로 손잡이에 힘을 주어 매달리 듯 힘을 주면 물이 퍼 올려지고 수로를 따라 논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었다. 얼마나 많은 횟수로 물을 길러야 그 큰 논에 물이 차겠는가, 밤을 새우지 않으면.     


같은 동작을 수없이 함으로써 물을 댄다는 것은 옷만 입은 원시인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래도, 그때의 하늘은 인간이 이렇게 밤을 새워 물을 대는 모습에 감동이라도 하여, 노력한 것만큼의 대가로, 인지상정으로 서로 돕고 살 수 있었음에 행복해했다. 비가 오면 감사한 뜻으로 하늘을 향해 두 손 모으고 ‘하느님 감사합니다’를 손바닥이 닳도록 비비고 진정으로 감사함을 표시하였다. 오래된 느티나무를 우산 삼아 제를 지내는 것이 지금도 아련하게 보이고 하늘에 의존함에 그 정성이 지금의 사람 냄새로 바뀌었을 것이다.     

 

우르릉 꽝! 

촛불보다는 몇 백배의 밝기로 공연을 알리는 번개 빛이 먼저 스쳐가면, 하늘은 준비했던 엄청난 곡소리로 하늘뿐만 아니라, 온 동네 사람들의 마음까지 삼켜버렸다. 한번 우르릉 꽝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웅장한 오케스트라 연주였으며, 이 연주에 맞추어 목이 터질듯 한 소나기의 합창소리가 행진곡으로 따라왔다.     


지금 내 연구실 밖으로 한두 번, 천둥소리가 나더니 이내 잠잠해져, 옛날의 박자를 잊어버렸고, 뒤따르던 하염없는, 언제 끝날지도 모르던 정겨운 노래 소리도 말라버렸다. 이것이 시대에 따라 진화한 것인지, 목이 아파 노래를 못하는 것인지, 아님, 관중들의 태도에 불만이 있어 공연을 중단하는 것인지, 참으로 그 속을 알 길이 없다.     

  

확실한 것은 세월이 흘러 기력이 쇠잔(衰殘)해졌다는 느낌이 든다. 이러한 노화는 비켜 나갈 수는 없겠지만, 아마도 노화되었다는 것보다는 많이 아프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왜 생각하지 못할까. 사람들은 자신이 아프면 금방이라도 죽을 듯이 난리를 치는데, 저 아픈 천둥소리는 왜 알아듣지 못하는 걸까. 우리도 노래 부르기 싫을 때에는 목에 칼이 들어와도 싫은 것은 싫을 것이다. 저 아픈 천둥소리를 듣고, 박자가 틀렸느니, 노래가 안 나온다느니 할 수 있는 것은 인간의 관점에서 보니 이런 말을 할 수밖에 없다.  

     

적어도 우리가 아주 명쾌한 오케스트라와 이에 따른 하늘의 노래를 아름답게 듣고 평가하기 위해서는 귀를 다듬는 일보다 오케스트라의 구성을 도와주는 일이 현명할 것 같다. 자연은 거짓말을 해야 살 수 있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자연을 대상으로 사는 인간들이 거짓말을 하지 않으면, 신의를 지키면, 그 공동체는 오랫동안 평화롭게 유지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작가의 이전글 겨울밤은 참으로 희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